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체제, 겉은 아메리칸 스타일 속은 노예소방?

[변상욱의 기자수첩]

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 '기자수첩'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

주말 내내 현직 소방관들의 광화문 릴레이 시위가 사회 이슈가 됐다. 정부가 국가개조 시책 중 하나로 국가안전처를 새로 만들면서 소방방재청을 없애고 소방총수를 강등하는 입법안을 예고하면서 생긴 일이다.


그동안 지적되어 온 것은 중앙에 외청으로 소방방재청은 있지만 소방관 대다수는 소방방재청이나 안전행정부 소속이 아니라 경기도, 대전시 등 지자체 소속으로 제각각 달라서 문제라는 것이었다.

중앙 119와 지역 119의 공조체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지자체 재정 상태에 따라 장비지급이나 대우도 달랐다. 그래서 장갑이 없고, 있어도 낡아서 불길 속에서 녹고, 헬멧은 하나씩 돌아가나 상당수가 낡아서 머리를 보호하기 힘들다는 등 애로사항들이 시민들을 답답하게 했다.

(사진=윤성호 기자/자료사진)
산소마스크, 보조마스크, 방화두건, 방화복 모두 마찬가지로 소방관들에게 충분치 못함이 드러났다. 오죽하면 소방관이 자기 돈으로 장갑을 사서 쓰고, 부인들이 남편 걱정에 인터넷을 뒤져 소방장비를 구입하려 했을까.

이번 국가개조의 목표는 재난 관리 강화와 국민 안전이라 하는데 묵묵히 온갖 궂은일을 맡아 온 소방방재청과 소방관들의 상황은 개선되지 않고 강등조치 당하게 됐다.

어째서 이런 조직개편안이 등장했는지는 명확치 않다. 짐작컨대 미국 소방조직 체제를 차용해다 쓰려는 듯 보인다.

미국은 국가재난관리를 맡고 있는 곳이 FEMA 연방재난관리청(Federal Emergency Management Agency)이다. 미국 국토안보부의 기관으로 지방 정부나 주 정부 만으로는 처리하기 힘든 재난에 대응하고 지역에 신속히 전문가나 장비를 지원한다. 복구와 구호를 위한 자금 모금도 한다.

이번 정부의 조직안은 미국 연방재난관리청에 상응하는 국가안전처를 중앙 정부 내에 만들고, 현장의 소방본부는 지방자치단체가 지역 실정에 맞게 운영하는 걸로 판을 짰으니 겉모양으로는 미국의 연방 재난관리청, 주정부.지방정부의 소방본부 운영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미국은 각 주마다 헌법까지 따로 갖출 만큼의 지방자치이고 지역도 광대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상대적으로 작은 국토에 중앙집권체제이니 굳이 미국식으로 가져다 맞출 일은 아니다. 더구나 미국은 현장과 실무에 밝은 소방관 출신이 연방재난관리청 책임을 맡아 수행하는데 미국식인데도 그 점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결국 이번 조직개편은 현장 중심이 아니라 중앙 정부의 재난대응부서만 덩치를 키우고, 권한도 전문가가 아닌 중앙 행정관료나 정치인 몫으로 남겨 두고 있다. 재난 현장에서의 경험을 고려치 않은 탁상행정인 셈이다.

(사진=이미지비트 제공/자료사진)
◈ 겉은 아메리칸 스타일, 내용은 로마식 노예소방?

재해·재난·환경변화까지 아우르며 국민의 안전과 재산보호를 위해 국민 가장 가까이서 일하는 조직이 소방방재청이다.

일본도 국가재난관리를 총리 직할의 소방청이 담당하고 총체적인 재난관리를 소방관들이 맡아서 한다. 독일은 재난구조·재난현장의 관리는 물론이고 환경과 관련된 업무까지 소방관이 맡는다.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우리나라도 화재, 태풍, 수해, 지진, 붕괴 등 어떤 재난현장에도 소방관이 동원된다. 응급의료, 긴급구조까지 담당한다. 애완동물 구조에 잠긴 문 열어주기, 환자 이송까지 소방관이 맡아 처리한다.

소방관들은 늘 힘들고 위험하다. 특히 심장질환이 많다. 화재 현장의 일산화탄소, 시안화수소, 그밖에 유해물질이 타면서 내뿜는 물질들과 연기, 분진을 마시며 일한다. 체내 산소공급이 원활치 못한 채 작업하는 잠수사들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거기에 목숨을 걸고 일하니 스트레스는 크고 무거운 것을 들고 급히 작업하느라 근골격계 질환도 많다. 물론 사고로 인한 사상자도 많다. 연평균으로 따져 1년에 7명이 숨지고 330여명이 부상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응급 구조 차량이 경광등을 켜고 달리면 시민들이 소방관들의 무사 안전을 빌어준다고 한다. 소방 영웅 대접이다. 우리는 이에 빗대 '노예소방'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과거 로마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지금의 소방청 격인 corps of villiges라는 도시 경방대를 조직해 화재 감시와 진압, 방범활동을 맡기고 유사시 전투부대로도 운영했는데 이 때 시민과 노예로 구성해 험한 일을 노예들에게 맡겼다고 한다.

노예소방이라는 자조적인 표현은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의 노예소방 체제를 뜯어 고치는 것이 국가개조이다. 그리고 이 점은 이명박 정부 시절 대통령이 직접 약속한 내용이기도 하다. 새로 마련하는 국가 재난관리 체제를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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