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오전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세월호 침몰은 여전히 우리사회를 옥죄고 있지만 달라진 것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우리의 안전 불감증을 깨워 사회 곳곳에서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안전의식이 조금 나아지고 있다.
그런 미미한 변화뿐. 국가 개조와 혁신, 송두리째 바꿔버리자는 우렁찬 목소리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잦아들거나 흐릿해지고 있다.
희생자 10명이나 차가운 바닷물 속에 내버려둔 채 일상을 그럭저럭 유지하고 있다.
모두가 울고 부끄럽고 죄인이 된 심정에서 조금씩 회복하고 있더라도 큰 기쁨도, 화평도 없는 백일이었다.
해경이 침몰 사고 초기에 초동 구조작업을 잘못한데 대해, 안행부는 구조자와 생존자 숫자조차 오락가락하는 등 허둥대는 모습에 대해 국민은 분노했고,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정부라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메아리뿐이었다.
눈물을 주룩주룩 흘린 대통령의 사과도 진정성을 의심받았다.
초동 구조 실패에다 책임지는 고위공직자들도 거의 없었다. 강병규 전 안행부 장관이 유일하다.
총리와 장관 후보들의 인사 파동이 대통령의 진성성을 의심하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다.
대통령은 5월 19일 국가개조를 천명했으나 인사파동과 불통 이미지에 세월호 참사 당일 국정의 컨트롤타워를 작동시키지 못했다는 비판이 일면서 정부조직 개편은 시동도 걸지 못했고, 해경 해체를 포함한 관피아 척결 법안도 여.야의 입장 차이로 진척되지 않고 있다.
정치권은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너도나도 나섰는데도 여전히 세월호 특별법을 놓고 줄다리기를 계속하고 있다.
“조사권을 부여하면 사법체계를 흔든다”는 여당의 주장은 검찰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설득력이 떨어지는데도 오불관언이다.
청와대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는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우리 자녀들이 왜 죽었는지, 무엇 때문에 죽어야 했는지를 밝혀달라”는 유가족들의 피 끓는 애원에도 이제는 무관심을 넘어 일부에서는 냉소주의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세월호 참사는 여느 재난의 이름으로만 기억되지 말란 법이 없다.
단식은 그들이 갖고 있는 특별법 제정을 위한 유일한 항의 수단이자 정당한 요구방식인지 모른다. 오죽했으면 병원에 실려가면서까지 단식을 멈추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겠는가.
희생자 유가족들이 백일을 맞은 24일 이후 어떤 행동에 나설지 자못 근심어린 시선으로, 불미스런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한다.
희생자들의 뜻을 기리는 추모문화제가 이날 저녁 7시 서울지역합동분향소가 마련된 서울광장에서 열린다.
이 추모제는 야당 의원들만 참석할 뿐 여당 의원들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백일을 맞아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자는 문화제, 추모 행사가 약간 정치색을 띠었다는 이유로 새누리당은 불참하는 것이다.
이에 앞서 어제 진도를 찾은 피해 가족들과 시민들은 어젯밤 100일의 기다림 전야제를 치렀다.
피눈물의 현장 진도 팽목항(진도항)에서는 24일도, 모든 희생자가 시신으로라도 우리 곁으로 돌아올 때까지 눈물이 마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 이후에도 팽목항을 찾는 유가족들과 시민들은 눈물을 쏟을지도 모른다.
“잊지 말아 달라”, “사람이 먼저다”는 생존 학생들의 절규도, “자녀들이 배고플까봐 매일 아침 밥상을 차려놓는다”는 희생자 학부모들의 간절한 기도와 소망에 대해 그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는 우리들, 세월호 참사 백일의 모습이다.
백일까지는 한 일이, 달라진 것이 없었더라도 101일이 되는 내일(25일)부터는 세월호 참사 1년, 5년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를 준비하고 구체적으로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라는 숙제를 던져본다.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는 반드시 달라져야 하고,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대한민국은 세월호와 함께 시나브로 침몰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1945년 광복 이전과 이후가 달랐듯이, 6.25 한국전쟁 이전과 이후가 달랐듯이, 1998년 IMF 이전과 이후가 달랐듯이 세월호 참사 역시, 이전과 이후가 달라져야 한다.
그게, 피기도 전에 하늘나라로 간 우리의 젊은 꽃들이 바라는 소망 아닐까?
곱씹게 하는, 되새김질해야 하는 세월호 참사 백일인 2014년 7월 24일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