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기업·금융회사, 금융위기 후 홍콩으로
삼성 등 국내 10대 그룹의 홍콩 현지법인은 작년 5월 말 기준으로 모두 81개로 2009년 5월 말의 33개보다 48개(145.5%)나 늘어났다. 4년간 2배를 넘는 수준으로 급증한 것이다.
그룹별 홍콩 법인 수는 SK가 24개로 4년 전 7개의 3배를 넘었고 롯데 역시 8개에서 19개로 137.5%나 증가했다.
같은 기간 삼성은 19개로 7개(58.3%) 많아졌다. 한진[002320]은 2개에서 4개로, 한화[000880]는 1개에서 3개로 불어났다. LG그룹은 금융위기 이후 홍콩에서 6개의 법인 문을 열었고 현대중공업[009540]과 GS그룹은 2개씩의 홍콩 법인을 세웠다. 10대 그룹 중 유일하게 현대차그룹이 같은 기간 홍콩 현지법인(1개)의 문을 닫았다.
한국 금융회사들 역시 금융위기 이후 잇따라 홍콩에 진출했다.
은행·보험·증권·자산운용 등 금융회사들은 작년 말 기준 현지법인(27개), 지점(5개), 사무소(4개) 등의 형태로 홍콩에 진출했다. 금융회사의 홍콩 현지법인 수는 2009년 3월 말 23개에서 현재 27개로 4개(17.4%) 증가했고 사무소도 2개에서 4개로 늘어났다.
그러나 대기업 중 홍콩에서 한국에서와 같은 정상 기업 활동을 하는 곳은 눈에 띄지 않았다.
10대 그룹의 홍콩 법인들은 주로 금융업이나 무역업, 투자업, 자원개발업, 부동산임대·개발업 등을 하고 있다. 홍콩 법인 수가 가장 많은 SK그룹의 홍콩법인은 주로 투자나 무역, 부동산개발 등 업종을 영위하고 있고 롯데그룹의 홍콩법인들은 특히 비금융지주회사로 분류돼 있다.
금융회사들 역시 앞다퉈 홍콩에 진출했지만 현지인이나 기업 상대 영업이 활발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증권사의 경우 대다수 홍콩법인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줄곧 적자를 냈다.
◇ 선진국, 홍콩 축소 움직임…한국 회사들도 홍콩 떠나나?
홍콩은 전 세계에서 대표적인 조세피난처 중 하나로 꼽힌다. 거주자도 국내소득에만 세금을 부과하고 역외소득에 대해선 과세하지 않는다는 장점 때문에 전 세계 상당수 기업과 기업인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그러나 최근 외국 기업이나 금융기관 사이에서 홍콩을 떠나거나 규모를 축소할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홍콩 최고 빌딩인 ICC빌딩에선 최근 일부 사무실 재임대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곳에 장기 임대로 입주한 유럽계 금융기관들이 홍콩시장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최근 인원 감축이나 부문 축소에 나서자 빈 사무실이 생겼기 때문이다.
안상훈 우리은행 홍콩법인장은 8일 "ICC빌딩에서 국제금융업무를 하는 유럽계 일부 금융기관이 사무실 재임대에 나선 것은 최근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신흥시장에 대한 위험 관리 차원에서 규모를 줄이거나 폐쇄하는 전략을 취하기 위한 전략 중 하나로 해석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최고 갑부 리카싱(李嘉誠) 청쿵그룹이 홍콩·중국의 도소매업체 왓슨 보유 지분을 싱가포르 투자펀드인 테마섹에 400억 달러에 매각, 이익을 실현한 것도 홍콩 전망이 부정적이라는 데 무게를 실어줬다. 지난달에도 홍콩 항만 터미널 지분 매각 결정이 보도되면서 리카싱 회장의 '홍콩 철수설'이 부각됐다.
실제 해외 언론과 투자은행 사이에선 중국 경제에 과도하게 노출된 홍콩이 다음 금융위기의 핵이 될 수 있다는 경고가 잇따른다.
이정호 미래에셋자산운용 홍콩 대표는 "홍콩은 위안화 거래 때문에 많은 자금이 몰려오는 곳"이라며 "작년 10월 기준으로 홍콩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8천270억 위안을 보유하고 있고 은행금융 연결체(SWIFT)의 위안화 지급금의 73.8%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홍콩 정부의 완곡한 시장 정책 때문에 부동산 거래량이 줄었다"며 "이는 홍콩 경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부동산 개발업자들의 수익과 주식 가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홍콩 내 분위기는 한국 기업과 금융회사 홍콩법인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 '선박왕' 권혁 시도상선 회장의 구속과 역외기업의 세금 추적 등 한국 정부의 움직임도 부정적인 요인으로 꼽혔다. 이는 현지 국내 기업들의 영업을 위축시키고 한국 금융기관들과 자금 거래를 피하는 빌미가 됐다고 홍콩 내 한국 회사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은행의 홍콩지점장은 "최근 이곳에선 초저금리로 싸게 돈을 빌릴 수 있지만, 홍콩에 진출한 국내 기업들이 돈을 빌리지 않는다"며 "오히려 중국 등 기업들이 대출 상담을 하러 오는 상황"이라고 언급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삼성증권[016360] 홍콩법인이 지속적인 적자에 시달려 대폭 축소 결정을 내려 충격을 줬다.
또 다른 홍콩법인장은 "투자나 손실 규모 면에서 삼성증권 홍콩법인의 축소 결정은 이목을 집중시킨 사건이었다. 이는 한국 기업들의 시각이 간접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홍콩 이탈의) 신호탄"이라고 언급했다.
삼성증권 홍콩법인에는 20여명 정도가 남아 있고 작년 말 동양증권도 1995년 설립한 홍콩법인 청산 결정을 내렸다. 우리투자증권과 현대증권, 대신증권, 미래에셋증권 등 홍콩법인들도 작년에 모두 적자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