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달자 "나는 스스로에게 행복의 왕관을 씌웠다"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신달자 시인

신달자 신달자
젊은 시절, 빨리 늙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외쳐댔습니다. 슬픔 밑에 깔려 허우적대고,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버둥거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여자들로 힘들어 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열다섯 살 연상 유부남과 불행한 연애를 시작하면서, 결혼생활의 참혹한 현실 때문에 우울증을 앓으면서… 삶을 저주하고 죽음을 꿈꿨습니다.

하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을, 힘겹지만 열심히 살아냈습니다. 영영 끝날 것 같지 않던 절망의 터널을 통과하고 이젠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조개의 상처가 진주를 키워내듯,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로 시를 짓는 사람! 언제나 사랑을 꿈꾸지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람, 감수성 짙은 시와 따뜻한 에세이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 신달자 시인을 8월 22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가을에는 시집, 겨울에는 자전적 에세이 출간예정

▶ 건강해 보이세요. 운동을 하시나요?

게을러서 겨우 한다는 것이 동네 걷는 정도인데 걷는다는 것이 사고를 자극해서 잊어버린 것도 자꾸 찾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걷는다는 것은 운동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명상하고 더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 강의를 나가시는데 방학 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주로 미루어 놓았던 것을 하는데 요번에 저는 학교에서 보내주는 성지순례에 다녀왔어요.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을 다니면서 예수님 발자국을 따라가며 감동을 많이 받았고 그 뒤로는 만해축전에 다녀왔어요. 만해축전을 갔다가 창녕, 거창을 다녀왔죠. 거창이 제 고향이거든요.

▶ 거창연극제가 유명하죠.

벌써 올해로 19회째였어요. 하얀 우의를 입고 연극을 보는데 그것이 연극이더라고요.

▶ 저도 밀양연극제에 갔었는데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연극관객이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더라고요.

12개의 나라에서 왔는데 자막이 나오더군요.연극도 우리나라의 상업주의적인 그 속에 뭔가 파고드는 매력이 정말 있는 것이구나 하고 느꼈고 자리를 잘 잡았더라고요.

▶ 바쁜 방학을 보내셨는데 요즘에 쓰시는 책은 없나요?

이번 가을에 시집이 하나 나오고 겨울에는 자전적 에세이가 나올 예정이에요.남편이 77년에 쓰러져서 2000년에 죽었는데 24년을 앓았거든요. 그 과정을 쓴 자전적 에세입니다.

▶ 기대가 되네요.

기대보다는 왜 그런 너덜너덜한 이야기를 하느냐고 말도 좀 듣겠지만 한 부분에서는 모든 똑같은 병을 앓는 환자들이나, 왜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한 지아비 때문에 살아야 했는가, 그리고 어머니라는 이름이 무엇인가, 내 삶에 대한 어떤 반추도 되고... 그래서 쓰고 있습니다.

▶ 너덜너덜하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고 시인이든 예술가든 자기가 겪은 것만큼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삶의 내용에 따라서 어떤 작품이 나오는가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선생님은 시인이시지만 시만 쓰지는 않으셨어요.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는 베스트셀러였잖아요.

그때 20여 분의 감독들이 서로 영화를 하려고 하다가 신성일 선생님이 가져가서 했어요. 그때 영화기획자였는데 박철수 감독을 시키고 신성일 선생님을 만나서 계약도 하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 많은 것을 얻고도 잃었던 ''''물 위를 걷는 여자''''

▶ 영화로도 나오고 TV드라마로도 나왔는데 그 작품을 쓰시게 된 배경이 있다고 들었어요.

제 작품 ''''백치 애인''''을 읽은 어떤 여성이 저를 찾아왔어요.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는 우리가 잘살기 시작한 때에요. 블라우스 하나에 30만원... 이런 것이 그때부터 시작됐죠.그리고 퇴계로가 패션계의 메카로 떠오를 때인데 프랑스에서 공부를 하고 온 어떤 여자가 저를 찾아와서 죽으러 간다고 그러는 거예요.그런데 ''''백치 애인''''을 읽고 이 여자한테는 내 마지막 고백을 하고 갈 수 있겠다 싶어서 저를 찾아왔대요. 밤 11시에 찾아왔는데 제과점 같은 데서 잠깐 만나서 얘기하다가 그로 인해 결국 세 번을 만났어요.

