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12월 28일 오후 2시, 서울 황금정(지금의 을지로) 입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앞.
중국인 차림의 나석주는 신문지를 싼 폭탄을 옆구리에 끼고 건물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정문을 휘몰아치고 지나갔다.
건물의 구석구석을 살피던 나석주는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일본인 마쓰모도 수위가 까다롭게 물어보고 진입을 막았다.
나석주는 발길을 돌려 남대문통 큰 길로 나와 식산은행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연말을 앞두고 창구는 일본인 고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폭탄을 싼 신문지를 벗기고 안전장치를 뽑아 집어 던진 후 서둘러 빠져 나왔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불발이었다.
폭탄을 발견한 직원이 경찰서에 신고하자 경찰의 호각소리가 정적을 흔들었다.
"길은 하나밖에 없다~ 2천만 조선인의 원부 동양척식, 너를 이 폭탄으로 상대해주마"
현관을 통과하려 하자 일본인 기자와 얘기를 나누던 마쓰모도 수위가 쫒아와 욕설을 하며 가로 막았다.
"탕~탕~"
나석주는 수위와 일본인 기자에게 권총을 발사했다.
이어 2층으로 뛰어 올라가 토지개량부와 기술과 직원들에게 총을 난사한 뒤 하나 남은 폭탄을 힘껏 던졌다.
끝내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호각소리와 사이렌 소리가 들리며 경찰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나석주는 1층으로 내려와 후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단숨에 전차길을 건넜다.
다바타 경부보라는 일본인 경찰이 "거기 서라~ 쏜다"고 외쳤다.
나석주가 몸을 돌려 방아쇠를 당기자 다바타는 전차길 한 가운데에 대자로 나가 떨어졌다.
나석주는 다시 뛰었다.
경찰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기 때문이다.
나석주는 마지막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몰려든 군중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 2천만 민중아~ 나는 그대들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희생한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아라"
"탕~탕~탕"
나석주는 자기 가슴에 총을 3발 쏘고 풀썩 쓰러졌다.
급히 총독부병원에 이송된 나석주에게 종로경찰서 미와 경부가 "너 조선놈이지? 이름이 뭔가?"하고 물었다.
나석주는 "이런 왜놈... 이름은 나-석-주, 황해도 재령군 북율면 진초리다"
미와가 간청하듯 물었다.
"공범의 이름을 대라"
나석주는 둘러싼 일본 경찰들을 쏘아 보다 숨을 거두었다.
그때 나이가 35세였다.
나석주의 의거로 다바타 경기도 경찰부 경부보와 동양척식주식회사 토지개량부 오모리 차석 등 3명이 사살되고 4명이 중상을 입었다.
백주대낮에 경성 도심에서 벌어진 총격전은 일본 경찰을 충격에 빠뜨렸다.
동아일보는 1월 13일 호외를 발간했다가 경찰이 발표하지 않은 내용이 들어있다고 삭제당하자 다시 '호외의 호외'를 발행했다.
일본 경찰은 나석주가 투척한 폭탄이 소련제 강력폭탄이고, 66발의 총알과 권총이 스페인제로 밝혀지자 깜짝 놀랐다.
혈안이 된 일제는 국내외 수사망을 총동원해 정보를 수집한 결과, 나석주의 뒤에 중국에 망명한 심산 김창숙과 의열단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 나석주 "저는 이미 죽기로 결심한 바 오래되었습니다"
나석주가 폭탄을 던지기 6개월 전의 상해.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을 모아온 김창숙은 결사대원을 찾고 있었다.
그는 임시정부의 김구와 이시영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조선의 인심이 이미 죽었으니 비상수단을 써서 진작시키지 않으면 해외에 있는 사람들도 장차 돌아갈 곳이 없어 궁박해질 것입니다. 청년 결사대에게 자금을 주어 무기를 갖고 들어가 왜정 기관을 파괴하고 친일 부호를 박멸하여 국민의 의기를 고취시켜야 합니다"
김창숙은 김구와 유자명으로부터 의열단원 나석주를 소개받아 폭탄과 권총, 자금을 건넸다.
나석주는 "이미 죽기로 결심한 바 오래되었습니다" 라며 국내로 향했다.
홀로 떠나는 그에게 김창숙은 "백범 김구도 그대의 장도를 학수고대하고 있소. 민족의 고혈을 빨고 있는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가 그대의 손에 폭파되는 날 일제의 간담이 서늘해질 것이며, 잠자고 있는 조선의 민족혼이 불길처럼 다시 타오를 것이오. 대의를 향한 무운을 비는 바이오"라고 격려했다.
김창숙은 그를 배웅한 뒤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장하고 열렬하도다. 단신에 총 한 자루를 갖고 많은 적을 쏘아 죽인 다음 자신은 태연히 죽음으로 돌아가는 듯이 생각하고 있으니, 3.1운동 이래 결사대로 순국한 이가 퍽 많았지만 나군처럼 한 사람은 없었다"
나석주는 중국 선박 이통호를 타고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하면서 중국인 노동자 마충대로 위장해 인천을 거쳐 경성에 잠입한 것이다.
나석주 의사는 황해도 재령 출신으로 23살 때 만주로 건너가 4년간 신훙무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뒤 귀국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군자금을 거두어 상해임시정부에 보냈다.
이어 동지들을 모아 황해도 평산군 상월면 주재소를 습격해 일본 경찰과 면장을 죽이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상해에서 은사인 백범 김구를 찾아가 그 밑에서 경호원으로 일하다 중국 한단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한동안 중국군 장교로 근무했다.
그는 의열단에 가입해 국내 잠입을 노리다 이번 의거에 나선 것이다.
◈ 김창숙 체포에 혈안이 된 일제, 유림들 대거 체포하다
김창숙이 유림들을 상대로 군자금을 거둬간 사실을 알아내고 관련 인사 600여 명을 무차별 구속했다.
이른바 '제2차 유림단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상해에서 은신하던 김창숙도 영국 조계에 있는 병원에서 밀정의 모략에 빠져 일본 총영사관 형사 6명에게 체포되었다.
이때가 1927년 6월 27일이다.
세월이 흘러 일제가 패망하고 나라를 되찾자,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3월 1일 나석주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나석주 의사가 순국한 후 장남 응섭은 부친의 시신을 찾으러 갔다가 오히려 8일간 구금돼 고문을 받았다.
일제에 의해 미아리 공동묘지에 강제 매장된 나 의사의 유해는 아들에 의해 수습돼 고향인 황해도 재령 땅에 묻혔다.
분단 후에는 소식을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현재 동작동 국립묘지에는 묘소 대신 무후선열제단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서울시내에 나갈 일이 있으면 2호선 을지로입구역 5번 출구로 나가 계속 가다보면 외환은행 본점이 나온다.
이 건물 왼쪽 화단에서 나석주 의사 동상과 의거 터 표석을 찾을 수 있다.
표석에는 "1926년 12월 나석주 의사가 일제 동양척식회사에 투탄하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 중 자결한 곳"이라고 써있다.
어떤 일로 이 곳을 지나더라도 12월의 찬 바람이 불던 날 권총을 들고 일본 경찰과 시가전을 벌이다 장렬하게 순국한 한 젊은이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