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조선에 이어 만주를 침공한 후 2년 후인 1933년 2월 27일 오후 3시 45분.
하얼빈의 도의정양가 거리에 '삐이이익~' 바람을 가르는 호각소리가 들렸다.
급박하게 뛰어가는 발소리 뒤로 일제 경찰 10여 명이 추격하고 있었다.
골목을 돌아서자 반대편에서 5, 6명의 경찰이 나타나 총을 발사했다.
권총을 든 남루한 행색의 인물이 쓰러졌다.
모자를 벗기니 나이 든 여자였다.
쌍꺼풀 없는 강인한 얼굴의 조선 여인 남자현이다.
그녀의 품에선 비수 하나가 숨겨져 있었고, 옷 속에는 피 묻은 군복을 껴입고 있었다.
그 옷은 오래 전 남편이 의병운동을 하다 전사할 때 입었던 것을 그대로 걸친 것이다.
"야~ 거지할멈~ 남자현, 61세…당신 맞지?"
남자현은 부하 정춘봉과 상의해 만주의 일제 최고 실세 '부토 노부유시' 전권대사를 사살하기로 했다.
두달 후 3월 1일에 신경에서 열리는 만주국 수립 1주년 행사 때 권총과 폭탄을 이용해 노부유시 일당을 몰살하기로 했다.
남자현이 단호히 말했다.
"이 일은 내가 처리한다. 나 이제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는 나이이니 두려움이 없다. 노부유시를 처단한 뒤 내 몸을 하얼빈 허공에 어육으로 날리리라"
그러나 미리 접선한 중국인들로부터 권총과 폭탄이 든 과일상자를 받으러 갔다가 정보를 탐지한 일본 경찰에게 검거된 것이다.
◈ "사이토 조선총독을 사살하겠다"
남자현이 하얼빈에서 붙잡히기 7년전인 1926년 4월 만주의 길림.
남자현은 박청산, 이청수, 김문거 등과 함께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사이토는 어떤 인물인가?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들어라. 민족 혼과 민족 문화를 잃게 하고, 조상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춰내어 가르쳐라. 그리고는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가르치면 동화의 효과가 클 것이다"
한 마디로 조선인의 정신을 노예화한다는 시책이다.
남자현은 이 자를 처단해 조선의 독립 의지를 만방에 알리기로 하고, 박청산, 이청수와 함께 경성으로 잠입했다.
권총과 폭탄은 동지 김문거로부터 미리 전달받았다.
이들이 거사 시기를 엿보던 시기인 1926년 4월 26일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승하했다.
세 사람은 사이토 총독을 비롯한 총독부 고관들이 조문을 하기 위해 빈소가 차려진 창덕궁을 찾을 것으로 보고 기회를 노렸다.
일본 경찰들이 혜화동 일대에 깔리고 가가호호 수색을 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서둘러 인근 교회 건물로 숨어 들었다.
어찌된 일일까?
알고 보니 남자현 팀외에도 사이토 총독의 목숨을 노리는 인물이 있었다.
일본인 가게에서 일하던 송학선이란 청년이 칼을 품고 창덕궁 입구에서 기다리다
조문을 하고 나오는 일본인 3명에게 휘두른 것이다.
그는 추격하던 조선인 순사마저 찌르고 도주하다 일본 경찰과 격투를 벌인 끝에 붙잡혔다.
이 사건으로 경성이 발칵 뒤집혀 총독 경호도 강화되고, 검거 작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거사 실행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세 사람은 만주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뿔뿔히 흩어졌다.
조선총독 암살에 실패한 남자현은 이번에는 만주를 무대로 일본 고관을 처단하려다 결국 검거된 것이다.
◈ 고문과 단식 투쟁…"너희 일본놈들이 주는 밥은 먹지 않는다"
남자현은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에 설치된 감옥으로 끌려갔다.
거기에서 잔혹한 고문과 추궁에 시달리면서 봄과 여름을 보냈다.
8월 6일부터 그녀는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밥이 들어오면 냅다 던지면서 "이제 너희들이 주는 밥은 먹지 않는다"고 외쳤다.
이후 11일이 지나자 남자현은 사경을 헤매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일본 경찰은 서둘러 병보석으로 석방했다.
아들 김성삼과 손자 김시련이 서둘러 달려왔다.
거기에서 249원 80전을 꺼냈다.
"이 돈 중에서 200원은 조선이 독립하는 날 정부에 독립축하금으로 바쳐라. 그리고 손자 시련을 대학까지 공부시켜서 내 뜻을 알게 하라. 남은 돈 49원 80전의 절반은 손자의 학자금으로 쓰고, 나머지는 친정에 있는 종손을 찾아 공부시켜라"
그녀는 다음날 낮, 풀려난 후 닷새만에 순국했다.
남자현의 유언은 다 지켜졌다.
손자인 김시련은 하얼빈 농대를 졸업하고 교직에 몸을 담았다.
아들 김성삼은 외가 집에서 어머니의 친정오빠의 손자이자 종손인 남재각을 찾아 만주로 데려와 사범학교에 보냈다.
이승만과 김구 등 독립투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남자현의 유언대로 독립축하금 200원을 임시정부 요인 조용원에게 전달했다.
◈ 뒤늦게 나온 순국 기사…조선인들의 가슴을 뛰게 하다
1933년 8월 27일자 조선중앙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30년간 만주를 유일한 무대로 조선OO운동에 종사하던 남자현(여자)은 감옥에 구금됐다가 단식 9일 만인(기간이 이틀 줄어 있다) 지난 17일 보석 출옥했다. 연일 단식을 계속한 결과 22일 상오(하오 12시반경)에 당지 조선여관에서 영면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누구보다도 남자현의 고향인 경북 영양군민들의 아픔과 충격이 컸다.
해방 이후인 1946년 8월 22일에 남자현 의사를 기리는 추념회가 열렸다.
이어 1962년 3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윤보선 대통령은 남자현에게 독립유공자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수여했다.
모두 58명이 복장을 받았으며, 여자로는 남자현이 유일했다.
남자현 의사의 일생을 추적해 <나는 조선의 총구다> (세창미디어)란 제목의 저서를 펴낸 이상국 시인은 "왜 이토록 역사는 남자현을 지워버렸는가"라는 글을 통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녀의 삶이 던져주는 강렬한 메시지는 마흔이 된 나이에 문득 '아녀자'의 질곡을 벗어버리고, 죽음을 불사한 투쟁에 뛰어든 것에 있다. 저 흑백사진 속의 남자현이 그토록 뚫어지게 우리를 바라보는 이유는, 시대를 관통하는 진실을 전하려는 그녀의 의욕이 아닐까? 그녀가 죽은 이후에도 얼마나 많은 지식인들과 리더들이 변절하고 말을 바꿨던가…
그녀는 식민지의 여성으로서 가장 자기초월적인 생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