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찾은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 앞. 말끔한 차림의 회사원들이 오가는 한낮의 강남역 인근 인도 위에 침낭과 배낭, 돗자리와 휴대용 가스레인지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소속 조합원들이 이곳에서 1주일째 노숙 농성을 벌이고 있어서다.
지난 17일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염호석(34) 양산분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AS기사들은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염 분회장과 형, 동생 하며 지냈다는 한 노조원은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울먹임을 참아가며 염 분회장이 남긴 유서를 낭독했다.
"더 이상 누구의 희생도 아픔도 보질 못하겠으며 조합원들의 힘든 모습도 보지 못하겠기에 절 바칩니다"
삼성전자서비스 AS기사들의 자살은 지난해 10월 고 최종범 씨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오로지 실적 건수로만 임금이 책정되는 '건당 수수료제' 등 열악한 임금체계와 노조 탄압이 연이은 죽음을 부르고 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잇단 죽음의 행렬이 비단 쥐꼬리 월급 때문만은 아니다. AS기사 1,000여 명이 강남 한복판의 인도 위에서 침낭을 끌어 안고 무기한 노숙 농성을 시작한 데는 그보다도 더 많은 이유가 있다.
◈비수기 월급통장엔 '41만 원'… "실적 내고 싶어도 일감 없으면 소용없어"
"건당 수수료제는 무조건 건수로 치는 거죠. 1건당 평균 1만 2,000원에서 1만 6,000원 단가… 여기에서 식대, 통신비, 유류비 다 빠지고"
"일이 많으면야 상관없겠죠. 그런데 비수기에는 한 달 내내 일해도 하루에 1~2건도 못해요"
삼성전자서비스의 건당 수수료 실태다.
이 같은 방식으로는 비수기의 경우 종일 근무한다 한들 1만~2만 원의 수입밖에 올릴 수 없다. 고 염호석(34) 양산분회장의 지난달 월급이 41만 원이었던 이유다.
삼성전자서비스에 근무하는 A 씨는 "말 그대로 일이 없어서 일을 못 하는 거지 우리가 성과가 안 좋은 게 아니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렇다 보니 AS기사들은 일감이 들어오면 한 건이라도 더 많이 수리하려고 한다. 근무시간은 대중없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건당 수수료제의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삼성전자서비스 AS기사들의 월급명세서에는 알 수 없는 항목이 들어있다. '마이너스' 금액이 찍혀 있는 '성과급' 항목이다.
삼성전자서비스에서 10여 년을 근무한 B 씨의 월급명세서에는 기본급 101만 원과 시간외수당 등 각종 수당이 또 100만 원 상당 찍혀 있다.
그런데 '성과급'이란 항목에는 -85만 원 상당이 찍혀 있다.
결국 각종 공제액에 이 '마이너스 성과급'까지 빼고 나면 B 씨가 지급받는 이달 월급은 총 85만 원꼴.
이렇게 되면 애초에 최저임금에 딱 맞게 계산됐던 101만 원 상당의 기본급마저 깎여 나가게 된다.
실적 건수에 맞춰 임금을 주려다 보니, 기본급만큼도 건수를 못 올린 달에는 아예 기본급 급여마저 삭감되는 방식인 것이다.
노동자운동연구소의 한지원 연구실장은 "명백한 근로기준법 위반에 최저임금 위반"이라면서 "위법이 상시적, 제도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비판했다.
"근로시간에 따라서 임금을 지급하는 법개념이 이곳에서는 아예 고려되지 않고 있고, 건수가 없으면 결과적으로 최저임금도 안 되는 임금을 받게 되니 총체적 위법"이라는 것이다.
한편 AS기사들은 삼성전자서비스의 고객만족도 평가 기준을 맞추기 위해 비인간적인 수모까지 감당하고 있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 홍명교 교육선전위원은 "'해피콜'로 고객 만족도를 일일이 평가한 뒤 점수가 안 좋으면 아침조회시간에 '대책문' 형식의 반성문을 써야 하고, 다른 직원들 앞에서 인민재판식으로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1시간 동안 말하기를 시킨다"며 비인권적인 처사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
노조에 가입하기 전에 관리자로 일했던 삼성전자서비스 AS기사 B 씨는 "한때 나도 고객만족도 평가 점수 10점 만점에서 8점, 7점을 받는 직원들을 직접 새벽에 불러내 대책발표를 시켰다"고 증언했다.
B 씨는 "누가 7점 떴다 하면 근무를 마쳤더라도 사무실로 돌아오라고 하고, 대책회의를 한다며 몇 시간이고 붙잡아 두고 대책서를 적게 했다"면서 "본사 직원도 대책 발표를 들었고, '잘못이 없었다면 고객이 이렇게 점수를 줬을 리 없다'며 면박을 주는 게 일이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이 같은 임금 구조와 노동조건에 대해 삼성 측에 아무리 문제를 제기해도, 삼성은 AS기사들이 본사 직원이 아니라는 입장만 견지하고 있다.
이유는 AS기사들이 소속돼있는 삼성전자서비스 AS센터가 삼성전자서비스와 하도급 계약을 맺고 있는 하청업체라서다.
삼성전자서비스는 전국 160여 곳의 협력사에 AS 업무를 외주화했다. 이 같은 도급계약을 통해 AS기사들의 사용자는 계약서상으로 삼성이 아니게 된다.
삼성전자서비스의 한 관계자는 "AS기사들은 하도급업체인 협력사 직원이기 때문에 급여나 노동조건 등은 협력사에서 책임질 부분"이라면서 "삼성이 관여할 수도, 관여해서도 안 될 일"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은 "삼성은 고객만족도 평가 점수를 갖고 AS기사들에게 페널티를 준다"면서 "삼성직원이 아니라면 삼성 마크를 떼고 일을 해야지, 소비자들에게는 삼성이 제공하는 서비스인 것처럼 기만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