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앞서 중동고 재학 중이던 69년, 서울 12개 고교와의 '3선개헌 반대' 연합시위를 주도하는 등 '정치 리더'로서의 자질을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무대'(무성 대장)라는 별명이 생긴 김 대표는 부산 사나이다운 '보스 기질'을 30년 정치역정 내내 보여줬다고 평가된다.
김 대표는 김영삼 대통령 시절 청와대 민정·사정비서관, 내무부 차관 등을 지냈다. 이어 96년 15대 총선 때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부산 남구을 지역구에서 첫 번째 금배지를 달았다. 같은 지역구에서 내리 4선을 한 뒤 지난해 4월 부산 영도구 지역구 재보선에서 이겨 5선을 기록했다.
2008년 18대 총선 때는 친이계에 의한 '공천학살'에 맞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뒤 '살아 돌아간'(한나라당 복당) 전력이 있다. 친박계가 당을 장악한 2012년 19대 총선 때도 공천을 탈락당했지만 이때는 불출마했다.
김 의원은 7·14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하면서 "당에 충성한 동지를 쳐내는 일이 반복돼왔는데, 그 피해자는 바로 나였다. 대표가 되면 공천권은 국민에게 돌려드리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
'야인' 시절이던 2012년 대선 때는 중앙선대위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아 선거 승리를 이끌어낸 뒤, '이제 제 역할은 끝났습니다'라는 메모만 남기고 칩거에 들어갔다. 이후 지난해 재보선까지 4개월간은 '백의종군'했다.
김 대표는 '원조 친박'이자 '친박계 좌장'으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세종시 수정안' 찬성과 원내대표 추대 관련 이견 등을 계기로 박근혜 대통령과 관계가 틀어졌다.
2009년 5월 당청은 계파갈등 봉합을 목적으로 '김무성 원내대표 추대'를 추진했지만, 박 대통령이 반대하면서 없던 일이 됐다. 김 대표는 당시 사석에서 박 대통령에게 서운한 감정을 강하게 표출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가운데 몇 개월 뒤인 2010년 초 김 대표가 "잘못된 법은 바꿔야 한다"고 청와대와 친이계가 추진하던 '세종시 수정안'의 찬성을 공개선언하면서 갈등이 확대됐다. 당시 박 대통령은 '세종시 원안' 고수 방침을 유지하고 있었다.
김 대표는 '추대 불발' 1년만인 같은 해 5월 결국 원내대표로 '합의 추대'됐다. 이를 두고 박근혜 당시 의원은 반대 의사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찬성도 하지 않으면서 양측에 패인 골의 깊이를 가늠케 한 바 있다.
반면 원내대표를 지내는 동안에는 원만한 대야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치력을 과시했다. 여야가 대치를 거듭하던 당시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와 콤비를 이뤄 세종시 수정안 표결처리, 집시법 강행처리 철회 등을 주고받는 등 합의를 이끌었다. 두 사람은 각각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출신으로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김 대표는 지난해 재보선으로 국회에 복귀한 직후 '임을 위한 행진곡' 문제를 놓고 야당 편을 들기도 했다. 정부가 5·18기념식에서 이 곡의 제창을 불허하자 최고중진연석회의에 참석해 "나도 민주화 투쟁 시절 하루에 몇 번씩 불렀다. 유가족과 광주시민들이 원하는 대로 5·18 주제가로 선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지난해말 '민영화 논란'으로 철도노조가 파업한 때에는 야당과 함께 국회 철도산업발전소위 구성 등을 약속하고 파업 철회를 이끌어 내면서 "정치가 모처럼 제 몫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 대표는 전당대회 정견발표 연설에서 혁신을 강조했다. 그는 "새누리당이 혁신해서 분노한 국민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정책을 선도해야 한다"며 "성장과 분배를 함께 책임지는 새로운 새누리당을 만들어야 박근혜정부를 성공시키고 정권재창출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약력
△1951년 부산 출생
△한양대 경영학과 졸업
△부경대 명예정치학 박사
△민주화추진협의회 창립 멤버
△통일민주당 창당발기인·총무국장·기획조정실 부실장·국회행정실장
△민주자유당 의사국장·의원국장
△김영삼 대통령 후보 추대위 총괄국장
△제14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행정실장
△대통령 민정비서관·사정비서관
△내무부 차관
△제15~18대 국회의원(부산 남구을)
△한나라당 사무총장·최고위원·원내대표·비상대책위원장
△제18대 대선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총괄본부장
△제19대 국회의원(부산 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