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월 21일 밤 10시경 서울 세검정 일대.
"따~따~따~따! 쾅~쾅"
어둠 속에서 난데없는 총성과 폭음이 울렸다.
청와대 앞 100m 까지 진출한 무장간첩 31명이 흩어지면서 갈긴 총소리와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다.
이들은 이보다 2시간 전 숨어있던 북한산 비봉 남쪽에서 내려와 청와대로 향했다.
한국군 차림을 한 무장간첩들은 마치 행군하는 부대원들처럼 2열종대로 세검정 쪽으로 내려왔다.
상명여대 입구 세검정사거리에 검문소가 있었지만 무사통과였다.
그러나 자하문 고갯길에서 처음으로 제지를 당한다.
종로경찰서 소속 박태안, 정종수 형사가 검문소에서 나와 괴한들에게 물었다.
"당신들 뭐요?"
"우리는 CIC방첩대원들인데 특수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서장에게 알렸는데 아무 얘기 못 들었나? 우리는 너희와 상대할 사람들이 아니다"
공비들은 형사들을 밀치고 계속 행군했다.
형사들은 이들이 신고가 들어온 공비란 걸 직감하고 뒤를 따랐다.
공비들이 경복고 후문까지 왔을 때 지프차 한 대가 이들 앞에 섰다.
"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이다. 내 허락없이는 못 지나간다"
이 순간 최 서장 뒤로 시내버스 한 대가 올라오다 지프차 뒤에 멈춰섰다.
공비들은 증원부대가 도착한 것으로 착각하고 대뜸 최 서장의 가슴에 연발 사격을 가했다.
"드르륵~ 드르륵"
"국방군이 출동했다"
이어 시내버스를 향해 총을 갈기고, 수류탄을 던졌다.
버스 문이 열리고 승객들이 몰려 나오자, 공비들은 국군들이 공격하는 줄 알고 일제히 흩어졌다.
이 순간 공비들 뒤에서 대기하던 두 형사가 부대장 김춘식을 쓰러뜨리고 수갑을 채웠다.
◈ 아수라장이 된 경복고 일대, 조명탄 터지는 가운데 총격전 벌어지다
총성이 울리자 청와대 경비를 맡고 있던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 병력이 출동했다.
경복궁에 주둔하던 30대대의 연병장에서는 장세동 소령 지휘 아래 81mm 박격포 10여 문에서 조명탄이 발사되었다.
조명탄은 밤새도록 세검정과 북악산 일대를 대낮같이 밝혔다.
이때부터 국군과 무장공비 간에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사방으로 흩어진 124군 부대원 30명은 각자 살 길을 찾아 서울 북쪽으로 달아나기에 바빴다.
10일간 군경합동작전을 벌인 결과, 인왕산 기슭에서 김신조를 생포하고, 28명을 사살했다.
2명은 휴전선을 넘어 북한으로 도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형사들에게 체포돼 치안국으로 끌려간 김춘식은 채원식 치안국장이 무장해제를 하던 중 수류탄이 폭발해 아쉽게도 사망했다.
우리 쪽 피해도 컸다.
제1보병사단 15연대장 이익수 대령 등 군 장병 25명과 민간인 7명이 죽고, 52명이 부상을 입었다.
방첩대 사령부 식당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김신조는 오만한 자세로 외쳤다.
"청와대를 까러 왔수다.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요"
훗날 목사가 된 김신조는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비록 투항했지만, 그때는 전향한 것이 아니었죠. 영문도 모른 채 기자회견장에 개 끌려가듯 나가서 대답을 강요하는 건 날 무시하고 깔보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격하게 나올 수 밖에 없었지요"
이 설익은 기자회견을 마련한 방첩대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찍혀 내내 중앙정보부에게 끗발에서 밀리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그것도 권력의 심장부인 청와대 앞까지 방어망이 뻥 뚫린 것인가?
