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주한미군, 한 문장 고치고 정화비용 수천억원 '꿀꺽'

MB말기 쥐도새도 몰래 정화 조항 삭제...국민세금 수천억원 대신 들어갈 판

발암물질 범벅인 주한미군 기지를 정화할 근거 조항이 MB 정부 말기 '쥐도 새도 몰래' 삭제된 것으로 19일 뒤늦게 밝혀졌다.

새정치민주연합 박주선 의원이 환경부로부터 제출받은 '주한미군 환경관리기준 개정 경과' 등의 자료를 보면 한미 양국은 2012년 6월 주한미군 환경관리기준(EGS)을 개정하면서, 미군 측의 요청에 따라 유류로 오염된 토양의 정화 기준인 석유계총탄화수소(TPH)’ 항목을 삭제했다.

TPH(Total Petroleum Hydrocarbon, 이하 TPH)는 토양 오염 정도를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로, 토양이 등유·경유·제트유·벙커C유 등과 같은 '유류에 의해 오염된 정도'를 나타낸다. 식물의 생존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정도로 심각한 환경오염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암을 유발하는 발암성 유독 물질로 알려져 있다.


이 TPH가 미군기지의 제1오염원 이라는 점에서, 미군은 기지 오염 문제에서 자유롭게 돼 천문학적인 정화(관리) 비용까지 아낄 수 있게 됐다. 그로 인해 우리 정부는 그만큼의 국민세금을 오염된 미군기지 정화에 써야 할 상황에 놓였다.

◈ 쥐도 새도 모르게 삭제된 TPH

'EGS(Environmental Governing Standard, 이하 EGS)'는 주한미군이 환경부와 협의하여 만든, 주한미군 구성원이 사용하는 ‘환경 관리 기준’이다. 기지 내의 대기, 수질 등 환경 관련 각종 오염원 관리 및 오염물 처리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다.

1990년 이후 주한미군에 의한 환경오염 사건이 점차 발생하면서 사회적인 관심을 받자,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국 정부에서 2001년 SOFA 개정 시 <환경보호에 관한 특별양해각서>를 체결하고, 환경조항 이행을 위한 <환경정보공유 및 접근 절차>의 규정에 따라 EGS를 주기적으로 검토하며 개정하기로 합의했다.

미군기지의 유류로 인한 토양 오염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는 사진. (녹색연합 제공)
1997년 성안된 EGS에는 TPH가 포함돼 있지 않았지만, 2004년 EGS 1차 개정 때 추가됐다. 전국 곳곳의 미군 기지에서 흘러나온 유류가 기지 주변 지역의 토양과 지하수를 심각하게 오염시켜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자, 이를 잠재우기 위해 유류로 오염된 토양 처리 기준(TPH)을 추가했던 것이다.

당시 미군과 환경부는 "주한미군 시설이 POL(석유, 오일, 윤활제)에 오염된 토양을 처리해야 할 경우 이 처리 목표는 석유계총탄화수소 800ppm이다"며, 정확한 정화 목표치까지 명시했다.

EGS는 주한미군이 SOFA 환경분과위원회에서 환경부와 협의하여 만든다. 사진은 2011년 SOFA 환경분과위원회에 참석하는 한국 측 관계자들. (자료 사진)
그런데 박주선 의원이 환경부로부터 최근 제공받은 자료를 보면, 지난 2012년에 EGS 2차 개정이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유류로 오염된 토양 처리 기준(TPH)이 삭제됐다.

2004년 어렵게 협상을 통해 넣은 'TPH'가 8년 만에 삭제됐고, 그 사실이 2년이 지난 뒤에야 밝혀진 것이다.

현재 TPH가 EGS에서 삭제된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환경부에 삭제 과정이나 배경, 이를 위해 한미 간 주고받은 의견 등에 대해 문의했으나, 환경부는 'SOFA 규정에 따른 비공개 사항이므로 공개할 수 없다'고만 답했다.

◈ 'TPH' 삭제…미군의 오염 기지 정화 책임에 대한 면죄부(?)

일각에서는 향후 미군기지 오염 사고 시 미군이 정화 책임을 지지않기 위해 TPH를 EGS에서 삭제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토양 오염 전문가 A 교수는 "미군기지 오염의 대부분이 기름이고, 사격장에서나 중금속이 간간히 나오는 것인데, TPH를 빼버리면 미 측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것 중 80%는 양보해버리는 거다"며, "(미군의) 정화 책임을 면제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고 문제 제기했다.

실제로 지난 2007년 반환된 23개 미군기지 내부 토양 오염 실태에 대한 정밀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1개 기지를 제외한 22개 기지가 기준치를 초과한 TPH에 심각하게 오염돼 있었다. 그 이후 반환된 미군기지 중 오염된 기지들 역시 TPH가 주된 오염원이었다.

이 중 매각 대상인 17개 기지를 정화하는 데만 1,865억여 원이 들었다. 매각하지 않고 군이 재사용한 기지와 오염 기지의 주변 지역 정화 비용까지 포함하면 지금까지 2~3배 가까운 비용이 들어갔을 거라고 전문가들은 추측한다.

2007년 이후 반환된 오염 기지 중 매각된 17개 기지의 '기준 초과 오염 물질'과 '정화 비용'.
주한미군이 반환을 앞두고 오염된 기지를 정화하는 데 얼마의 비용을 부담했는지는 비밀에 부쳐져 있다. 기지 반환을 앞두고 매번 정화 책임에 대한 논의가 한미 간에 이루어졌지만, 결국 한국이 모두 부담했다.

미군에게 면죄부가 주어졌다는 비판에 대해 환경부는 "(기지를) 반환받을 때는 현장 조사를 통해 오염 개연성을 본 뒤 유해 물질을 다시 정하게 돼 있다"며 "나중에 반환 기지 위해성 검사를 할 때는 어떤 방식으로 할지 모르겠지만 (TPH 검사를) 꼭 못 하게 되는 건 아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TPH조항이 있을 때도 미군에게 정화 의무를 적극적으로 부과하지 못했던 우리 정부가 TPH조항이 삭제된 이후 정화문제를 꺼낼 수 있을지는 매우 비관적이다.

게다가 반환할 때 검사하면 된다고 말한 환경부가 박주선 의원실에 제공한 자료에는 "차후 EGS 개정 시 토양 처리 기준(TPH), 먹는 물 등 분야별로 최신 국내법을 반영할 수 있도록 환경분과위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협의해 나갈 것이다"는 모순적인 계획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박주선 의원은 "이명박 정권과 외교당국의 무능으로 인해 우리 국민만 '눈 뜨고 코 베인 격'이 됐다"면서, "오염자부담의 원칙에 따라 미국이, 미국 정부의 돈으로 환경오염을 치유할 것이라던 정부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우리 국민의 부담만 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도리어 강화해야 할 유류오염 토양 처리기준(TPH)을 밀실에서 삭제한 지금, 기름으로 오염된 미군기지의 토양과 지하수를 치유해야 할 기준도, 미국의 예산 지출의무도 사라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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