이 대통령이 머물던 대전의 충남도지사 공관과 국무회의가 열리던 충남도청은 대전형무소에서 멀지 않았다.
이승만이 대전에 도착하고 나서 이틀 후인 6월 29일.
급작스럽게 체포된 대전 인근의 보도연맹원들과 여순사건 관련 사상범 등 갑종으로 분류된 수감자 일부가 골령골로 끌려갔다.
골령골은 지금의 남대전 나들목 인근에 있는 동구 낭월동 골짜기로, 당시만 해도 재를 넘어 충북 옥천을 오가는 사람들 말고는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였다.
끌려간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눈에 살기를 띤 헌병대와 경찰이었다.
현장을 목격한 충남경찰청 사찰과 형사 변홍명(가명)은 이렇게 회고했다.
"헌병대는 이들의 눈을 가리고 뒤에서 나무기둥에 손을 묶었습니다. 헌병 지휘자의 구령에 따라 헌병대가 총살을 하고, 헌병 지휘자가 확인 사살을 했습니다. 이어 소방대원이 손을 풀고 시신을 미리 준비한 장작더미에 던졌습니다. 시신이 50~60구씩 모이면 화장을 했습니다. 그러다 가져온 나무기둥을 다 써버리자 미루나무에 묶어서 총살했습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950년 7월 1일 새벽 3시 이승만이 비밀리에 부산으로 떠났다.
소식을 들은 정부 요인들도 서둘러 대전역으로 달려가 탈출하기에 급급했다.
이날 대전지검 검사장은 대전형무소에 '좌익 극렬분자를 처단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동시에 대전에 주둔하던 제2사단 헌병대와 제5연대 헌병대가 대전형무소에 파견됐다.
또다시 처형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대전형무소 소장 서리는 피난길에 오른 법무부장관을 찾아 대전역으로 달려갔다.
이우익 법무부장관은 "군이 재소자들을 달라고 하면 줄 수 밖에 없다"면서 "후일 문제가 생기거든 나를 만났다는 얘기를 하지 말라"고 사정했다.
7월 3일 재소자들이 감방 문 밖으로 끌려나가 총 개머리판으로 맞으며 트럭에 실렸다.
대전형무소 특별경비대원이었던 김상곤(가명)은 이렇게 증언했다.
"뒤로 다가가 두 사람을, 한 사람 왼손하고 옆 사람 오른손하고 어긋매끼로 묶었어요. 묶어서 감방부터 현관까지 끌고 왔어요. 헌병이 징발한 트럭에 가득 실었어요. 헌병들은 총 개머리판으로 때리면서 앉으라고 했어요. 못 앉을 것 같죠? 재소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앉아서 아주 납작해져요"
재소자들이 끌려간 곳은 며칠 전 처형이 진행된 산내 골령골이었다.
경찰은 사전에 산내 주민과 청년방위대를 동원해 구덩이를 파놓았다.
2차 처형은 5일간 진행됐다.
대략 1,800명에서 2,000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3차 처형은 7월 6일부터 7월 17일 새벽까지 벌어졌다.
처형장소 인근의 성당에 있던 프랑스 신부 카타르는 총소리에 놀라 무슨 일인가 하고 달려갔다.
1,000명이 넘는 죄수들이 참호를 파고 있었다.
이 광경을 몇몇 미군장교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카타르는 지휘관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들은 왜 총살당하는가?"
"그들은 대전교도소에서 폭동을 일으킨 공산게릴라이기 때문이오"
"이들은 재판을 받았소?"
"노인양반~ 이 사건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카타르는 거칠게 옆으로 밀쳐졌다.
풀숲에 무릎을 꿇은 카타르는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를 드렸다.
이런 참사는 대전에서만 빚어진 게 아니었다.
서울 북쪽을 제외하고는 국군이 후퇴하는 남쪽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벌어졌다.
어떻게해서 비무장 민간인들을 이렇게 처참하게 죽였을까?
◈ 석방된 좌익사범과 보도연맹원들이 설친다는 소문에 긴장한 이승만 정부
인민군에 의해 형무소에서 풀려난 보도연맹원들이 인민군에 협력해 우익인사들을 학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서울에서도 풀려나온 보도연맹원들과 좌익사범들이 설치고 다닌다는 소식이 이승만 정부에 알려졌다.
이승만 정부는 6월 28일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공포했다.
이 조치의 골자는 계엄하에서 좌익사범에 대한 즉결처형을 인정한 것이다.
이때부터 평택 이남 모든 지역에서 주로 국민보도연맹원을 대상으로 한 공식적 '처형'의 외양을 한 학살이 마구잡이로 진행된다.
국민보도연맹은 정부 수립 이후 좌익에서 우익으로 전향한 사람들의 선도방안으로 만든 정부 주도 조직이었다.
대한민국이 포용한 사상범들을 '적'에게 협조할 것으로 추측하고 한반도에서 멸종시키는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저 정기적으로 실시하던 교육이겠거니 하며 경찰서와 지서로 갔던 이들은 모두 돌아오지 못했다.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는 최저 10만에서 최고 30만 명으로 추산되지만, 감이 빨라 도피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죄다 그 당시 유행어로 '골로 갔다'.
보도연맹원 대부분이 사상과 이념은 물론 좌.우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순진한 양민들이었다.
1950년 5월 6일,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경남 장승포에 있었던 거제경찰서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들 45명은 거제지역에 사는 국민보도연맹원들이다.
사진 좌측 상단에 '어제의 적은 오늘의 친우'라는 글귀가 보인다.
이들은 한때 빨치산에 속해 있었지만 자수해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
이들 모두 구속된 뒤 지심도 앞바다에 수장됐다.
후손들은 시체를 찾지 못해 그 당시 돌아가신 날로 추측되는 음력 6월 11일을 제삿날로 정해 같은 날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정부는 유가족에게 재갈을 물렸다.
유가족들은 '빨갱이 가족'으로 몰릴까 두려워 고향을 등지거나 자녀에게도 죽음의 진상을 알리지 않았다.
그래도 면서기 조차 할 수 없는 연좌제의 꼬리표가 후손들의 갈 길을 막았다.
◈ 전세가 역전되자, 후퇴하는 인민군도 도처에서 양민을 학살하다
1950년 9월 조선노동당은 인민군 전선사령부에 후퇴 명령과 함께 각 지방당에 '유엔군 상륙 시 지주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인민군은 대전형무소에서 수감자를 9월 25일부터 사흘간 집단 처형했다.
수감자 500명의 시신이 형무소 안의 밭고랑과 우물 등에서 발견됐다.
특히 깊이 11.6m, 둘레 6.3m의 두 우물에서만 100여 구의 시신이 인양됐다.
정치보위부 건물인 프란치스코 수도원과 목동성당에서도 약 110명이 희생됐다.
용두산에서는 300m 떨어진 대전형무소에서 끌려온 600여 명의 시신이 묻혀 있었다.
이같은 참상은 최남단 남해 바닷가에서 북한의 청천강 일대, 원산~함흥에서까지 저질러졌다.
나치 독일이나 일본 침략군도 남의 나라에 쳐들어가서 그 민족을 학살했지, 자기 국민들에게 총부리를 돌리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이나 김일성 정권 모두 자신들이 후퇴할 경우 모두 '반 이승만', '반 김일성' 기치 아래 봉기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사악한 정권은 자신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짓을 저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