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26일, 정홍원 국무총리의 사의를 반려하고 국무총리로서 사명감을 갖고 계속 헌신해 줄 것을 당부하는 형식으로 최근 조심스럽게 전망이 나왔던 '총리유임카드'를 던졌다.
청와대는 박 대통령이 세월호 사고 이후 국민들에게 국가개조를 이루고 국민안전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를 위해 지금 시급히 추진해야 할 국정과제들이 산적해 있고 이런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고심 끝에 정홍원 국무총리의 사의를 반려했다며 고육지책임을 사실상 시인했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사고 직후 가진 진도 현장 방문과 그뒤 국무회의 등 각종 회의석상에서 '관피아 척결과 국가대개조'를 약속했고 이런 약속의 일환으로 정 총리의 사의를 수용했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총리의 사의를 일단 수용한 뒤 두명의 후임 총리후보자를 지명했다 잇따라 낙마하면서 사의수용을 다시 번복한 것은 사상 초유의 일로 대통령과 청와대의 권위는 큰 상처를 입게 됐다.
물론 새누리당 이완구 원내대표가 "총리 임명 절차를 또 밟으려면 한 달 이상 걸릴테니 상당한 공백이 있을 것"이라며 "국정이 마비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점에서 (총리 유임이) 이해된다"고 말하고 민현주 대변인이 "대통령의 고뇌에 찬 결단으로 이해한다"며 당 지도부는 청와대의 결정을 두둔했다.
당권경쟁에서 양강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김무성·서청원 의원은 '정홍원 총리 유임' 결정과 관련해 '대통령의 고뇌'를 나란히 강조하면서 당 지도부와 같은 태도를 보였다.
전당대회 과정에서 대통령과 친박 의원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양강 주자들이 청와대와 당 지도부의 입장에 묵시적으로 동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새누리당 내에서도 소장파들의 입장은 확연히 다르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내각을 전면개편을 하겠다'던 약속을 청와대가 스스로 내쳐버렸다는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소장파 당권주자인 김영우 의원은 국회 기자회견에서 "장고 끝에 악수 둘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현실이 돼버렸다"며 "인사청문회를 통과시켜야하는 청와대의 고충도 이해하지만, 총리 유임은 책임회피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정부라는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재선의원은 "유임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이 당내에 많다. 총리 연속낙마에 대한 화풀이라도 하듯이 '더 사람 안찾겠다'고 하는 꼴"이라며 "인사청문회를 통과할 수 있고, 국민의 동의를 받을 수 있는 인물이 얼마든지 있을텐데 귀찮으니 그냥 유임하겠다는 게 아니냐"고 질타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유기홍 수석대변인은 이날 "우선 국민 눈높이에 맞는 새로운 총리 한 분을 추천할 능력이 없는 무능한 정권이라는 것을 자인한 꼴" 이라면서 "이런 분을 유임시키는 것은 과연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 이후 우리 국민들이 바라는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 의지가 있는지를 의심하게 하는것"이라고 평가했다.
세월호 사고 이후 국정 난맥상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한 이래 두달 동안 퇴진조차 하지 못하고 사실상 '식물총리'로 머물렀던 정홍원 총리가 관피아 척결과 국가대개조라는 약속을 힘있게 이행하기 힘들게 하는 구도가 된 것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번 총리유임을 청와대의 고육지책으로 평가하면서 결과적으로 국가개조에 대한 기대를 갖기 어려워 졌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때문이다.
양승함 연세대 교수는 "정 총리는 꼼꼼한 성격으로 일상적 총리로는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무난하다"라면서도 "하지만 국가개조를 담당하기에는 좀 부족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런 점에서 국가개조에 대한 기대는 물 건너갔다고 봐야한다"고 덧붙였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세월호 참사이후 제기된 인적쇄신 등 사회적 합의를 눈감은 것 밖에 안 된다"며 "정 총리가 정치적으로 책임을 지겠다고 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지도 의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번 총리유임으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과 정홍원 총리 등 세월호 사태에 대해 책임을 져야할 사람들이 다 살아남은 형국이 됐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잇단 총리 후보자의 낙마에 이어 청와대가 고육지책으로 총리 유임카드를 내밀면서 결과적으로 박근혜 정부의 권위가 떨어지고 관피아 척결과 국가개조라는 시대적 소명을 이행해야 하는 동력도 약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