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이 쳐들어온다~ 나부터 살고보자"

[임기상의 역사산책 78]대통령이 야반도주하자 고관대작들까지 '피난경쟁'

◈ 대통령의 도주 사실을 뒤늦게 안 대한민국 국회

38도선을 넘어 남진하고 있는 인민군 부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T-34 탱크 130대를 앞세운 인민군 7개 사단 9만 명이 38선을 넘어 기습남침을 시작했다.

국군의 방어선은 전 전선에 걸쳐 맥없이 붕괴되었다.

이날 오후 2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후방사단을 전선으로 보내 반격을 가하면 격퇴할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쳤다.

이틀이 지난 27일 새벽 1시에 국회 본회의가 열렸다.

의원들은 210명 중 절반밖에 출석하지 않았다.

의원들은 '국회는 일백만 애국시민과 같이 수도를 사수한다'는 결의안을 가결했다.

신익희 의장과 조봉암 부의장이 대표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결의안을 전하기 위해 경무대로 갔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1951년 7월 부산 피란 시절 전황을 듣는 신익희 국회의장(왼쪽 두 번째),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왼쪽 첫 번째), 무초 주한미국대사(오른쪽 첫 번째). 이 자리에 없는 국회의원들은 서울을 빠져나오지 못해 대부분 납북당한다.
이승만은 국회 본회의가 열리고 있는 동안 새벽 3시 반 남행열차에 탑승했다.

피난 일행은 부인 프란체스카와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비서 황규면, 경호경찰 1명 등 달랑 6명이었다.

아마 한민족 역사상 국가원수로는 가장 작은 규모의 피난행렬일 것이다.

이승만이 탄 특별열차는 기관차에 객차 두량이 달린 낡아빠진 3등 열차였다.

유리창은 깨져있어 바람이 들어왔고, 의자는 시트조차 없는 나무의자였다.

이승만의 야반도주는 극비사항이었다.

신성모 국방장관과 경무대 일부 비서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국회의장과 대법원장, 무초 주한미대사, 군 최고지휘관들도 전혀 몰랐다.

가운데가 한국전쟁 초기에 혼란을 불러 일으킨 신성모 국방장관이다. 그의 군 경력은 외항선 선장 외에는 전혀 없었다. 왼쪽이 김활란 이대 총장, 오른쪽이 백선엽 장군. 이 두 사람은 국내외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친일파였다.
새벽의 서울거리를 바라보는 이승만 뇌리에 무초 대사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만약 공산주의자들에게 잡히면 한국에는 재앙이야~"

무초는 무뚝뚝하게 "결심은 각하 스스로 하시는 것입니다만 저는 여기 서울에 머물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자리를 떴다.

속이 상한 이승만은 서울을 떠날 때 미국대사관에도 알리지 않았다.

동이 트자 국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경무대를 찾은 장관들은 그제서야 대통령의 도주사실을 알았다.

◈ 정부고관과 국회의원들의 '탈출경쟁'이 시작되다

운좋게 피난열차를 탄 서울시민들. 열차를 못 탄 시민들은 걸어서 고달픈 피난살이를 시작한다.
'수도 사수'라는 지킬 수도 없고 의지도 없는 결의를 하고 집에 돌아온 국회의원들은 가족들을 데리고 촌각을 다투며 서울 빠져나가기 경쟁을 벌였다.

어떤 국회의원은 국회 본회의 도중에 집에 전화를 걸어 피난갈 채비를 하라고 미리 일러두기도 했다.

수도 사수 결의안을 접수할 정부가 도망친 것을 안 신익희와 조봉암은 국회로 돌아와 이 사실을 알리고 산회를 선포했다.

의원들은 술렁거리며 집으로 달려가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신익희 국회의장 마저 참모인 윤길중에게 "자네를 두고 내가 혼자 가겠느냐?"고 안심을 시키고는 아무 연락도 없이 가족과 함께 서울을 빠져나갔다.

한편, 대통령의 도주 사실을 뒤늦게 안 장관과 고위 공무원들도 시민안위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서둘러 한강을 넘었다.

이날 오후가 되자 대전에 도착한 이승만은 자기가 서울에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녹음한 연설을 방송에 내보냈다.

서울시민과 전 국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내용이다.

이 방송은 밤 10시에 시작되어 여러 차례 방송되었다.

안심하고 잠에 든 서울시민들은 새벽에 엄청난 폭발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한강다리가 끊기는 소리였다.

이렇게해서 서울시민 대부분이 고립돼 인민군의 수중에 넘어간다.

서울에서 도망쳐나온 이승만이 임시 집무실로 썼던 옛 충남도청 건물. (사진=충청남도 제공)
서울시민을 버리고 피난길에 나선 정부요인들은 대통령이 대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제히 대전으로 몰려들었다.

이승만은 충남도지사 공관을 숙소로 정하고, 이시영 부통령을 비롯한 대부분의 고위 공무원들은 대전시내에 있는 여관 '성남장'에 모였다.

성남장은 부지 약 3,000평에 건평이 200평으로 대전에서는 가장 큰 여관이었다.

이 여관에 300명이 넘는 각료와 국회의원, 고급관리, 장군, 재계인사들이 묵었으니 혼잡할 수 밖에 없었다.

성남장의 여주인 김금덕은 소위 사회지도층이라는 이들의 행태가 꼴불견이었다고 회상했다.

