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 부대는 무장을 해제하고 개인자격으로 입국하라"

[임기상의 역사산책 64]끝내 무산된 광복군의 '국내 진공작전'

중국 서남부의 깊숙한 내륙에 있는 중경시에 복원된 중경 임시정부 청사 (사진=서울특별시 제공)
◈ 일본군에서 탈출한 조선 청년들, 임시정부의 품에 안기다

일본의 패망이 얼마 안 남은 1945년 1월 31일, 중경시 연화지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젊은이들의 합창소리가 들렸다.

광복군 진경성 교관이 인솔한 조선 청년 47명이 드디어 임시정부 청사에 도착한 것이다.

이들은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 강제징집된 뒤 중국에 주둔한 일본군 병영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한 지식청년들이었다.

청년들은 국부군이나 팔로군의 도움을 받아 안휘성 광복군 제3지대에 도착해 3개월간의 훈련을 받고 머나먼 길을 걸어 중경에 온 것이다.

6일 후 임시정부의 회의실과 식당으로 쓰는 1층 사무실에서 이들 청년들을 위한 환영회가 열렸다.

신익희 내무부장에 이어 김구 주석의 환영사가 끝나자 애국청년을 대표하여 장준하가 답사를 했다.

1945년 8월 산동성 유현에서 OSS훈련을 받을 당시의 광복군 3사람. (왼쪽부터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
"오늘 오후 임시정부 건물 위에서 펄럭이는 태극기를 우러러보면서 흥분되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고,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를 위해 6천리 길의 장정에 오른 것입니다. 진정한 조국의 '상징'과 지휘관, 저희들이 헌신할 수 있는 곳을 마침내 찾았습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여러 선배님들의 노고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어느 곳이라도 절대 따지지 않고 지시에 따라 이행할 것입니다. 왜적이 황당무계하게 한국인이 모두 일본인이 되기를 바란다고 거짓 선전하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우리 40명이 넘는 청년들은 광명정대한 조선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김구 주석과 이 자리에 모인 교민들 300여 명은 답사를 들으며 계속 흐느껴 울었다.

모두들 참지 못하고 목놓아 울었다.

환영회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광복군에 편입한 청년들은 비밀리에 한반도에 침투할 작전 준비에 들어갔다.

이를 위해 3월 15일 광복군 사령부와 주중국 미군은 한미군사협정을 체결했다.

김구 주석이 1940년 9월 17일 중경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창설기념식 직후 열린 오찬장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OSS(미국 전략사무국)는 광복군 2지대와 3지대에 소속된 광복군을 대상으로 비밀훈련에 들어갔다.

광복군은 3개월간 비행, 잠수, 무선 전신기술 등 각종 정탐과 파괴공작을 배운 후 한반도로 침투해 미군의 상륙작전을 돕기로 했다.

◈ 일본군을 탈출해 중경으로 가는 도중에 목격한 중일전쟁의 속살

장준하 일행이 중경임시정부에 도착하기 5개월 22일 전.

일본군 부대를 탈출한 장준하 등 4명은 구식 모젤 권총을 든 중국인들에게 포위되었다.

장준하는 땅바닥에 한문으로 "우리는 조선 청년, 그저께 밤 일본군 병영을 탈출해 중국군 진영을 찾아가는 길이다"

대장인 듯한 사내가 이 글을 보더니 "우리는 중국 중앙군 소속의 유격대이고, 우리의 영수는 장개석 총통이다"라고 썼다.

장준하 일행은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기분이었다.

조그마한 마을에 있는 사령부를 찾아가니 중국 군복을 입은 홍안의 청년이 나타났다.

그리고 우리 말로 "조선분들이시죠?"라고 물었다.

바로 5개월 전에 일본군 부대를 탈출한 조선 학도병 탈출 제1호인 김준엽(전 고려대 총장)이었다.

김준엽은 네 사람을 차례로 껴안으면서 기쁨을 나눴다.

다음날 새벽 한치륭 사령관이 일본군 수비대장과 담판이 있는데 김준엽을 통역으로 데려갔다.

일본군 수비대장은 중국군이 데리고 있는 조선인들과 일본군의 포로가 된 중국군 30여 명과 맞교환하자고 제의했다.

일본군이 조선인 탈출 병사와 중국포로를 교환하자고 제시한 편지. (사진=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다행히 한치륭 사령관은 자기 부대에는 일본군 병영에서 탈출한 군인들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중국군 부대에 11일째 머물러 있던 7월 20일 새벽 3시.

갑자기 나무 아래 마련한 잠자리 옆에서 수류탄이 폭발했다.

수류탄은 가까이 오면서 계속 터졌고, 밤하늘에는 섬광이 작열했다.

