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가락 연금정책, 금융소비자들만 피해



400만 원의 연금저축을 들며 그동안 연 66만원의 세금 절감 혜택을 누렸던 직장인 김모(31)씨는 최근 늘어난 세금 부담이 불만이다.

지난 2011년 정부가 소득공제 한도를 늘린다고 해서 300만 원에서 400만 원으로 늘렸는데, 갑자기 지난해 연금저축에 대해 소득공제 대신 세액공제 12%가 적용돼 13만 원 이상의 세금을 물게 된 것이다.

최근 정부가 연금저축 활성화 방안의 일환으로 세액공제 한도를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에 김 씨는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로 바꾸면서 혜택을 줄일 때는 언제고 달래기식으로 세액공제 혜택을 늘리냐"며 "연금저축 액수를 늘릴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정부의 설익은 연금정책으로 애꿎은 국민들만 피해를 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일관성 없이 연금정책을 끌고 나가면서 금융소비자들의 불신을 키웠고, 정교하게 설계되지 않은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도입 취지보다는 부작용을 키웠다는 지적이지만 주무 부처는 정책 개선을 위한 장기 계획도 세우지 않고 손 놓고 있다.

◈부작용 전망 무시하고 정책변경→연금신규가입·연금유지율↓…정책 재변경 시사에도 시장반응 '글쎄'

앞서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8월 올해부터 연금저축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변경한다고 밝혔고, 이로 인한 사적연금 시장 위축이 우려된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세재개편안을 강행했다.


2012년과 2013년 1분기(1월~3월)에 각각 26.1%, 15.2% 증가한 세제적격 개인연금보험의 수입보험료는 올해 1분기에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0.2% 줄었다.

같은 기간 동안 연금저축을 장기간 유지한 비율도 뚝 떨어졌다. 올해 1분기 연금저축의 10년간 계약 유지율은 은행과 증권, 생명보험, 손해보험 평균 52.23%로 지난해 같은 기간(55.2%)에 비해 3%p 떨어졌다.

연금저축을 계속 갖고 있어야 하는 매력이 떨어져서 보험을 해지하는 이들이 증가했다는 의미다.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으로 충분한 노후대비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지난해 세제개편으로 사적연금 시장마저 위축되고 있다는 지적에 따라 금융위원회는 최근 세액공제 한도를 높이는 등 연금저축에 대한 세금 혜택을 늘리는 것을 기재부 등과 협의하고 있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시장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세제정책이 개인연금보험에 큰 영향을 주는 상황에서 정부가 오락가락 정책을 펴며 시장의 불신을 키웠기 때문이다.

자료사진 (사진 = 이미지비트 제공)

익명을 요구한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세재개편을 통해 세제적격 연금보험에 대한 혜택이 많이 줄어든 상태에서 세액공제 액수를 늘린다고 해서 고객들이 해당 상품을 얼마나 매력적으로 생각할지 의문"며 "조삼모사 아니냐"고 반문했다.

정부의 이번 방향 선회가 연금저축 활성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유정미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책임연구원은 "2001년 소득공제금액이 240만원, 2005년 300만원, 2011년에 400만원으로 상향 조정됐는데 보험료 납입경향들을 보면 한도가 조정되면 납입액이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며 "연금저축은 제도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세액공제 상향조정이 연금저축 활성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연령·직종·소득별 세제정책 차별 필요"…기재부 "장기정책 추진 일정 없어"

그러나 전문가들은 여전히 정부의 현재 연금정책이 "정교하지 않다"며 "보완할 점이 많다"고 입을 모은다.

류건식 보험연구원 고령화연구실장은 "지금처럼 일률적인 세제정책으로는 개인연금 가입 활성화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연금정책이 연령, 직종, 소득에 따라 세제정책을 차별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류건식 실장은 "청장년층보다 노후 대비가 상대적으로 더욱 취약한 50대 이상 베이비부머(1955~1963년에 출생)들에 대해 추가 세제혜택을 주고, 저소득층에 대해서는 개인연금 납입금액만큼 정부가 납입해주는 매칭방식 등 보다 정교한 연금 정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미국의 경우 50대 이하 개인연금 가입자는 1만 6500달러까지 소득공제를 받을 수 있지만 50대 이상 연금가입자의 경우 2만2천 달러까지 세제혜택을 주는 정책(Catch-up Policy)을 시행해 상대적으로 노후 대비가 취약한 중장년층에 대한 노후대비를 독려하고 있다.

독일은 저소득층이 개인연금에 가입할 경우 일정수준 이하의 저소득층이 사적연금에 가입할 때 불입금 일부를 정책적으로 정부가 보조해주는 리스터 연금 제도를 2002년부터 시행하고 있고, 미국과 영국, 호주, 일본 등도 비슷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임영조 보험개발원 팀장은 "개인연금의 본래 취지가 훼손되지 않도록 제도 변화에 따른 시장 상황을 모니터링 해 후속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며 "전체적으로 낮은 가입률을 제고하기 위한 노력과 상대적으로 개인연금 가입이 저조한 저소득층에게 실질적인 가입유인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금융업계 일각에서는 "일정 조건을 충족하고 연금을 수령하는 금액에 대해서는 비과세 혜택을 주거나 계약 해지를 방지하기 위해 긴급 자금 목적 중도인출 허용 범위를 확대하는 식의 방안"도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현재는 가입자가 55세 이후 연금을 받을 때 연령대별로 3.3~5.5%의 세금을 부과하고 있다.

이와 함께 소규모 기업의 직원에게 연금 납입금의 20%를 정률로 정부가 지원하면서 가입을 유도하는 일종의 인 영국의 네스트 연금(National Employment Savings Trust·NEST) 도입도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지난해 국민연금 신규 수급자의 소득대체율이 18.1%에 불과하고 베이비붐 세대 712만명 중 27.6%만이 노후생활을 대비하고 있는 등 국민들의 노후대비 상황에 빨간불이 켜졌지만 연금정책을 추진해야 하는 기재부는 여유만 부리고 있다.

연금정책 업무를 수행하는 기재부 관계자는 "네스트 연금은 처음 들었고 연금가입률 제고 관련해서 여러 가지 아이디어 나오고 있지만 어떻게 정책을 추진해야 할지 결정된 것이 하나도 없다"며 "사적연금 제도개편 방향이 발표되는 것은 맞지만 '발표하겠다'는 원론적인 목표만 있을 뿐 정책추진 일정 중 확정된 것이 없다"고 말했다.

실시간 랭킹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