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이순신과 구루시마의 칼싸움 진짜 있었나

"이순신 백병전 준비 지시한 기록 없어"'거북선 태운뒤 도망' 설정된 배설, 실제론 병 핑계로 자취 감춰

영화 '명량'에서 왜장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조선군의 대장선에 올라탄 다음, 머뭇거릴 새도 없이 이순신에게로 돌진한다.

드디어 맞닥뜨린 두 장수의 칼싸움은 곧 결론이 난다. 짧지만 강렬한 이 장면은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게 이순신 연구 전문가인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의 설명이다.

'명량'이 기록적인 흥행 돌풍을 일으키는 가운데 1597년 음력 9월 16일 벌어진 명량해전의 역사적 사실, 즉 당시 실제 상황과 영화 속 설정이 얼마나 다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 "백병전 지시 기록 없어"…구루시마와 '난중일기'속 마다시는 다른 인물?

노 소장은 영화 속 이순신의 대장선에서 벌어지는 조선군과 왜군의 백병전에 대해 "'백병전'이라는 말은 문헌에 정확히 나오지 않는다"고 밝혔다.

다만 왜인들이 거제 현령 안위가 이끄는 배에 '의부'(蟻附), 즉 개미처럼 달라붙어 올라갔고 안위의 군사들이 죽을 힘을 다해 몽둥이나 창, 돌덩어리로 이들을 난격했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나온다.

또 "백병전을 준비하라"는 영화 속 이순신의 비장한 대사와는 달리 이순신은 백병전을 피하려 했다는 쪽이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명량해전 두달 전에 있었던 칠천량해전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노 소장은 "해전사 연구자료들을 보면 칠천량해전 때 백병전 식으로 해서 우리가 패전했기 때문에 이순신은 백병전을 피하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면서 "이순신이 백병전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기록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니 구루시마가 백병전 와중에 이순신의 대장선에 올라타고 칼싸움을 벌이는 장면은 당연히 사실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양쪽의 우두머리가 직접 맞서는 장면을 통해 긴장을 끌어올리기 위한 영화 속 설정인 셈이다.

구루시마의 죽음을 시사하는 부분은 '난중일기'에 나온다. 조선으로 넘어온 왜인인 준사가 한 시체를 가리키며 "안골진 적장 마다시"라고 말했고, 이순신이 시체를 토막 내게 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적장인 구루시마와 마다시가 동일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최근 논란이 일고 있다고 노 소장은 전했다.

노 소장은 "일본 기록을 보면 명량해전 때 구루시마가 죽어서 일본 기세가 꺾였다는 기록이 있어서 예전에는 마다시와 구루시마가 같은 인물이라고 봤다"면서 "그런데 요즘은 양쪽의 후손들이 다르고, 둘은 각각의 인물이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좀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 이순신이 벽파진 병영을 불태웠다?

명량해전 당시 조선군에게 거북선이 없었다는 점은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또 영화는 '330척에 맞선 12척의 배'라는 홍보 카피를 내세웠지만 조선군의 배는 13척, 왜군의 배는 133척 수준으로 보는 게 학계 정설이다.

이순신이 임금 선조에게 장계를 올릴 때 고한 것처럼 12척의 배가 있었으나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인 김억추가 망가진 한 척을 수리한 덕분에 13척이 됐다는 게 노 소장의 설명이다.

영화에서는 이순신이 탈영병을 단칼에 베고, 전투가 불가하다고 외치는 장수들에 맞서 벽파진의 병영을 불태운다.

배수진을 치겠다는 이순신의 각오를 보여주는 대목이지만 기록에 없는 장면이라는 지적이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순신을 암살하려 시도하고 거북선을 불태운 다음 혼자 도망치다 안위 화살에 맞았다는 내용도 기록과 다르다. 역사 속 배설은 병 치료를 핑계로 도망친 다음 자취를 감췄다가 1599년 붙잡혀 서울에서 참형을 당했다.

그밖에 영화에서 목숨을 걸고 왜측 정보를 조선 수군에 전달하다 비극을 맞는 탐망꾼 임준영도 난중일기에서는 명량해전 이후에도 계속 등장하는 등 영화 재미를 살리기 위한 허구적인 요소들이 곳곳에 나온다.

노 소장은 "'명량'에는 학계에서 앞으로 논란이 될 만한 요소들이 있다"면서도 "그러나 너무 사실대로만 만들면 영화의 재미가 안 살지 않겠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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