무대는 진주였는데 들어보니까 자기 아버지는 마약중독자고 어머니는 죽었고 언니는 이혼을 해서 집에 와있는데, 그런 와중에 이 아이는 굉장히 민첩하고 똑똑한 아이였나 봐요. 나중에 패션디자이너가 됐는데 서울에 있던 검사 딸이 그곳 진주로 전학을 온 거예요. 그 친구하고 친하게 지내면서 그 아이의 엄마가 이 아이를 데려다가 길러요. 그래서 나중에 서울에 올라와 같은 의상학과를 들어가는데 졸업을 하면서 그 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아이는 결혼을 하고 엄마가 이 아이를 파리로 보내요.

파리에서 공부하고 와서 우리나라 유명한 패션계에 부장도 하고 이러다가 나중에 자기가 개인 레벨을 달고 하면서 돈도 많이 벌고 퇴계로에 10층 건물을 짓는데 마침 그 친구의 남편이 건축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남자와 연애가 되죠. 얘는 늘 자기가 잘되고 돈 벌고 그러면 자기를 돌봐준 이 집에 모든 것을 주는 것만 꿈꾸고 살던 아이인데 결국은 가장 중요한 것을 빼앗게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한양대 정신과에 입원도 하고 그랬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패션의 중심이 될 뉴욕으로 가봐라, 그 남자는 일단 안 된다고 했는데 결국 몇 년 뒤에 죽었어요. 소설에서는 살았다고 했지만 사실은 죽었어요. 눈만 감으면 그 친구가 죽었으면 하는 환상이 떠오른대요. 얘는 너무 괴로우니까 죽은거에요. 처음에는 수기로 썼었는데 수기가 너무 재미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소설가는 아니지만 소설의 형식을 빌려서 써본 거죠. 그런데 이상하게 독자가 많이 있고 해서 시끄러웠었죠.

▶ 돈도 많이 버셨죠?

많이 벌었죠. 그때 가난했었는데 등록금도 내고 빚도 다 갚고 차도 사고 집도 사고 그랬었어요. (웃음)

▶ 등록금이라니요?

제가 만학을 했었어요. 저는 40살에 석사 학위를 받고 50살에 박사학위를 받았어요.처음에 40살에 석사를 들어가면서 첫 등록금은 빌려서 들어갔어요. 그때 남편도 아프고 여러 가지 상황도 나빴거든요.

저로서는 좋은 일이었지만 문학적으로는 손해도 많이 봤습니다.시나 쓰지 TV에 나온다는 둥, 대중작가다 해서 문학상에 거론이 되면 ''''그 사람이 시인이냐? 소설가인 줄 알았는데...'''' 하며 비아냥거리고... 그때는 참 괴로웠어요.하지만, 저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그것으로 그래도 아이들 결혼도 다 시키고 지금은 그 돈이 다 없어졌지만요. (웃음)

그래서 저는 어쨌든 가난을 면했었어요. 그랬는데 그 이후에 교수가 됐잖아요. 월급 나오고 그러니까 살 수 있었고 문학은 대중문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TV엔 절대 안 나가고 산문도 가능하면 안 쓰고 시에 몰입하느라고 몇 년을 고생했지요.

▶ 문단에 그런 게 심한가요?

굉장히 도덕적이에요. 정말 속으로 도덕적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는데 우리나라도 그렇지 않나요? 정치인도 그렇고 이름 좀 있는 사람은 연애도 하면 안 되고 너무 잘 먹고 잘살아도 안 되고... 그것이 어디에 기준이 되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저는 자기 개인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 양심에 내가 열심히 해서 벌고 내 능력껏 사는 것이 가장 기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을 우리가 존경할 수 있어야 해요.

▶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 좀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부도덕한 연애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연애뿐이 아니라 모든 것이 우리나라는 시인이 소설 써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소설가가 시를 써도 그렇고 인정도 안 해주고....

▶ 음악도 옛날에 서울대 성악과 박인수 선생님이 ''''향수'''' 불러가지고 학교에서까지도 난리가 났다는 소리도 들었고 저도 처음에 TV를 하면서 연극계에서는 완전히 이단아 취급을 당했었어요.