알고 보니 일본군의 습격이 아니라 팔로군이 공격한 것이다.

일본군과 싸우는 와중에 중국 대륙 곳곳에서 이런 식으로 국공내전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다음 날 살아남은 사령부 요원들을 따라 후퇴를 하다 기이한 장면을 목격한다.

유명한 고왕탄광을 지나가는데 일본군 경비병들이 총을 쏘지 않고 멍청하게 바라만 보는 것이다.

알고 보니 중국인들끼리 총질을 할 때는 개입하지 않고 구경만 하다가, 틈만 나면 서로 싸우도록 부추긴다고 한다.

이들과 헤어지고 중경으로 가는 길에 또다시 장개석 군대의 유격대 사령관실에 들어갔다.

사령관이라고 하는 사람은 처음 만나는 장준하 일행을 런닝셔츠와 팬티바람으로 맞앗다.

더 가관인 것은 꼭 손녀같이 보이는 16~17살 계집아이를 무릎에 올려놓고...

나중에 얘기 들으니 그 소녀는 사령관의 다섯번째 첩이란 것이다.

이 사령부를 나와 중경이 가까와질 무렵에 후방으로 이동하는 장개석 군대 1개 사단의 병력과 합류했다.

장준하 일행은 그들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놀랐다.

군대라기보다는 마치 퇴각하는 패잔병 부대 같았다.

장개석 휘하의 국부군 기마사단. 대부분 무장도 형편없었고, 부패한 군대였다.
또 놀란 것은 가마행렬이었다.

이동행렬 속에는 50여 대의 가마가 있었고, 남루한 군복의 중국 군인이 메고 가는 가마에는 사단장의 가족이 타고 있었다.

장준하는 5억 명이 넘는 중국이 수십만 명의 일본군에게 쫒기게 된 현실은 이같은 중국군 지도부의 부패와 타락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광복군, 국내 진입에 끝내 실패하다

장준하와 김준엽 일행은 미 군용기를 타고 서안비행장에 도착해 광복군 제2지대가 있는 두곡의 병영에 도착했다.

OSS의 미군 소령 사전트를 책임자로 영관. 하사관 20여 명이 1차로 선발된 광복군 50명의 훈련을 맡았다.

여기서 3달간 도강술, 게릴라전법, 낙하연습, 특수은폐와 엄폐법 등 강도높은 훈련을 받았다.

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이 만든 광복군 영문약자 KIA
대원들이 무사히 훈련과정을 끝내자 8월 7일 김구 주석과 이청천 광복군 총사령관이 두곡을 찾아 대원들을 격려했다.

김구 주석 등은 미군과 협의해 잠수함이나 낙하산으로 한반도에 침투해 정보 송신과 유격대 조직 구성, 일본군 시설 파괴 등을 수행하기로 했다.

이틀 후 50명의 광복군에게 특별 대기령이 떨어졌다.

다음날 오후에 한 통의 전보가 OSS중국지부에 도착했다.

대원들의 출발을 중지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해 무조건 항복을 한다는 내용이다.

이 승전보는 김구 주석에게는 희소식이 아니라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아무 일도 하지 못했으니 장차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을까?"

환호하는 미군들 틈에서 깊은 실망감에 빠져있는 광복군들의 모습이 보였다.

임시정부는 다시 미군과 상의해 서안을 출발해 서울로 가는 중국전구 미군사령부 사절단에 광복군 4명(이범석 장군과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이 동승하기로 했다.

이들 사절단은 미군 본대가 상륙하기 전에 연합군 포로를 인수하고, 미군 진주를 위한 기초조사를 하고, 국민자위군을 조직한다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22명이 탄 C-46 수송기는 8월 18일 새벽에 서안비행장을 이륙해 오후 3시에 여의도공항에 착륙했다.

사절단이 비행기에서 내려보니 격납고 앞에 일본군 1개 중대병력이 일본도를 뽑아들고 정렬해 있고, 격납고 뒤에는 무장한 일본군과 기관포가 서있었다.

고즈키 요시오 조선군 사령관 일행이 걸어왔다.

"이곳엔 왜 왔소?"

버드 중령은 한글과 일본어로 된 삐라를 말없이 건넸다.

고즈키는 아직 도쿄에서 지침을 못받았다며, "일본은 현재 정전상태일 뿐이오. 당신들은 돌아가 기다렸다가 휴전조약이 체결된 뒤에 다시 오시오"

실랑이 끝에 결국 서안으로 돌아갈 때 필요한 휘발유가 평양에서 도착하는대로 떠나기로 했다.

미군 수송기는 여의도비행장을 출발해 산동성 유현 비행장을 거쳐 다시 서안으로 돌아왔다.

