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박찬호와 'CBS'
② 박찬호의 운명적 만남, '한양대'
③ 박찬호의 '그 시작과 끝'
고교 3년 때인 91년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박찬호는, 타학교 동기생들인 고교스타 임선동, 조성민 등에게 묻힌다.
‘92 학번들은 ’58년 개띠 77학번 최동원-김시진-김용남' 이후 15년 만의 야구 ‘황금세대’였다.
임선동(휘문고), 조성민(신일고), 손경수(경기고), 차명주(경남상고), 염종석(부산고). 정민철(대전고), 타자로는 박재홍(광주일고), 손혁(공주고). 그리고 박찬호까지.
프로야구 사상 첫 억대 연봉 선수도 탄생했다.
대청기 이후 박찬호를 주시하던 기자는 프로야구 고교신인지명을 앞두고 연고 구단인 당시 빙그레 이글스에 “팔꿈치 부상은 미국에서 수술하면 되니 박찬호를 잡아라”고 조언아닌 조언을 한다.
LG 트윈스와 당시 OB 베어스가 2-3억대의 계약금을 임선동, 조성민에게 제시했다는 이야기가 돌 때, 하지만 빙그레가 박찬호에게 제시한 계약금 금액은 3천만원대였다.
빙그레는 팔꿈치 부상을 이유로 들었지만 그해 초고교급 우완투수 정민철(대전고)를 영입해 투수에 대한 절실함이 덜했다.
결국 박찬호는 가족들의 권유 등으로 프로 진출을 포기하고 한양대로 진학한다.
하지만 ‘한양대 진학’은 박찬호에게 ‘전화위복’이자 ‘운명적’인 것이었다.
만일 당시 빙그레에 입단했다면, 후일 버펄로 하계유니버시아드에 참가할 일도,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눈에 뛸 일도 없었을 것이다.
프로에 입단해 뛰어난 성적을 올렸다하더라도, 지금과 달리 당시 국내 프로야구 여건 상 해외 진출은 거의 불가능했다.
한양대 1학년 때는 동급생인 차명주가 더 돋보였다. 국가대표팀에도 한양대에서 1학년은 차명주만 선발됐다.
박찬호는 2학년 때 대학리그 등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긴했지만 그 해 93년 8월 미국 버펄로 하계유니버시아드 국가대표 1차 명단에는 없었다.
하지만 타자 강혁이 부상으로 대표팀 명단에서 빠지면서 투수 박찬호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임선동, 조성민이 부진을 보인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박찬호는 팀의 4승 중 1승 3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을 준우승에 올린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스피드 건에 찍힌 156km의 구속은, 그들을 발빠르게 움직이게 한다.
대회 이전 조성민에게 관심을 보이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는 박찬호에게 눈을 돌려 메이저리그 구단 중 가장 먼저 30만 달러의 계약금을 제시한다.
군 문제, 소속 대학과의 관계 등 해외진출 가능성을 고민하던 중, 결국 구단주와 팀 주치의가 직접 한국에 와 한양대와 접촉하고 신체검사까지 한 LA 다저스와 120만 달러에 계약한다.
박찬호가 빅리그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한양대 김종량 당시 총장(사진, 현 한양대 이사장)의 결단이 있어 가능했다.
대학야구 라이벌인 연세대 임선동, 고려대 조성민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막 한양대 스타로 발돋움하는 박찬호를 놓아주는 건 쉽지않다.
메이저리그의 꾸준한 러브콜에도 불구하고 최동원, 선동열 등이 소속 대학의 반대로 해외 진출을 하지못한 것과 비교해, 김 총장이 박찬호가 큰 무대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메이저리그 진출을 허락한 것은 '팀'보다 '개인과 한국야구의 미래'를 고려한 '위대한 결단' 이었다.
대한대학스포츠위원회 위원장(1993~2010년 역임) 자격으로 1997년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가 열린 이탈리아 시칠리아를 방문한 김 총장은 현지 취재 기자들을 만나서도 “정치, 사회, 경제 모든 것이 답답한 상황에서 박찬호 만이 국민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며 자랑스러워하며 ‘박찬호’ 얘기만 했다.
‘97년은 박찬호가 메이저리그 승격한 ’96년 5승을 올린데 이어 처음으로 14승을 올리며 메이저리거로 자리매김한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