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한라산의 봄은 저지대 오름과 달리 더디게 찾아 드는 셈입니다. 이 때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것이 세바람꽃입니다. 세바람꽃은 한라산에 본격적인 봄이 시작되긴 전인 4월 중순이면 봄바람을 타고 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분포하는 지역도 한라산 중턱부터 정상까지 꽤 넓은 편입니다 보니. 그래서 정상 가까운 높은 곳에서는 9월까지도 간간이 꽃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 결과 가장 오랜 시간 볼 수 있는 꽃입니다. 물론 바람꽃 종류 가운데 강원도 설악산에는 가장 늦게 한 여름에 피는 바람꽃이 있지만 제주에서는 세바람꽃이 마지막을 장식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세바람꽃은 높은 산 숲속에 자라는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 풀꽃입니다. 일본, 대만, 중국에도 분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한라산에서만 자라는 꽃입니다. 키는 다 크면 20cm 정도 되고 여러 개의 줄기가 비스듬히 서거나 옆으로 누워서 자라며 땅속줄기가 있어 옆으로 뻗어갑니다. 뿌리에서 올라온 잎은 잎자루가 길고 3개로 갈라지며 다시 양옆의 2개의 작은 잎이 2개로, 가운데 것은 3개로 갈라집니다. 줄기에 잎처럼 보이는 것은 꽃자루를 지탱해주는 총포엽입니다. 총포엽도 3개로 깊게 갈라져 뿌리에서 올라온 잎처럼 생겼습니다. 제주에서는 4월 말이면 줄기 끝에서 꽃망울이 나오면서 하얀 색 꽃이 달리는데 조금씩 꽃자루가 길게 자랍니다. 꽃은 한라산 중턱인 해발 1000m 정도 되는 곳에서부터 시작되어 정상까지 퍼져 나갑니다.
그런데 세바람꽃의 이름은 바람꽃과 비슷하고 꽃이 3개씩 달리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이름으로는 세송이꽃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몇 년간 세바람꽃을 관찰해왔지만 꽃대가 세 개 달린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 때문에 이름이 붙여질 정도라면 세바람꽃만이 가지는 특징일 텐데 제가 관찰력이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발표 당시 어떤 오류가 있었던 것인지 굉장히 궁금합니다. 어쨌든 꽃이 하나가 달리면 홀아비바람꽃, 두 개이면 쌍둥이바람꽃, 세 개이면 세바람꽃인 셈입니다. 모두 재미있는 이름입니다. 세바람꽃의 학명이 Anemone stolonifera입니다. 여기서 속명 Anemone는 '바람의 딸'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바람꽃이 저지대가 됐든 한라산 고산지역이 됐든 봄바람이 불어올 즈음에 피어나는 것을 보면 정말 이름이 잘 지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종소명 stolonifera는 '포복지가 있는'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마도 땅속줄기가 뻗으면서 자라는 특징 때문에 학명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한라산도 이제 세바람꽃을 시작으로 봄이 찾아들었습니다. 한라산 등성마다 초록이 완연하고 연분홍, 노란색 꽃들이 피어납니다. 바람꽃은 겨울 색이 강하게 남아있는 시기에 꽃을 피우는 모습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연약한듯하면서도 긴 겨울을 이겨낸 모습이 대견스럽습니다. 저지대 숲에는 이른 봄에 올라왔던 꽃들이 대부분 졌지만 한라산은 봄꽃들이 한창입니다. 오래도록 봄을 느끼고 싶으면 한라산으로 가서 봄꽃들과 눈 맞추기를 하는 것이 방법입니다. 그 가운데 세바람꽃이 가장 청초한 모습으로 반갑게 맞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