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장혁 '가시' "내가 장난감이었어요?"

순수해서 맹목적인 사랑…성적 판타지로 소비되던 소녀의 역습

떨어지는 꽃잎만 봐도 까르륵 웃음을 터뜨리는 때가 여고생 시절이라고들 한다. 봄내 물씬 풍기는 지금 거리에 나서면 삼삼오오 모여 이렇듯 왁자지껄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는 여고생들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종종 이러한 떠들썩함이 불편한 어른들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조용히 좀 하라"며 타이르기도 하지만, 웬만해서는 그들을 막을 수 없다. 영화 '가시'의 대사처럼 "원래 겁이 없으니까".
 
가시는 한 겁 없는 여고생의 사랑법을 담은 영화다. 그녀의 대담한 사랑이 반복된 학습을 통해 겁을 배워 온 어른들의 세계에 치명타를 안기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생활 수준이 꽤 높은 어느 도시의 한 여고, 인기 많은 체육교사 준기(장혁)는 제자 영은(조보아)의 당돌한 사랑 고백에 당황한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준기에게 겁 없이 달려드는 영은은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설렘을 안겨 준다.

어느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젖은 교복을 입은 영은이 안쓰러웠던 준기는 자기 체육복을 빌려 주는데, 비극의 시작은 이날이었다. 준기는 영은과 거리를 두려 애쓰지만, 영은은 그럴수록 더욱 간절하게 준기를 원한다.


준기 주변의 여성들을 장애물로 여기기 시작한 영은은 만삭인 준기의 아내 서연(선우선)에게 접근하고, 순수해서 맹목적인 영은의 사랑은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치닫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수영장을 배경으로 한 오프닝 시퀀스에서 여고생들의 몸을 관음적인 시선으로 훔쳐본다.

그 시선은 곧 영은에게 집중되고, 이내 카메라는 그녀의 매력을 잡아내는 데 특별한 공을 들인다. 몸에 붙는 셔츠에 짦은 치마를 입은 영은의 모습은 밝은 햇살을 받으며 더욱 빛을 낸다.

이렇듯 이 영화는 극 초반 내내 우리 사회에서 소비되는 여고생들에 대한 성적 판타지를 오롯이 재현해낸다.
 
학교에서 이상한 소문이 도는 것을 알게 된 준기가 영은을 멀리 하기 시작하면서 극의 흐름은 180도 변한다. 이후 영화는 음산한 미장센과 음악 등으로 순수해서 아름다웠던 영은의 모습을 순수해서 두려운 존재로 탈바꿈시킨다.

영화 '가시'의 한 장면
영은을 통해 성적 판타지를 만족시키던 관객들은 이제부터 불편한 감정을 갖기 시작할 것이다. 그 불편함은 다분히 의도된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후 영화는 핏빛으로 물든다. "그땐 다 그래"라며 영은의 감정을 이해하던 준기의 아내 서연은 어느 순간 영은을 경쟁자로 인식해 질투하고 해하려 든다. 학교를 그만 두고 싶다는 남편에게 "적성 따져갈 필요 없으니 우리 아이를 위해 참고 다니라"라고 말하던 그녀 입장에서 영은의 행동은 가족에 대한 위협일 터였다.
 
준기와 소울 메이트임을 자처하는 동료 여교사의 감정도 미묘하다. "남자들은 사랑하지 않아도 여자를 안는다"는 말로 영은에게 가르침을 주려는 그녀는 준기 아내와도 긴장 관계에 놓여 있다.
 
이렇듯 영화는 후반 30여 분 동안 등장인물들의 소유와 욕망, 집착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려 애쓴다. 그 과정에서 영은이 관객에게 묻는다. "내가 장난감이었어요?" "싸게 먹혀서 좋았어요?"라고.
 
이를 통해 영화 가시는 금단을 깬 체육교사와 여제자의 사랑이라는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만족시키는 작품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오히려 초반 그러한 달콤한 환상에 관객들을 시나브로 몰아넣었다가,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성적 대상으로 소비되는 소녀들의 입장을 짚어보자"고 제안하는 모습이다. 극 후반부 피비린내 진동하는 소녀의 역습이 주는 불편함은 여기서 기인하는 것이리라.
 
영화는 준기의 결혼에 우여곡절이 있었다는 점, 영은의 출생에 얽힌 사연의 단서를 살짝 던져 주는 식으로 등장인물들의 전후 삶에 대해 관객들이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를 통해 캐릭터들의 삶은 더욱 긴밀하게 엮여 대물림되고 확대 재생산된다는 인상을 준다. 두 시간짜리 영화 안에 인물들의 삶을 가둬 버리지 않으려 한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청소년 관람불가, 117분 상영, 10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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