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3월 5일 중국 상해.
항일테러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유자명 의장은 급하게 동지들을 모았다.
모두 10명이 모이자 유자명이 중대한 정보를 알렸다.
"무장로에 있는 고급 요정 육삼정에서 일본 정계. 군부의 거물들과 중국 국민당 고관들이 회합을 갖는다는 정보를 입수했소. 이 자리에는 일본 군부의 실세인 육군 대장 아라키 사다오와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도 참석합니다. 마침 백범 김구 선생이 준 폭탄도 있으니 이들을 폭살합시다"
다들 흥분해서 서로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다.
할 수 없이 제비뽑기로 백정기, 이강훈이 결행하기로 하고, 원심창이 망을 보고 거사가 끝나면 승용차를 대기로 했다.
"백 의사와 나는 상해 교외 공터로 가서 도시락 폭탄과 똑같은 무게의 물체를 가지고 투척 연습을 해보았다. 그 결과 내가 큰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고, 추격해오는 적에게는 백 의사가 수류탄과 권총을 발사하기로 결정했다. 잡히는 경우에 대비해 취조를 받을 때에 할 말도 미리 준비했다"
그러나 거사는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일제가 내부 밀정으로부터 자세한 거사계획을 입수한 것이다.
백정기와 이강훈, 원심창은 육삼정에서 200m 떨어진 송강춘이란 음식점에서 체포됐다.
잠복하고 있던 형사대와 일경은 음식점 앞문과 뒷문으로 쏟아져 들어가 순식간에 이들을 결박했다.
압수한 폭탄에 대해서는 "윤봉길이 휴대했던 도시락형 폭탄과 완전한 동일형"이라고 보고했다.
언젠가는 거사계획을 일본 경찰에 넘겨준 밀정의 정체가 드러날 것이다.
◈ '홍구공원 의거'…백정기와 윤봉길의 엇갈린 운명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리는 일본의 상해 점령 축하식 겸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기념식 때 남화연맹이 거사를 하는지를 탐문하기 위해서였다.
정화암은 거사계획이 없다고 잡아떼고, 오히려 역심문을 통해 임시정부의 윤봉길이 당일 11시에 폭탄을 던진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미 정화암은 일본인 종군기자를 통해 기념식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듣고 실행을 자청한 백정기를 거사 주동자로 지명한 후였다.
백정기는 상해를 점령했다고 자만에 빠진 일본군 고위장성들을 저승길 동무로 삼기로 결심했다.
임시정부는 외국사절이 다 퇴장하고 일본 고관들만 남아 있는 11시를 거사 시간으로 잡았지만 남화연맹은 그보다 1시간 앞선 10시로 정했다.
외국사절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라를 빼앗긴 민족으로서는 당연한 저항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일본인 거류민이라도 일본 영사관에서 발행하는 출입증이 있어야만 행사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당시 상황을 정화암은 이렇게 회고했다.
"4월 29일! 아침부터 비가 많이 내렸다. 백정기는 완전한 준비를 마치고 출입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출입증을 구해주겠다던 중국인 아나키스트 왕아초와 화균실으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시간은 자꾸만 가는데 출입증은 오지 않으니 점점 초조해졌다. 예정된 시간이 지나버렸다. 일본인 종군기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당신들의 계획은 대성공을 했소. 지금 홍구공원이 아수라장이 되었소'. 임시정부에서 통쾌한 거사를 한 것이다. 그 종군기자는 우리가 그 일을 해낸 것으로 알고 취재하려고 뛰어온 것이다"
정화암과 백정기는 맥이 쭉 빠졌다.
백정기는 다 받아놓은 밥상을 놓쳤다는 듯이 분개했고, 정화암은 그래도 우리 민족이 거행했으니 마찬가지 아니냐며 위로했다.
백범 김구는 어떻게 해서 성공했을까?
정화암은 이렇게 분석했다.
"백범은 단순한 분입니다. 그래서 '윤봉길이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과 물통으로 위장한 폭탄을 들고 왜놈 옷에, 왜놈 게다를 신은 채, 왜놈으로 행세해 통과시키면 들어가서 거사하고 통과시키지 않으면 거기서 분풀이하면 되지 않겠는가? 어떤 쪽이든 큰일을 터뜨리면 되는 것 아닌가? 더 따질 일이 무엇이 있나? 그래서 성공한 것입니다"
상해에 검거선풍이 불었다.
그때 백범 김구가 통신사를 통해 성명을 발표했다.
"나 백범 김구는 조선 황해도 안악 땅에서 맨손으로 왜군 쓰지다 대위를 때려 죽여 민 황후의 원수를 갚았으며, 나 김구가 애국단원 이봉창과 윤봉길을 시켜 일왕 저격사건과 상해 홍구사건을 일으킨 것일뿐 다른 조선 기관이나 조선인이 관련된 사실이 없다"
◈ 법정에 선 백정기 "모든 것을 내가 주도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백정기, 이강훈, 원심창은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되었다.
검찰은 백정기, 원심창에게는 무기징역을, 이강훈에게는 15년형을 구형했다.
최종공판에서 재판장은 검사의 구형대로 언도했다.
백정기는 재판 과정에서 모든 것을 자기가 주도했다고 주장했다.
폐병 중증인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내다보고, 죄를 자신이 뒤집어쓰면 건강한 동지들은 가병운 형을 받고 출옥해 독립운동을 계속하라는 뜻이었다.
상고를 포기한 백정기는 복역 중 3년도 안된 1936년 5월 22일 만 40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서거하기 전 백정기 의사는 동지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나는 몇 달을 더 못살겠다. 그러나 동지들은 서러워말라.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다. 형들은 자중자애하여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겨례의 영예를 위해서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를 바란다. 평생 죄송스러운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다. 조국의 자주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를 바란다"
이강훈은 12년 반을 복역한 후 일제가 패망하자 귀국해 광복회 회장을 역임했다.
원심창은 해방 후 일본에서 박열 의사 등과 함께 거류민단을 조직해 동포들을 보호하고 통일운동을 벌였다.
우선 유해발굴단을 꾸려 일본에 파견해 갓 출감한 박열 의사와 이강훈 의사 등과 함께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의사의 유해를 수소문했다.
발굴단은 각기 다른 세 곳의 공동묘지에서 의사 3명의 유해를 발굴해 국내로 봉환했다.
유해가 부산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은 백범은 서둘러 부산에 내려가 추도식을 거행했다.
그리고는 묘단에 '유방백세(流芳百世)'(향기로운 이름이여~ 영원하라)라는 네 글자를 손수 써서 헌사했다.
유해를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가묘는 '3의사 묘역' 내 제일 윗자리인 왼쪽 끝에 자리잡았다.
"불구대천의 원수 놈들인 너희들에게 무엇을 호소하겠느냐? 너희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것이다. 재판하느라 수고했다. 할 말이 많으나 야수 같은 그대들에게 무슨 말을 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