제가 그때 TV를 나가고 박사학위를 하면서 대학교수를 꿈꾸고 있을 때인데 광고가 많이 들어왔었어요. 돈도 많이 주고 정말 떨칠 수 없는 매력이었는데 학교 몇 군데에 물어보니까 광고하면 안 되니까 광고하지 말라고 해서 다 놓쳤어요. 그리고 결국 교수도 안 됐어요.억울한 것이기는 해도 하나도 내가 살아온 것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려고요.그때 아주 작은 광고를 하나 했더니 광고한다고 손가락질하던 사람이 나중에 더 큰 광고를 했어요. 그리고 TV에 나간다고 욕하던 사람들이 나중에 보니까 자기들도 나가더라고요. (웃음)

◇ 양심은 자기가 기준이 되어야

신달자2
▶ ''''백치 애인''''이 언제 작품이죠?

88년도 작품인데 70만부 정도 나갔어요. 저에게 있어서 첫 번째 베스트셀러였는데 십만 원짜리 수표를 막 주는데 손이 떨려가지고... (웃음)그래서 제가 딸들과 함께 어머님 묘에 가서 십만 원짜리 수표 석 장을 묻었어요. 저희 어머님이 제가 잘되기를 바라셨는데 못 보시고 돌아가셨거든요. ''''너는 이 세 가지를 명심하라''''는 것도 어머님 이야기예요.

▶ 어머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어머니는 낫 놓고 기억 자도 모르는 여자로 아버지와 결혼했는데 아버지는 형제밖에 없어요. 작은 아버님은 거창에서 국회의원을 하셨고 작은 어머님은 경북여고를 졸업했어요. 당시 경북여고 졸업은 요즘 서울대 졸업한 거나 다름없었죠. 인텔리에다 남편은 국회의원이고 그때는 굉장했었죠. 그런데 우리 어머님은 딸을 7명 낳고 아들을 하나 낳았고 숙모님은 아들을 7명 낳고 딸을 하나 낳았어요. (웃음)그러니까 우리 어머님은 무식한 여자가 들어와서 일만 하는데 죽어라고 딸만 낳고 우리 숙모님은 잘난데다가 아들만 척척 낳았죠. 그 시절에는 아들, 딸이 굉장한 사건이었잖아요.

▶ 몇째셨어요?

저는 다섯째 딸이었어요.우리 어머님은 그 많은 제사를 며칠씩 준비하시곤 했었죠.그때는 북어를 담가도 이틀은 담가서 두드려 해야 하고 일이 많은데, 그 많은 것을 잠도 안자고 혼자서 다 해 놓으면 제사 한 시간 전쯤에 우리 숙모님이 오세요. 와가지고 ''''형님, 이거 너무 짜요.'''' 이런 식이에요. 사춘기 때 정말 숙모님이 너무 미웠어요.

▶ 할머님도 모시고 사셨어요?

네.그래서 우리 어머님이 살다가 생각하신 게 어머니가 딸이 여섯인데 자기 동서 같은 딸을 하나 만들어야 하겠다, 그게 동서에게 원수를 갚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신 거예요. (웃음)그래서 세 가지를 명심하시며 저를 고등학교 때부터 외지로 보냈어요.

▶ 세 가지가 뭐였어요?

첫째, 너는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해라. 왜냐하면, 동서가 학력이 높으니까 어머님은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가 너무 많은 거예요.두 번째, 내가 살아보니 여자도 돈을 벌어야겠더라. 돈도 벌어라. 그리고 세 번째는 그래도 여자는 행복해야 한다. 행복한 여자도 되라. 이것이 59년 저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인데 제 수필집 ''''너는 이 세 가지를 명심해라''''에 나오죠.

▶ 딸이 그렇게 많으셨는데도 왜 굳이 신달자 선생님에게 그런 얘기를 하셨어요?

제가 그때도 오기가 있었어요. 어릴 때부터 좋은 것이 생겨도 언니가 있는데 제가 가지려고 했고 어머님이 보시기에 저 성깔이면 뭔가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신 거죠. 그래서 저를 고등학교 때부터 부산으로 전학을 보내셨어요.그러면서 부산에서 서울로 진학을 했지요.

▶ 유학을 보내신 것인데 형편이 넉넉하셨나 봐요.

부자였어요. 저희 언니 둘은 마산여고 졸업했고 제가 대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망하기 시작했죠.

◇ 인생의 책임감을 다 겪고 이제는 빚이 없는 느낌

▶ 그 당시에 딸을 부산에 보내고 서울에 보내면 말이 많았을 것 같아요.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고 어쨌든 어머님은 ''''너, 마음 크게 먹어라.''''그러셨어요. (웃음)그렇게 해서 저를 지켜봐 오셨는데 제가 대학교 조교가 됐거든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제가 대학교 교수가 되나 보다 그렇게 생각을 하셨는데 제가 대학원 논문도 쓰지 않고 연애에 빠졌지요.

