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입단한 한화 신인들도 모여서 취재진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1차 지명 신인 유원상을 비롯해 김태완, 연경흠(은퇴) 등이 저마다 시즌을 맞아 다부지게 밝힌 각오가 어렴풋이 떠오릅니다.(물론 이들은 프로야구에 제각기 존재감을 알렸거나 활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차 지명 신인이던 류현진은 당시 기억에는 없습니다. 아마 마침 사진 촬영 때문에 자리에 없었고, 대세에는 큰 지장이 없다고 판단해 따로 만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화 신인 중에는 류현진보다는 계약금 5억5000만 원을 받고 입단한 유원상에 대한 관심이 컸습니다. 1차 지명 신인인 데다 유승안 전 감독(현 경찰청 감독)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계약금 2억5000만 원에 2라운드 2순위로 들어온 류현진은 고교 시절 한 차례 팔꿈치 수술을 받은 전력도 있어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은 게 사실입니다. 그때만 해도 류현진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수로 자라날 것이라고 예상한 전문가들은 많지 않았을 겁니다. 당시 한화 담당이던 저부터 그랬으니까요.
▲모두의 예상을 뒤엎은 류현진의 맹활약
하지만 류현진은 그해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습니다. 18승 6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ERA) 2.23, 204탈삼진으로 선동열 현 KIA 감독 이후 15년 만에 투수 3관왕에 올랐습니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신인상, 정규리그 MVP까지 휩쓸며 전문가들의 예상을 비웃으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뿐입니까? 2012년까지 7시즌 통산 98승 52패 1세이브 ERA 2.80의 빼어난 성적을 거뒀습니다. 전력이 약한 팀 사정으로 다승와은 1번에 그쳤지만 5시즌 탈삼진왕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2010년에는 팀이 최하위에 머물렀음에도 ERA 1위(1.82) 다승 2위(16승)로 빛났습니다.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지난해는 어땠습니까? 14승8패 ERA 3.00, 리그 정상급 선발 투수 못지 않은 성적으로 미국을 놀래켰습니다. 포스트시즌에서는 원조 메이저리거 박찬호(은퇴)를 비롯해 김병현, 서재응(이상 KIA), 김선우(LG) 등 선배들도 이루지 못한 한국인 첫 선발 등판에 승리까지 따내며 한국 야구 역사를 새로 썼습니다.
▲세월호 피해자 위해 1억 기부에 모금 활동까지
그럼에도 이런 제목의 기사를 지난해가 아닌 지금에서야 쓰는 것은 이제야 비로소 류현진이 진정한 '대한민국 에이스'임을 확실하게 입증했기 때문입니다. 기량뿐만 아니라 심성에서도 말입니다.
류현진은 지난 18일 몸과 마음으로 에이스의 가치를 증명했습니다. 숙적 샌프란시스코와 원정, 쉽지 않은 경기에서 7이닝 동안 3탈삼진 4피안타 1볼넷 무실점 쾌투를 펼치며 시즌 3승을 따냈습니다.
경기 전 류현진의 라커에는 자신의 등번호(99번) 대신 'SEWOL 4.16.14'라는 의미심장한 문구를 붙어 있었죠. 4월 16일 발생한 여객선 세월호 침몰 희생자를 추모하자는 뜻이었습니다. 평소 자주 짓던 웃음기를 싹 거두고 경기를 치렀던 류현진은 "큰일이 벌어져 마음에 많은 상처를 입은 국민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도록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21일에는 다저스타디움에서 피해자들을 위한 자선 사인회를 열었습니다. 류현진은 현지 한국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빨리 실종자들을 찾았으면 좋겠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내면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대한민국 에이스
이날은 한국뿐 아니라 현지 팬들도 적잖게 기부를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에이스의 힘입니다. 국내에서도 김광현(SK)과 NC 야구단 등이 피해자들을 위해 귀한 성금을 내놓는 등 구호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류현진의 선배 박찬호는 IMF 사태로 힘겨웠던 1990년대 후반 대한민국의 힘이 돼줬습니다. 불같은 강속구로 거구의 미국 선수들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국민들의 상처입은 마음을 어루만져 줬습니다.
15년여가 지난 지금, 상황은 다르지만 류현진 역시 대한민국의 에이스로서 고국의 아픔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경기장 안팎에서 온몸으로 말입니다.
사실 해외 무대에서 빼어난 기량을 뽐낸 선수들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음 씀씀이까지 에이스의 면모를 보인 선수들은 또 손가락으로 꼽아볼 정도입니다. 류현진은 아마도 그 첫 손가락을 다툴 겁니다.
오는 23일 류현진은 필라델피아와 홈 경기에 나설 예정입니다. 다시금 늠름한 투구와 진지한 표정으로 대한민국 에이스의 진가를 다시금 발휘해주기를 바라봅니다.
p.s-지난해 말 데스크의 요청으로 류현진과 다저스 에이스 클레이튼 커쇼를 비교하는 칼럼을 쓴 적이 있습니다. 한창 화제가 됐던 커쇼의 선행 때문이었습니다. '[임종률의 스포츠레터]류현진과 커쇼, 그리고 김장훈'이라는 제목이었는데 당시는 궁여지책 끝에 전국 1등과 상위 1%의 우등생을 예로 들며 겨우 기사를 풀어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당하게 류현진과 커쇼를 동등하게 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7년 2억 1500만 달러의 커쇼와 몸값에서는 비교도 안 되지만 올 시즌 기량과 품성에서는 '대한민국 에이스' 류현진이 미국의 에이스와 감히 맞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면에서 저는 지난 2006년에 이어 지난해도 류현진에 대해 섣불리, 틀린 판단을 내린 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