◈ 국군 수뇌부 "공비들이 그렇게 빠른 속도로 서울로 잠입할 줄 몰랐다"
다음날 새벽 비무장지대 최남단 초소가 있는 연천군 매현리에 도착해 어둠이 깔리기를 기다렸다.
밤이 되자 절단기로 철조망을 제거하고 휴전선을 넘었다.
이 곳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파주군 초리골에 사는 나뭇꾼 4형제를 우연히 마주쳤다.
공비들은 갑론을박 끝에 투표까지 한 결과 이들을 풀어주기로 했다.
4형제를 풀어줄 때 손목시계를 선물로 주면서 "만약 경찰에 신고하면 우리 후속부대가 내려와서 너희 마을과 가족들을 몰살할거야"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4형제는 파주군 법원리 창현파출소에 신고를 했다.
이때가 1월 19일 밤 9시경이다.
이 소식은 3시간이 지난 자정 무렵에야 대간첩작전대책본부에 전달됐다.
나뭇꾼 형제들을 살려보낸 무장공비들은 법원리 뒷산을 출발해 '급속 산악행군'을 시작했다.
급속행군은 약 30kg의 짐을 진 중무장한 군인이 시간당 10km를 주파하는 구보다.
한국군은 야간 산악행군일 경우 시간당 4km를 넘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김신조 부대는 시간당 10km의 속도로 법원리~미타산~앵무봉~노고산~진관사~북한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달렸다.
1월 20일 새벽 6시에 북한산 비봉에 도착했다.
10시간 동안 휴식없이 전력질주를 해낸 것이다.
한국군은 이들이 이렇게 빨리 서울에 들어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나뭇꾼들과 헤어진 곳을 기준으로 할 때 북한산까지 산악행군을 할 경우 이틀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공비들은 하룻만에 주파한 것이다.
파주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은 수도방위부대인 6군단 예하의 3개 사단과 김재규 중장이 지휘하는 6관구 병력이 총동원돼 수십겹의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공비들은 이미 이 지역을 통과한 후였다.
결국 공비들이 북한산에서 내려와 청와대로 향할 때 이들을 막은 것은 중무장한 국군이 아니라 권총 밖에 없는 경찰 뿐이었다.
그나마 국방장관이 치안국장에게 지시해 서울지역에 갑종 비상을 걸고 세검정에서 정릉과 창동에 이르는 축선에 경찰을 배치했기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 충격을 받은 박정희 대통령과 국민들...본격적인 남북대결로 가다
더구나 이틀 후 원산 앞바다에서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되자 안보 위기가 고조됐다.
박정희 정부는 보복을 다짐했다.
그해 10월 중동부전선 비무장지대를 통해 특수공작대원을 파북해 북한에 큰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
북한도 울진. 삼척 지역에 대규모 무장공비를 남파시키는 등 남북간에 보복전이 이어졌다.
중앙정보부는 북한에 똑같은 방식으로 보복하기 위해 북한의 '124군 부대'에 맞서 특수부대인 '684부대' 일명 '실미도 부대'를 비밀리에 조직해 특수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해빙되고 이 부대를 방치하면서 부대원들은 총구를 거꾸로 남쪽에 들이대 모두 자폭하는 비극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주민등록증이 탄생한 것을 시작으로 예비군과 5분 대기조가 창설됐다.
전투경찰이 생긴 것도 이때다.
당시 군에 복무 중인 장병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지시가 떨어졌다.
국군의 훈련도 세졌지만 현역병들은 육군과 해병대는 6개월, 해군과 공군은 3개월씩 복무기간이 늘어난 것이다.
이때문에 김신조 목사는 곳곳에서 "당신 때문에 군대에서 개피봤다"는 항의를 받았다고 한다.
한편,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남북정상회담에 나타난 박재경 인민무력부 부부장이 1.21사태 당시 살아서 평양으로 돌아간 124군 부대원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적과 아군을 떠나 철통같은 포위망을 뚫고 휴전선을 넘어 생환했으니 특수부대 역사의 전설이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