▶ 연애가 뭐기에... (웃음)

그냥 무작정 가서 ''''어머니 나 결혼할래요.'''' 그러니까 ''''누구하고 할래?'''' 물어보지도 않고 따귀를 때리셨어요.나중에 누구라는 것을 알고는 우리 어머니가 겨울이었는데, 마당에 가서 옷을 전부 벗고 머리에서부터 펌프 물을 부어 내렸어요. 자학이죠.그러고 나중에 혼절하셨는데 그때 기억에 머리카락하고 해서 다 얼었던 것 같아요. 겨울에 찬물을 들이부었으니까요.

▶ 그걸 지켜보면서 어떤 심정이셨어요?

물론 견딜 수 없었지만 그냥 어머니를 두고 저는 그 남자를 따라갔지요. (웃음)그런데 그 이후에 그에 대한 제 인생의 책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다 겪었고 그리고 저는 지금 빚이 하나도 없다는 느낌이에요.그 남자가 아파서 24년간 병간호하고 우리 시어머니도 9년간 방에 쓰러져서 누워계셨거든요.

여러 번 도망가고 싶었는데, 저는 도덕적이나 양심으로 도망을 안 간 것이 아니라 내가 만약에 도망을 가면 이게 다 내가 받아야 할 운명인데 내가 도망가면 혹시 내 딸한테로 그 짐이 가면 어떡하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것은 내 몸이 부스러져도 내가 다 받자 마음먹었죠.그렇게 해서 결국 그 사람은 내 가슴속에 안겨서 죽었어요.나는 완벽하게 그 남자와의 ''''인생의 페이지''''를 마지막까지 갔어요.

▶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렇게 결혼을 하셨는데 행복하셨어요?

하루도 행복하지 않았을 거예요. 아마 ''''너 결혼 생활 중에 어느 날이 행복했냐?''''고 그러면 행복한 날을 없었을 거예요. 언제나 명치끝에... 무엇인가가 면도날이 있었지 않았겠어요?

▶ 그때가 몇 살 때죠?

결혼을 한 것이 27살이었는데 남편은 저보다 15살 연상이었어요.

▶ 어머님이 나중에 용서를 하셨나요?

그럼요. 물론 자주 왕래는 안 하셨지만...어머니가 얼마나 무서운 분인가 하면 내가 그렇게 고생을 하고 있을 때도 ''''그래도 제는 앞으로 뭔가를 할 수 있을지 몰라.'''' 그러셨어요.

◇ 하루도 행복한 날이 없었던 결혼생활로 우울증 앓아

▶ 그런 믿음이 있으셨군요.

그래서 73년도에 제가 첫 시집 출판기념회를 했는데 그때 박목월 선생님이 여러분을 모셔서 출판기념회를 해주셨어요. 그때도 제가 살기 어려울 때죠. 그런데 출판기념회를 할 때 ''''내가 평생 어머니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이게 끝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때 전업주부로 집에서 콩나물이나 다듬고 있던 그런 때였거든요.

그래서 제가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제가 이런 시집을 내고 박목월 선생님이 이런 행사를 해주시니까 오겠느냐고 그러니까 집안 식구들과 친구들 세 분을 데리고 왔어요.박목월 선생님과 제 이름이 걸리고 김남조 선생님이 예뻐해 주시는 것을 보시더니 ''''거봐라 제 그냥 안 넘긴다.'''' 이러면서 좋아하셨죠.그런데 그 이후에 더 좋은 모습은 못 보시고 돌아가셨어요.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저는 10년도 넘게 두 환자를 보다가 막바지에 쓰러졌는데 우리 어머님 목소리가 들려요. 실신하는 과정에서 ''''얘야 일어나라, 일어나라.'''' 그런 목소리를 들었어요. 속으로 우리 어머니 못 말리신다, 죽어서도 그 세 가지 때문에 그러시나 보다 했어요. (웃음)그 다음 날 성당에 가서 이제야 그 세 가지를 이루려고 하는데 아무것도 없으니 도와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리고 동대문 시장에 헌책방이 많았는데 그때 새 책 한 권 값으로 너덜너덜한 헌책 10권은 샀어요. 그때 영어책 열권을 사서 이 방, 저 방 영어책을 늘어놓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죠. 대학원 시험을 치르려면 영어 시험이 있었거든요.몇 번 떨어졌지만 마지막에 붙고 그래서 대학원을 시작했죠.

