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시간 총리 후보' 안대희를 위한 변명

28일 후보직을 사퇴한 안대희 국무총리 후보자. (사진=박종민 기자)
경남 함안의 수재. 경기중과 경기고 졸업. 21살에 사법고시 17회 합격. 25세 서울지검 검사.

초임 검사 시절부터 특수부로 배치돼 그의 손을 거치면 살아남은 공직자나 정치인이 거의 없을 정도로 특수수사의 전설이었다.

인천지검과 부산지검 특수부장을 마치자마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검찰 권력의 상징인 대검 중수부의 1, 3과장을 거쳤다.

곧바로 서울지검 특수 1, 2, 3부장, 대검찰청 중수부장, 부산고검 검사장, 서울고검 검사장, 대법원 대법관,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장, 그리고 국무총리 후보자에 이르기까지 승승장구했다.

소년등과(少年登科)한 뒤 거의 한 눈 팔지 않은 채 앞만 보고 달려온 역정이었다.

김영삼(YS)정부 때는 대검 중수부와 서울지검 특수부의 요직을 두루 섭렵하며 사시 17회 검사들 중 선두 주자로 부상했다.

그런 그도 김대중 정권 들어 한직으로 발령났다. 두 차례나 검사장 승진에서 물먹은 뒤엔 한때 진로 문제를 고심했다.

DJ의 야당 총재 시절, 그 측근들과 호남 출신들을 대거 수사한 데 대한 일종의 보복 조치였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DJ 정권 당시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도 결국 안대희 검사를 검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이 과정에서 한 언론인이 박지원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안대희 검사의 구명과 승진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자료사진)
◈ 국민검사 안대희 명성은 노무현 정권 때 생겼다

검사로서 그의 명성은 노무현 정권의 대검 중수부장 때 화려하게 빛을 발했다.

'특수통' 검사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것도 노무현 정권 초창기인 2003년 대검 중수부장을 하면서였다.

대검 중수부장 시절 홍은동의 단독 주택에 살았다. 재산도 4억원을 넘지 않았다. 잘 나가는 검찰 간부들 대부분이 서울 강남과 서초구에 살 때였다.

중수부장 시절 나라종금 로비 의혹 사건 재수사에 이어 SK 비자금 사건을 처리했다.

특히 대선자금 수사를 진두지휘하면서 야당인 한나라당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권력'인 대통령 측근과 집권여당까지 파고들었다.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을 차떼기당으로 낙인찍게 했고, 노 전 대통령의 측근인 현 안희정 충남지사를 구속했다.

박지원, 박주선 의원과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을 구속했다.

박지원 의원은 정몽헌 현대 아산 회장으로부터 받았다는 150억 원과 관련해 무죄를 선고받았고, 박주선 의원도 무죄를 받아 안 전 대법관과는 악연이 깊다.

어찌됐든 그는 그때부터 '국민검사'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 '비정한 검사'라는 달갑지 않은 지적도

그러나 그에게서 수사를 받거나 구속된 사람들로부터는 피도 눈물도 없는 검사, 무조건 죽이기만 하는 '비정한 검사'라는 달갑지 않은 평가도 받았다.

박지원 의원은 2008년 구속된 이후 "안대희 검사는 제 아무리 돈을 받지 않았다고 하소연해도 소용이 없었다"며 "무조건 죽이려고 달려드는 칼잡이 검사의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박 의원은 지난 26일 오후 안대희 총리 후보자로부터 "잘 봐달라"는 전화를 받고 덕담을 건넸다고 한다.

2년가량 대검 중수부장을 하면서 너무 많은 사람들의 피눈물을 흘리게 했던 탓일까. 그는 검찰총장으로 선택받지 못했다.

사시 17회(사법연수원 7기) 동기생인 정상명에게 밀렸다. 2005년 늦가을이었다. 그토록 꿈꿨던 검찰총장 문턱에서 고배를 마신 것이다.

지난 2006년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자료사진)
그리고 판사들의 꿈인 대법관이 됐다. 2006년 7월부터 2012년 7월까지 6년간이었다. 사법고시 동기생인 노무현 대통령의 배려에 의한 것이다.

안 전 대법관은 사적으로 노 전 대통령을 "형님으로 부른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각각 경남 김해와 함안이 고향인 동향 출신으로,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아주 친했다.

