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자와 부상병, 피난민 모두 데리고 후퇴한다"

[임기상의 역사산책 48]맥아더 명령 무시한 스미스 장군, 대한민국 구하다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의 격전지로 가고 있는 중공군. 현대전에 필요한 무기와 보급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 중공군 9병단, 압록강을 건너 장진호로 향하다

1950년 11월 7일 쑹스룬 장군이 이끄는 중공군 제9병단 14만명은 압록강을 건너 한국이라는 생소한 전장으로 출발했다.

이들의 목표는 원산을 출발해 장진호로 북상하는 미 제1해병사단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다.

중공군은 험준한 산악지대를 걸어 명령받은 지점으로 이동했다.

딱하게도 이들에게는 추위에 대비한 솜옷과 솜모자가 모자랐고, 현대전에 필요한 비행기, 차량, 중포는 물론 보급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이로 인해 전투보다는 추위와 배고픔으로 수많은 장병들이 죽어간다.

중공군은 장진호에서 흥남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에 있는 요충지의 산중에서 미군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 미 10군단 수뇌부, 출동 전부터 삐걱대다

인천상륙작전이 끝나자 미 해병1사단은 인천에서 배를 타고 원산에 상륙했다.

이들은 아놀드 10군단장으로부터 험준한 산길을 따라 북상해서 장진호를 거쳐 서쪽으로 진군해 평양에서 북진하는 미8군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때부터 아놀드 군단장과 스미스 해병1사단장 사이에 의견 충돌이 시작됐다.

맥아더의 결정이라면 무조건 맹신하는 아놀드 장군은 "도쿄사령부에서 지시한대로 빨리빨리 압록강으로 돌진하라"고 재촉했다.

반대로 신중한 스미스 장군은 중공군과 맞서 싸우기로 예정된 지역은 산세도 험하지만 엄청나게 추운 곳인 만큼 천천히 진군하면서 보급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진호 전투가 끝날 때까지 사사건건 대립한 스미스 해병1사단장(왼쪽)과 아놀드 10군단장. 스미스 장군의 고집이 해병대를 살렸다.
이후 두 사람은 진격 방향, 부대 배치, 진군 속도, 보급 문제를 둘러싸고 계속 충돌했다.

1950년 11월 27일 해병사단은 해변에서 장진호를 향해 본격적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출발한 지 얼마 안돼 해병대는 수동에서 1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과 접전을 벌였다.

중공군은 사흘간 공격을 하다 홀연히 사라졌다.

청천강 전투에서 중공군이 보여준 전형적인 '미끼 작전'이었다.

해병대를 깊숙히 끌어들인 후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 공격을 가해 섬멸시킨다는 작전이다.

쑹스룬 장군은 부하들에게 "대어를 잡으려면 미끼 맛을 보여줘야지"라고 말했다.

이 시간에 청천강 북쪽에서는 미8군이 미끼를 덥석 물었다가 궤멸적인 타격을 받고 있었다.

스미스 장군은 긴장했다.

"중공군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거대한 덫을 놓고 있구나"

◈ 스미스 장군, 명령을 거부하고 진군 속도 늦추며 보급체계를 갖추다

험준한 고갯길을 올라가며 장진호로 진군하고 있는 해병대원들
곳곳에서 중공군의 흔적이 발견됐다.

황초령을 지날 때는 다리가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북쪽으로 후퇴하는 중공군이 '이리 넘어오라'고 손짓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알몬드 군단장은 수시로 정찰기를 타고 나타나 "맥아더 장군의 명령대로 크리스마스 때까지 압록강에 도착하라"고 재촉했다.

스미스 장군은 명령을 무시하고 진군 속도를 늦추고 연대간의 연결을 끊지 않았다.

그리고는 길목 곳곳에 보급품을 보관하는 창고를 짓고 이를 지키는 부대를 배치했다.

진격할 때 곳곳에 설치한 보급창고는 후퇴할 때 해병대의 생명선이 되었다.
험한 산길을 넘어 장진호 남쪽 기슭에 있는 하갈우리에 도착하자 스미스 장군은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우리 사단이 다시 모이고 비행장이 갖춰질 때까지 더 이상 진군하지 않는다"

군단장으로부터 겨우 허가를 얻어 이 곳에 작은 비행장 활주로를 닦기 시작했다.

나중에 중공군과의 격전이 시작되고 엄청난 사상사가 발생하자 이 비행장은 큰 일을 해낸다.

수송기를 통해 4,500명의 사상자가 후방으로 수송되었다.

각종 전투장비나 식량, 의료품이 이 비행장에 속속 도착했다.
하갈우리에 급하게 지은 임시 비행장. 해병대가 중공군에게 포위되자 외부와의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 장진호 서쪽의 유담리에 도착하자 중공군의 포위공격이 시작되다

11월 27일 선발부대인 해병 7연대가 장진호 서쪽 끝인 유담리에 도착하고, 그 뒤에 5연대가 배치됐다.