▶ 결혼을 하시고 문학을 접으셨는데 남편께서 반대라도 하셨나요?

제가 등단을 64년에 했는데 남편이 반대한 것도 아닌데 여러 가지로 글을 쓸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결혼 우울증도 걸려있고 모든 것과 담을 쌓고 살고 있었죠.

▶ 남편은 어떤 분이셨어요?

너무 이지적인 사람이었어요. 너무 잘 먹고 잘살아도 안 되는 마르크스주의의 경영학 박사인데 굉장히 매정하고 무섭고 고집 세고 그런 사람이었죠. 왜 그전에는 그런 것이 매력적으로 보였는지 모르겠어요.저하고는 너무나 달라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사람이었어요.

저는 결혼 우울증에 걸려서 병이 들었어요. 밤마다 서랍을 열어서 뭘 찾는데 남편이 뭘 찾느냐고 하면 뭔지는 몰라요. 그런데 자꾸 다니면서 서랍을 열어요. 그러다 어느 날 종로를 나갔어요. 그러다 우연히 박목월 선생님을 만났죠. 박목월 선생님은 우리 숙대 국문과 문학의 밤에 여러 번 오셨기 때문에 저를 잘 아셨어요.

YMCA에 주례가 있어서 오셨는데 요즘도 글을 쓰느냐는 말씀에 문득 내가 찾던 것이 이런 것이었나 보다 싶었어요. 매일 뭘 찾는지도 모르고 몽유병 환자처럼 그러고 있었는데 아 그것이었구나.... 그런데 선생님은 제 몰골을 보시고 제대로 못 사는구나 바로 아셨어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일요일마다 집으로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남편을 이해시키고 와서 시 공부를 해서 다시 시인이 되면 어떻겠냐고 그러셨어요. 정말 은인이시죠.

그래서 그분하고 공부를 하다가 72년도 현대문학에 재등단을 했어요.그래서 73년도에 첫 시집 출판기념회를 한 거예요.그렇다고 왕성한 활동을 한 것은 아닌데 그러다가 남편이 혈압으로 쓰러졌지요.

▶ 생활은 어떻게 유지하셨어요?

여러 가지 얘기가 참 많아요.당분간 남편 월급이 나왔는데 병원비가 그 다섯 배는 더 나왔어요. 그때는 산소호흡기 이런 게 하루에 백만 원하고 그래서 병에 걸리면 다 죽는 것이었는데 제가 심혈을 기울였죠. 그런데 한번 혈압으로 쓰러진 사람은 나중에는 여러 가지 병들이 생기더라고요. 사흘 동안 웃기도 하고 딸꾹질이 일주일도 가고 뇌라는 것이 한번 손상을 받으면 이상한 것들이 생겨요.

▶ 대소변도 못 가리셨겠네요?

처음에는 그랬어요.

▶ 경제적 어려움이 많았겠어요.

경제적으로는 남에게 돈을 빌리기라도 하면 되지만 심적으로는 더 많이 괴로웠어요.

◇ 남편 24년, 시어머님 9년의 병수발을 운명으로 받아들여

▶ 어떻게 견디셨어요?

종교가 없었으면 아마 못 견뎠을 거예요.

▶ 게다가 시어머니까지 쓰러지셨으니....

시어머니는 방안에서 옷을 갈아입으시다가 그냥 주저앉으셨는데 엉덩이며 대퇴부가 다 부서지셨어요. 그래서 병원으로 옮기지도 못했어요. 그래서 그 방이 병원이 되어서 9년을 누워계셨죠. 81세에 쓰러지셔서 9년 동안 일어나보지도 못하시고 91년 가을에 90세의 연세로 돌아가셨어요.

▶ 저 같으면 포기하고 도망갔을 것 같아요.

제 수필에 그런 얘기를 썼어요. ''''내가 내 인생을 포기하는 만큼 내 딸의 어깨가 무거워진다...''''저는 제가 이렇게 살아서 아이들에게 준 짐이 많을 텐데 내가 도망가서 다른 것까지 그 아이들에게, 다시 다른 짐을 만들어 준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이 세상에서 받은 운명이라든가 저주라든가... 뭔가 내가 받아야 할 것이 있으면 내 몸으로 다 받겠다는 그런 주의였죠.