1945년 8월 19일 산동성 유현 비행장에 불시착하여 중국군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왼쪽에서부터 네 번째가 장준하, 그 오른쪽으로 노능서, 김준엽.
이렇게 해서 미군이 상륙하기 전에 국내에 기반을 마련하려고 했던 중경임시정부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라"…중국서 항일운동 벌였던 독립운동가들의 쓸쓸한 귀국

일본이 패망했는데도 한반도에 상륙한 미군은 중경임시정부에 대해 나 몰라라 하며 냉대했다.

장개석 정부를 통해 여러 차례 사정한 끝에 11월 23일 미군 수송기편으로 귀국하는 일정이 확정됐다.

미국에 있는 이승만은 그에 앞서 10월 16일 맥아더 장군이 주선한 비행기를 타고 도쿄를 경유해 임시정부보다 1개월 17일 먼저 귀국했다.

맥아더는 미육군 남조선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하지 중장을 도쿄로 불러 이승만과 함께 3인 회담을 가졌으니 그 의도를 짐작할 만하다.

귀국 일정이 확정되자 김구 주석은 그동안 도움을 준 중국의 각계 인사들에게 출발 인사를 다녔다.

11월 2일에는 모택동 정부의 특사로 중경에 체류 중인 주은래가 임시정부 국무위원 전원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었다.

중경에 파견나온 미래의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국무총리 주은래.
주은래가 머물고 있는 홍암취에 도착하니 산자락에는 온통 농장밖에 보이지 않았다.

식탁에는 대부분 소박한 음식들이 올려져 있었지만, 회과육과 삶은 족발, 영계백숙, 생선조림도 있었다.

주은래가 웃으며 말했다.


"백범 선생~ 여기 있는 채소와 생선, 고기는 전부 우리가 농장에서 직접 재배하고 키운 것입니다"
"그렇게 업무가 바쁘신데도 농사도 짓고 가축도 기르시나요?"
"우리 공산당원들은 전부 일반 백성들과 다름없는 보통 사람들입니다. 어렸을 때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지요"

김구 주석은 홍암취를 떠나면서 상념에 잠겼다.

이곳의 소박한 생활이 도시 지역에 자리잡은 장개석의 당, 정, 군의 호화스런 생활과 비교가 되었다.

중경을 떠나 상해에 도착힌 임시정부 요인들은 홍구공원에서 6~7,000명에 달하는 교포들의 환영을 받았다.

김구 주석이 단상에 오르자 교포들이 만세를 부르고 또 불렀다.

그치지 않던 만세소리는 감격으로 연결되면서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김구 주석의 연설도 목이 메이는 바람에 몇 번이고 끊어졌다.

1945년 11월 3일, 환국 20일 전 중경청사 앞에서 기념 촬영하는 임시정부 일행.
그동안 겪었던 갖가지 고생과 모진 괴로움이 이날의 감격 속에서 울음으로 터진 것이다.

김구 주석 등 환국 1진 15명은 11월 23일 상해비행장에서 미군 수송기 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수송기는 저녁 무렵 여의도공항에 도착했다.

미군정이 의도적으로 귀국사실을 숨겨 환영객이 한 명도 없었다.

늦가을의 찬바람을 맞으며 독립투사들은 미군 장갑차에 분승해 서울 중심가로 출발했다.

장준하는 장갑차를 보고 놀라는 시민들에게 태극기를 흔들었으나 미군 병사에게 제지당했다.

연안에서 팔로군과 함께 항일투쟁을 벌이던 조선의용군과 조선독립동맹의 처지도 마찬가지였다.

일본군 점령 지역에 침투해 폐허가 된 사찰의 담장에 항일 표어를 쓰는 조선의용군 화북 지대 선전대원.
이들은 10월 중순에 심양에 도착해 소련군을 상대로 북한에 들어가는 방안을 교섭했으나 개별적인 민간인 신분으로 귀국하는 것만 허락했다.

무정과 김백연 등 주요 인물들은 하는 수 없이 개인 명의로 11월 초에 북한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소련군의 일원이었던 김일성과 항일유격대 일행은 추석 전날인 1945년 9월 19일 소련 군함을 타고 원산항으로 들어왔다. .

여기에는 김일성을 비롯해, 안길, 김책, 최현, 박성철, 김일, 오진우 등 북한 정권의 주역이 될 인물들이 대거 타고 있었으며, 50여명의 유격대원들도 함께 왔다.

이들은 소련군정의 비호 아래 북한 전역을 빠르게 장악한다.

이후 남과 북에서는 중국대륙에서 평생을 바쳐 항일투쟁을 벌인 인사들은 철저히 배제되고, 미국과 소련에서 데려온 일파가 집권해 분단과 민족상잔으로 치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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