◈ 안대희, 노무현 전 대통령에 '형님' 호칭

2010년 당시 공직자 재산신고에선 고위법관 평균 재산인 19억원의 절반 수준인 8억원가량의 재산을 신고해 '청렴' 이미지를 다시 각인시키기도 했다

2012년 대법관에서 퇴임하기까지 국민검사 안대희의 명성은 잠시 가려져 있었을 뿐, 둥지를 털고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지난 2012년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와 안대희 정치쇄신특별위원장. (사진=윤성호 기자/자료사진)
그의 청렴하고 강직한 이미지가 필요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2012년 안대희 전 대법관을 정치쇄신특별위원장으로 영입한다. 물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이후 그는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치권에서 잘 화합하지 못했고, 한광옥 전 민주당 대표 영입을 강력 반대해 박근혜 후보를 곤혹스럽게 했다.

결정적으로는 박 후보에게 박지만-서향희 부부와 관련해 강력 진언하다가 눈밖에 났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이 때 박 후보는 우리 집안을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하느냐는 핀잔을 줬다는 얘기까지 전해진다.

◈ '朴과 끝났다' 판단에 돈 벌이 나서


그 이후로 그는 박근혜 정권에 대해 기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 2013년 1월 인수위 구성과 2월 총리 인선 과정도 눈여겨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를 지근거리에서 봐온 한 관계자는 "총리 자리가 김용준 전 헌재소장과 정홍원 전 고검장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본 안 후보자는 그 때부터 박근혜 정권과는 끝났다고 확신했다"며 "사회적 품위를 지키고 그동안 고생한 가족을 위해 돈을 좀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5개월 동안 벌어들인 변호사 수임료 16억원도 그래서 생겼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세월호 참사는 다시 그를 불러냈다. 박 대통령은 난국 돌파용 카드로 그만한 인물이 없다는 판단에 따라 안 전 대법관을 총리로 발탁했다.

부정부패와 관피아 척결의 적임자로 '국민검사'를 선택한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고 박근혜 정권이 순항했다면, 안대희 전 대법관은 여전히 청렴과 강직의 명성을 고이 간직한 이미지로 국민의 뇌리 속에 각인돼있을 것이다.

안대희 총리 후보자가 22일 오후 3시 국무총리로 지명 받을 때부터 28일 오후 5시 사퇴 기자회견을 하기까지 6일에 두 시간이 더 걸렸다. 정확히는 146시간이다.

변호사비 16억원 가운데 42%에 해당하는 세금을 납부했고, 4억 7천만 원을 기부했다. 변호사로 번 11억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도 밝혔다.

그의 말대로 평생 약자 편에서 법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노력한 인물이다. 법적으로 보면 하등 잘못이 없다. 무척 억울할 것이다.

돈과는 거리를 두고 명예를 쫓으며 33년간 쌓아온 명성이 146시간 만에 물거품이 됐으니 그럴 만하다.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 변호사 수임료 16억원 때문에 그의 모든 업적과 명성이 포말처럼 사라지게 된 것이다.

◈ 그는 국민정서법을 모르는 검사였다

그는 탈법과 불법은 없다고 항변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 눈높이, 국민정서법을 몰랐다.

평생을 남의 잘못만을, 불법만을 캐고 재단하며 살아온 그다. 너무 단순한 업무에 매달린 나머지 국민의 의식수준이 어떤지, 국민이 고위공직자들에게 뭘 요구하는지를 몰랐다.

그게 잘못이었다. 언론이 붙여준 청렴, 국민 검사 호칭이 그의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는 버티지 않았다. 많은 총리, 장관 후보자들이 갖가지 탈법에도 ‘오불관언’하며 버티기로 일관한 것과는 너무 다르게 몇 가지 의혹이 제기되자 곧바로 총리 후보직을 던져 버렸다.

강직한 성격대로,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은 안대희다웠다.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 안대희는 세월호의 또 다른 희생자

어찌보면 그도 세월호 참사의 또 다른 희생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검찰 풍토에서 안대희 전 검사만한 인물이 탄생하기란 쉽지 않다.

일차적으로는 그의 잘못이다. 이차적으로는 그런 청렴한 검사를 정치권으로 불러들인 사람들이다. 정치를 모르는 그가 정치의 덫에 걸렸다고도 할 수 있다.

'악연'인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은 안 전 대법관의 총리 후보직 자진 사퇴에 대해 “역시 국민검사, 강직한 대법관 안대희답다"고 트윗했다.

이어 "국민검사 안대희, 강직한 대법관 안대희로 국민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기를 바란다”고 했다. 물론 평가는 국민들과 역사의 몫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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