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경주'는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두 남녀가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점에서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과연 두 사람이 달콤한 하룻밤을 보낼지 궁금증을 자아내나 막상 보면 두 남녀의 '밀당'이 전부가 아니다.
과거 왕들의 무덤인 왕릉이 일상적 풍경으로 펼쳐지는 경주란 공간부터 특별하다. 지인의 '죽음'을 계기로 갑작스레 떠올린 춘화를 찾으러 경주에 내려가게 된 한 남자의 돌발 여행은 이렇듯 일상과 맞닿아있는 죽음의 기운을 비추며 우리네 삶을 돌아보게 한다.
메가폰을 잡은 조선족 출신의 장률 감독(52)은 이주와 분단 등의 한국 근현대사뿐만 아니라 한국계 중국인, 탈북자, 유목민 등 경계인들의 삶을 주로 다룬 영화들로 칸, 베니스, 베를린 등 3대 국제영화제에서 주목받았다.
경주는 기존 작품들과 달리 가볍게 시작하나 속을 들여다보면 삶에 대한 통찰과 느림의 미학이 스며있다.
"경주 첫인상, 깜짝 놀랐다"
장 감독은 영화나 책에서 소재를 찾기보다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있는 인상이 있으면 그걸 영화로 찍는다고 했다. '경주'도 마찬가지.
30대 초반이었던 1995년 어느 날, 대구에 사는 지인들과 처음 간 경주의 한 전통찻집에 서 본 춘화와 그 춘화를 빌미로 당시 여자 주인에게 건넨 짓궂은 농담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후 당시 동행했던 한 형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대구에 갔다가 춘화가 생각나 극중 박해일처럼 경주로 떠났고, 찻집에 갔지만 주인이 바뀌고 춘화도 사라진 뒤였다.
하지만 '집요한' 성격인 그는 춘화를 그린 화가를 수소문해 찾았는데 그가 바로 세계적인 십장생 화가 김호연이었다. 김호연 화가는 이번 영화에 나오는 춘화를 직접 그렸다.
그는 "당시 찻집 주인이 신민아처럼 젊고 눈부신 미인은 아니었지만 자기중심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동행한 형님들이 4050대 아저씨라 춘화보고 짓궂게 농담을 했는데, 아무런 동요없이 제 속도로 차를 따르면서 (우리가) 민망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 그 미묘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경주란 도시에 대한 첫인상도 강렬했다.
"중국이나 다른 나라는 무덤을 피한다. 그래서 왕릉과 보통사람들이 같이 사는 모습에 너무 놀랐다. 극중 능 앞에서 고등학생들이 키스하잖나. 실제로 그렇게 왕릉이 연애판이 되고 술판이 되고 그랬다."
경주는 최소 1번은 가보는 곳이다. 하지만 대다수가 10대 시절 수학여행을 통해 간 경우가 많다. 장 감독은 "경주를 제대로 느끼려면, 죽음을 봤거나 죽음을 생각할 수 있는 나이에 가야한다"며 "또 혼자 가는게 맞는 것 같다"고 웃었다.
경주의 중심에는 남녀의 사랑이 있지만 주변에는 죽음이 널려있다. 북경대 교수로 재직 중인 최현 교수(박해일)가 오랜만에 한국에 오는 이유도 지인의 죽음 때문이다.
그가 경주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죽음을 선택하거나 맞이한다. '경주 여신'으로 통하는 찻집 주인 윤희(신민아)도 알고 보면 남편과 사별한 여자다.
영화 곳곳에 죽음이 보인다는 지적에 장 감독은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보다는 정서를 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사람이 살다보면 사랑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랑 말고 그 주변에 다른 게 더 많이 있다. 만났다가 이별하고, 죽음도 있다. 특히 나이가 들면 죽음이 더 많이 보인다."
안타까운 죽음도 있다. 최현 교수와 스쳐지나간 모녀는 윤희의 지인인 형사를 통해 자살소식이 전해진다. 어제 지나쳤던 폭주족이 다음날 평화로운 한낮 눈앞에서 사고사를 당하기도 한다.
"일상에 죽음이 따라온다. 무슨 이유로 피하겠는가. 때로는 나와 아무관계도 없지만 어떻게 이렇게 죽을 수 있나 싶은 사고도 많다. 마음이 아프다. 물론 이런 장면을 편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편집하고 없앨 수 없다. 그래서 집어넣은 것이다."
"현대인은 너무 빠른 속도로 살고 있다"
죽음은 늘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아등바등 사는 모습을 반성하게 만들며, 질주하는 삶에 잠시잠깐 쉼표를 찍기도 한다. 경주가 이렇듯 일상에 녹아든 죽음을 얘기하는 배경에는 삶의 속도를 늦추자는 감독의 의도가 반영된 듯하다.
장 감독은 관객들에게 바라는 것으로 "한국의 전통찻집"을 얘기했다. 그는 "옛날에는 전통찻집이 많았는데 점점 없어지고 커피숍만 많아지는데, 전통차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면 한잔하면 좋겠다"고 바랐다.
극중 신민아가 박해일에게 차를 따라주는 장면은 보는 것만으로 마음을 안정시킨다.
그는 "평소 그렇게 격식 있게 차를 마시지는 않지만, 매일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신다"며 "어떤 공간이건 그 공간의 리듬이 있는데, 커피숍의 경우 사람들이 움직이는 속도가 빠르다면, 전통찻집은 다르다"고 비교했다.
"문제는 속도다. 사고도 속도가 빨라서 나는데, 느리게 살면 건강에도 좋다. 현대인들이 바빠 사는데, 느린 찻집에서 시간을 느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겠냐."
영화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 그는 "영화는 마음의 지평선을 넓혀야 하는데, 어디에만 집중하면 그게 좁혀지는데 보는 순간에는 좋을지 모르나 극장에 나오면 다 잊혀진다"고 지적했다.
이어 "전 영화에 삶의 질감을 연계하는 게 좋다. 살다가 문득 그 장면이 떠오르는 그런 영화. 며칠 뒤면 다 잊혀지는 그런 취향은 아니다"고 자신의 방식을 설명했다.
경주에서 박해일과 신민아의 로맨스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단지 두 남녀의 멜로가 아니기에 특별하다.
장 감독은 "남자들은 단순하게 반응하는데, 여자들은 인물들이 왜 그렇게 행동을 했는지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다면 더 많은 관객이 들었을까? 그렇다면 지금 같은 영화는 아닐 것”이라며 웃었다.
또한 그는 극중 박해일이 과거 연인이었던 윤진서를 만나는 장면을 얘기하면서 남자들의 태도를 지적했다.
그는 "남자들은 거의 혼자서 반성 못한다"며 "어떤 충격을 받아야 반성하는 존재인데, 또 까먹고 실수한다. 남자는 그렇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