그날 밤 9시에 영하 섭씨 20도의 강추위 속에 중공군이 총공격을 가해왔다.

해병은 자기들이 지키던 고지를 사수했다.

그러나 장진호 동쪽에 도착한 미 육군 31연대 병력은 포위 공격을 받고 궤멸됐다.

다음날 아침 미 해병1사단은 모두 중공군에 포위된 것을 알았다.

이 시간에 청천강 북쪽의 미8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허겁지겁 평양으로 향해 무질서하게 후퇴하고 있었다.

결국 맥아더 사령부는 11월 29일 "흥남으로 집결해서 교두보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포위된 해병대는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며 왔던 길을 되돌아 유담리~하갈우리~고토리~진흥리~흥남까지 240km의 거리를 행군해야 했다.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장진호 서쪽에서부터 흥남으로 후퇴하고 있는 미 해병 1사단의 5연대와 7사단 장병들
후퇴길은 '한국의 지붕'으로 불리는 개마고원 지대로 해발 1,000~2.000m의 고산지대였다.

날씨도 문제였다.

낮에도 영하 20도, 밤이 되면 영하 30도 이하로 떨어졌다.

동상과 설사로 쓰러지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중공군은 주로 밤이나 새벽을 틈타 공격을 해왔다.

그러나 무기도 형편없고 물자도 부족해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중공군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먼저 쓰러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걸어서 포로가 되거나 피난민 틈에 섞여서 도망가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투항한 중공군 포로들. 중공군은 해병대의 강력한 반격과 미 공군의 폭격, 아사 때문에 녹아버렸다.
어느 병사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고지를 하나 점령한 후 부대를 통과시키고, 또 다른 중대가 고지를 점령하면 통과시키는 식으로 후퇴했습니다.
황초령 부근에서 중공군 30명이 포로가 되겠다고 따라오는데 아무리 가라고 해도 가지를 않아요.
자기들은 중공군이 아니라 장개석 부대라며 막무가내로 따라오는 겁니다"

◈ 스미스 장군 "우리는 후퇴가 아닌 새로운 방향으로 공격한다"고 선언하다

미 해병1사단을 이끈 올리버 스미스 소장. 부하들과 동거동락하며 장진호 전투를 이끌어 한국전쟁의 판세를 바꿨다.
12월 4일 흩어져 있던 해병1사단이 주요 거점인 하갈우리에 집결했다.

여기에 모인 병력은 1만여 명, 차량은 1,000여대였다.


1주일 전에 이 곳에 미리 도착한 스미스 장군은 부하들에게 "우리는 이제부터 "후퇴가 아니라 새로운 방향으로 공격한다"고 지시했다.

해병대는 휴식을 취하고 전사자와 부상자 전원을 수송기로 이용해 후방으로 후송한 후 남쪽으로 출발했다.

이들 뒤에는 수천 명의 피난민과 중공군 포로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남쪽으로 내려오다 중대한 고비를 맞았다.

중공군이 황초령에 걸린 다리를 폭파한 것이다.

이번에는 공군이 나섰다.

가교를 만드는데 필요한 장비를 낙하산으로 떨어뜨렸다.

이 장비를 공병부대가 조립해서 다리를 만들어 부대 전체가 골짜기를 빠져 나왔다.

이렇게 해서 해병1사단은 10배나 되는 중공군을 패퇴시키고, 장비 대부분과 부상병 전원, 수천명의 피난민을 데리고 무사히 흥남으로 철수했다.

◈ 괴멸적 타격을 입은 중공군 9병단,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들의 시신들. 전투보다는 동상으로 더 많이 죽었다.
장진호 전투에서 해병1사단은 총 4,418명의 전사상자를 냈다.

전사 604명, 부상 후 사망 144명, 실종 192명을 기록했다.

7,313명은 가벼운 동상을 입었으나 나중에 회복되어 부대에 복귀했다.

해병1사단 장병과 장비는 모두 흥남 앞바다에서 기다리던 해군 선단에 승선해 부산에 도착한 후 다시 전투에 투입되었다.

중공군은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의 10배에 가까운 3만 7,500명의 전사상자를 냈다.

이 중 2만 2,500명은 해병대와의 전투에서, 1만 5,000명은 항공기 공격에 의해 전사했다.

다른 중공군의 1/3은 동상으로 부상을 입어 이후 벌어진 전투에 참가하지 못해 9병단은 사실상 소멸되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중공군 주력이 해병1사단에 투입되는 바람에 함경남북도 전역에 흩어져 있던 미 10군단 전원이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해병1사단을 포함한 10군단 병력 10만명과 피난민 9만 8천명은 흥남철수작전을 통해 성공적으로 후방으로 빠져나와 다음 전투에 투입됐다.

청천강 전투에서 미8군이 궤멸된 것처럼 10군단마저 와해됐다면 우리 대한민국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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