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한봉수 선생은 196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된 국가 공인 독립 유공자다.
그런데 '한봉수 선생이 일제에 체포된 뒤 귀순해 다른 거물 의병장을 색출하려는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봉수 선생 친일 의혹을 제기한 이는 구한말 의병장 연구로 명망 높은 이태룡 박사여서 파장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이태룡 박사는 10일 한봉수 선생 친일 의혹의 근거로 일제가 작성한 비밀문서를 제시했다.
1910년 3월 11일 내부 경무국장이 충청북도 경찰부장 앞으로 보낸 '고비수(高秘收) 제1817호'는 '폭도(의병) 소수괴(小首魁) 한봉수(韓鳳洙)가 당국에 사면(赦免)을 원출(願出)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사면을 받으면 '문태서'의 소재를 고해 보답하겠다'고 한봉수가 밝혔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문태서는 덕유산을 무대로 의병 투쟁을 펼치는 중에 1907년 12월 서울 진공 작전을 위해 전국 13도 연합 의병이 결성됐을 때 호남 의병장으로 추대됐던 인물이다.
10명 안팎의 소규모 의병부대를 이끌던 '소수괴'와는 차원이 다른 거물이 바로 의병장 문태서였다.
그로부터 20일 뒤인 1910년 3월 31일 충청북도 경찰부장이 내부 경무국 보안과장에게 보낸 '충북경비수(忠北警秘收) 제338호의 1'은 실제로 귀순한 한봉수가 일본 경찰과 함께 문태서를 찾아다녔음을 나타내고 있다.
충북 경찰부장은 "영동경찰서장의 직접 지휘 하에 행동시켰던 바… 한봉수는 3월 19일, 영동을 출발하여 동 군내와 전북 무주·금산 등의 각 곳을 수사하고, 28일 저녁 영동으로 돌아왔으나 문태서의 소재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경무국 보안과장에게 보고했다.
한봉수 선생은 같은 해 6월 29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교수형 판결을 받았지만, 일제가 경술국치를 맞아 8월 29일 단행한 대사령(대사면)에서 면소 판결을 받았다.
이태룡 박사는 "의병장으로 활동한 자이면서 면소 판결을 받은 것은 전국에서 한봉수가 유일하다"고 강조했다.
'일제의 의병장 색출 작업에 대한 적극 협조가 면소 판결의 배경이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학계 일각에서는 한봉수 선생의 귀순을 '후일을 도모하기 위한 위장 귀순'으로 보기도 한다.
한봉수 선생이 9년 뒤인 1919년 3·1 만세운동으로 다시 옥고를 치렀다는 사실이 위장 귀순의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 경우도 한봉수 선생이 일제에 귀순해 일제의 거물 의병장 색출 작업에 협력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어서 한봉수 선생 친일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