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11월 20일 베트남의 서북쪽, 라오스 국경에 인접한 작은 마을 디엔비엔푸의 상공을 수송기들이 덮었다.
하늘에서 프랑스 군대 1만 명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다.
낙하산에는 요새를 건설하기 위한 각종 장비는 물론 105mm 곡사포 28문과 경전차 부품들도 실려 있었다.
디엔비엔푸는 하노이에서 서쪽으로 300km 떨어진 곳으로 높은 산들에 둘러싸인 폭 3km 가량의 분지였다.
이어 포병과 보병대대가 배치된 7개의 초소가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요새는 적의 공격에 대비해 단단하게 지어졌지만 2가지 취약점을 갖고 있었다.
보급기지가 있는 하노이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필요한 물품과 증원부대는 모두 수송기를 통해 지원받을 수 밖에 없었다.
또 분지 외곽을 둘러싼 높은 산들이 적의 수중에 넘어간다면 궤멸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 군대와 싸우고 있는 프랑스는 무슨 의도로 이 곳에 요새를 구축했을까?
◈ 결전을 기다리고 있는 프랑스군 vs 천천히 치밀한 준비에 들어간 베트민
농촌을 근거지로 한 베트민 게릴라들의 공세에 밀려 겨우 도시 일부 지역, 그것도 낮에만 장악할 수 있었다.
베트민 병사들은 특히 기동력에서 프랑스군을 압도했다.
7년의 전쟁을 치르면서 프랑스 군대는 7만 4,000명의 전사자와 19만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새로 부임한 나바르 프랑스군 사령관은 새로운 작전을 짰다.
"중국으로부터 각종 물자를 지원받는 호치민 루트의 길목을 장악하고 기다리면 베트민 부대가 몰려올 것이다. 이때 우세한 장비와 화력을 이용해 적군을 섬멸하면 전세가 확 달라진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디엔비엔푸였다.
한편 베트민의 지도자 호치민과 군사령관 보 구엔 지압은 머리를 맞대고 프랑스 군대를 물리칠 수 있는 작전을 짜고 있었다.
지압 장군은 디엔비엔푸의 지형을 '밥공기'로 비유했다.
밥공기의 밑바닥 평평한 부분에 프랑스군이 진을 치고 있고, 베트민 군대가 그릇 가장자리에 숨어 있다 위에서 아래로 포격을 가하기로 했다.
당시 베트민은 소련으로부터는 대공포를, 중국으로부터는 한국전쟁에서 노획한 미제 105mm곡사포 24문을 건네받은 상황이었다.
베트민 조직에 총동원령이 떨어졌다.
2개의 부대가 조직되었다.
먼저 산악지역을 하루에 20마일씩 행군할 수 있는 베트민 정규군 5만 명이 전장으로 향했다.
다른 부대는 군수품과 무기를 나르는 여자와 청년들로 구성된 농민군이었다.
북부 전 지역에서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자전거를 개조한 손수레에 쌀을 싣고 날랐다.
"정글을 통과하는 일이 난관이었다. 폭격 때문에 큰 도로는 이용이 불가능했다. 1인당 5kg의 쌀을 운반했다. 1kg은 전선의 병사들에게 전달하고 나머지 4kg은 등에 지거나 자전거로 운반하는 우리 일행이 먹었다. 처음에는 정글에서 따뜻한 음식을 먹지 못했다. 불을 피면 연기 때문에 공습을 당하기 때문이다"
200문의 대포는 분해해서 들고 오거나, 몸에 밧줄을 맨 수십 명이 달라붙어 맨손으로 고지로 끌고 올라갔다.
대포를 끌고 가는데 걸린 시간은 무려 3개월에 달했다.
농민과 병사들은 하루 평균 800m씩, '영차'하면 한 번 밧줄을 당길 때마다 3cm씩 대포를 밀면서 100일에 걸쳐 프랑스군 진지의 코 앞에 배치했다.
대포는 모두 동굴이나 참호에 잘 은폐되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반면에 프랑스군의 참호나 움직임은 고지 위에서 잘 관측되고 있었다.
◈ 무자비한 포격과 함께 디엔비엔푸 전투가 시작되다
베트민 군대의 대포 200문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5마일 밖에 있는 산에서 먼저 활주로와 중앙 참호를 향해 집중적으로 포격이 가해졌다.
한 시간만에 약 500명이 사망했다.
포탄이 어디서 날아오는지 위치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해가 질 무렵 이번에는 가장 외곽에 있는 베아트리체 요새로 베트민 병사들이 물밀 듯이 쳐들어왔다.
프랑스군 700여 명 가운데 200여명만 살아남아 도망쳐왔다.
프랑스 포병마저 무너지자 포병 지휘관 샤를 피로트 대령이 자살했다.
활주로 중앙에 포탄이 쏟아지면서 프랑스군은 완전히 외부세계와 단절되었다.
비행기가 착륙하지 못하자 부상병들은 매일 죽어갔다.
포위망이 좁아지자 밤낮으로 육박전이 벌어졌다.
4월 초 양측에서 2천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뒤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지압 장군은 방법을 바꿔 프랑스 군 중앙지대로 들어가는 100마일 길이의 땅굴을 파도록 했다.
5월 7일 프랑스군은 더 이상 싸울 힘도 없었고, 탄약도 다 떨어졌다.
프랑스군은 하노이 본부에 무전을 보냈다.
"전투가 끝났습니다"
지압 장군은 '백기를 올리지 않는다'는 조건부 항복을 받아들였다.
"벙커의 천장에서 무엇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총에 대검을 꽂고 베트남 모자를 쓴 의기양양한 베트민 병사들을 봤다. 그들이 소리쳤다. '밖으로 나와~'라고"
이렇게 해서 55일에 걸친 '디엔비엔푸 전투'가 막을 내렸다.
◈ 프랑스군의 처참한 패배…결국 인도차이나를 포기하고 떠나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3,000명의 전사자가 발생했고, 또 다른 3,000명이 영구 불구자가 되었다.
베트민의 전사자는 8,000명에 달했으나, 프랑스를 굴복시키고 인도차이나를 되찾았다.
3개월의 포로수용소 생활에서 프랑스군 포로의 절반이 사망했다.
먼 훗날 비제아 중령은 베트민 병사들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들은 사냥총과 같은 치졸한 무기를 갖고 전투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분대에서 중대로, 연대로, 마지막에는 완전한 사단으로 성장해가는 것을 보았다. 이 인내심 강한 병사들은 운동화에, 밥 한 공기만으로 하룻밤에 50km를 행군했다. 이처럼 뛰어난 보병이었기 때문에 디엔비엔푸에서 우리를 패배의 수렁으로 몰고 간 것이다"
전투가 끝나자 프랑스는 즉각 베트남에서 철군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2년안에 남북 베트남 전역에서 선거를 실시하기로 합의하면서 8년에 걸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그 막을 내린다.
그러나 총선거는 끝내 실시되지 못했다.
프랑스가 떠난 자리에 더 막강한 외세 '미국'이 인도차이나에 상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