"마당에는 그들이 타고 온 승용차가 80대 이상 주차해 있었고, 그들 중에는 가재도구에다 키우는 개까지 데려온 사람들도 있었다. 이시영 부통령은 다른 반찬이 있어도 김치와 찌개만을 먹고 검소하게 처신을 해서 훌륭한 인품을 보였지만, 반찬타령을 하면서 맛있는 요리를 내오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모여 앉아 전시의 위급상황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지 않고 자신들의 안전한 피난 방책 얘기만 나누고 있었다"

중국대륙에서 풍찬노숙 하며 독립운동을 하던 이시영 부통령과 대다수가 친일파로 구성된 고관대작들의 행태가 대조를 보인다.

피난살이 중에도 독립투사의 면모를 잃지 않은 이시영 부통령. 1951년 5월 9일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최악의 범죄 중의 하나인 국민방위군 사건을 비판하며 '국민에게 전하는 글'을 남긴 후 사임한다.
7월 1일 이승만은 서울에서와 똑같이 비밀리에 숙소인 충남도지사 공관을 떠나 이리~목포를 거쳐 배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대통령이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정부요인들도 서둘러 대전역을 통해 빠져나갔다.

대통령과 정부 고위인사들이 아무도 모르게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은 대전시민들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서울시민을 버린 것처럼 대전시민들도 아무 대책 없이 버려진 것이다.

임시수도였던 대전은 무정부상태로 빠져들었다.

시민들이 아우성치며 탈출하는 사이에 군경은 대전형무소에 있는 1,800여 명의 좌익사건 연루자들을 연일 처형하고 있었다.

◈ 부산에서도 여차하면 일본이나 제주도로 도망치려는 지도층 인사들

인천항에서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한 피난민들. 이들이 속속 부산항에 도착하는 와중에 지도층 인사들은 일본으로 도망갈 때 필요한 배를 찾고 있었다.
부산으로 몰려든 상당수 고위층과 부유층 인사들은 대구마저 위협을 당하자 배를 구해 위급할 것 같으면 일본으로 도망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미 일부는 제주도로 도주한 상태였다.


부산에서 가까운 다대포, 송도, 영도 등의 항내에는 피난 나온 정치가와 실업가, 고위장교들이 도망칠 때 필요한 선박과 선원을 찾느라 아우성이었다.

제1사단 13연대장 김익렬 대령은 "출항하려는 한 척의 배를 정지시키고 조사해보니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국회의원 10명과 고급장교 10여명,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었다"고 회고했다.

일본으로 밀항하는 것을 이른바 '돼지몰이'라고 불렀다.

밀항 주선비용은 1인당 50만 원, 나중에는 100만 원~150만 원으로 올라갔다.

밀항을 위한 선박 대절비는 500만 원~1,000만 원까지 부르고 있었다.

고 강원용 목사
기독교 지도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의 추태를 보면서 강원용 목사는 '과연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인가?'라는 자괴심에 빠졌다고 고백했다.

길지만 모두 인용해보자.

"1.4후퇴 이후 대구는 물론 부산 함락도 시간문제라는 비관적 전망이 돌고 있었다. 아무래도 위험하니 교역자들을 제주도로 피난시킨다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미국이 큰 수송선 하나를 내줘 우선 목사와 그 가족들을 제주도로 옮기기로 했다. 내가 NCC(전미기독교회협의회)에서 활동하고 있어 수송선에 탈 목사와 가족들을 인솔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부둣가에 도착하자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전혀 예상 밖의 상황에 그만 입을 딱 벌리게 되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장로들까지 몰려와 '어떻게 목자들이 양떼를 버리고 자기들만 살겠다고 도망칠 수 있느냐?'면서 달려들어 수송선은 서로 먼저 타려는 목사와 장로들, 그 가족들로 마치 꿀단지 주변에 몰려든 개미떼처럼 혼잡의 극을 이루고 있었다.

심지어는 자기가 타기 위해 올라가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사람들도 있었고, 여기저기서 서로 먼저 타기 위해 욕설과 몸싸움이 난무했다. 난장판이 되자 헌병들이 와서 곤봉으로 내리치며 질서를 잡으려고 해도 사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곤봉으로 두둘겨 맞으면서도 '이 배를 놓치면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필사적으로 배에 달려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목사들과 장로들이 서로 자기만 살겠다고 그런 추악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지옥이라는 것이 별 게 아니었다. 천당에 가겠다고 평생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어온 그 사람들이 서로 먼저 배를 타기 위해 보여준 그 광경이 바로 지옥이었다"

이렇게 나만 살겠다고 이웃을 버리고 도망친 인물들이 인민군이 물러가자 피난 못 간 시민들을 대상으로 '부역자 처단'에 나서게 된다.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도 의주로 피난을 갔다.

그렇다고 이승만처럼 야반에 도주한 것이 아니고 신하들과 격론을 벌인 끝에 공개적으로 떠난 것이다.

신하들도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고 그들을 안내하고, 식량을 조달하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선조의 아들들은 전국에 흩어져 병사를 모으느라 고생을 했다.

지방의 유력한 선비들은 가산을 털어 의병을 모아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한국전쟁 같이 추한 행태를 보인 지도자들은 많지 않았다.

신생 대한민국은 왜 이같은 의로운 기상이 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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