▶ 그 와중에 글을 쓰신 거예요?

그럼요. 그 와중에 석사, 박사도 했어요.영어 때문에 몇 번 떨어지는 수모를 당하면서요. (웃음)

▶ 잠도 못 주무셨겠어요.

저는 몇 년 동안 요를 펴고 잔 적이 없었어요. 그냥 환자 보다가도 쓰러져 자고, 공부하다가도 쓰러져 자고... 이런 식이었죠.

▶ 친정 어머님이 그런 모습을 보셨어요?

잘 안 오시고 남편이 쓰러져서 중환자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 받아서 나중에 돌아가셨는데 남편은 23일간 혼수상태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어요.77년에 쓰러지고 어머니는 5년 더 사시고 돌아가셨죠.

하지만 저는 어머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를 이루었어요.결국은 대학교수가 됐으니까 평생 공부하는 사람이 됐고, 두 번째는 월급을 받으니까 돈을 벌잖아요. 그런데 마지막 행복한 여자가 되라고 했는데 그건 누가 봐도 안 믿어요. (웃음)

제가 우리나라 국어사전을 찾아봤더니 행복은 ''''자기생활에 아주 만족하고 흐뭇한 상태''''라고 되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건 아니다 싶어서 ''''자기 현실을 어떤 현실이든 껴안으면 행복'''' 이라고 책상 앞에 써놨어요. 그렇게 하고 내가 스스로 나에게 행복의 왕관을 씌웠어요. 그럴 수 있잖아요. 자기가 스스로 행복하다고 하면 행복하게 되는 거죠. 행복이라는 건 개인적이어서 내가 동의하면 행복해지는 거니까...저는 제가 동의해서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저는 삼 번까지 이룬 사람이죠. (웃음)

▶ 자녀가 어떻게 되세요?

딸만 셋인데 아들 못 낳아서 억울한 것은 없어요.

◇ 공부, 돈, 행복, 질고 속에 이룬 어머니의 세 가지 바람

▶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제가 아버님을 많이 닮았는데 정말 존경할만한 분이셨어요. 외도도 많이 하셨지만 예술적이셨고 제가 중학교 때 아버지가 너무 부자였어요. 100평 장미 밭이 있고 50년대 일본식 목욕탕이 있고 유성기를 사서 들으시고...

▶ 무슨 일을 하셨어요?

정미소와 제재소, 그리고 다른 사업도 하셨어요.제 생각에는 더 그리울 것도, 가질 것도, 더 기다릴 것도 없는 남자가 있다면 우리 아버지였어요. 모든 걸 다 가졌어요. 여자 많죠. 잘생겼죠. 건강하죠. 돈 많죠. 인기 있죠.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 사무실에 돈을 타러 갔는데 아버지가 늘 잠그던 서랍이 열려있어서 보니까 일기장이 있더라고요. 오늘도 행복, 내일도 행복... 이런 건 줄 알고 몰래 다섯 권의 일기장 중에 네 권을 읽었는데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생각했던 아버지는 없고 늘 외롭다고 말하고 있고, 왜 사람에게는 날개가 없나?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고 싶다... 이런 것도 쓰셨고... 제가 문학에 들어간 동기는 그 아버지의 일기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왜냐하면 문학이라는 것이 결국은 내면읽기잖아요. 아버지 겉모습은 그렇지 않은데 그 안에 도대체 외로움은 왜 생기고 있는 것인가 싶고 그런 것이 저에게 아마 문학 쪽으로 들어가게 했던 것 같아요.

우리도 그렇잖아요.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 해도 채울 수 없는 내면의 빈 공간이 있고... 우리 아버지도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것을 저는 처음 알게 된 거죠. 모든 것을 가지고도 외로운 것이 있는 거구나....그것이 아마 제 문학의 밑바탕이 됐을 거예요.

▶ 아버님은 일찍 돌아가셨나요?

아니요. 어머님 돌아가시고 18년을 더 사셨는데 가난하게 18년을 사셨어요.다 잃으셨죠. 여자도 떠나가고 돈도 잃으시고 자식도 떠나고 그래서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 누가 모셨어요?

말년에 아들도 뉴질랜드로 일 때문에 가고 제 주변에 방을 하나 얻어서 제가 돌봐드렸어요.왜냐면 저는 환자가 두 명 있기 때문에....

▶ 그러면 아버님까지도 모신 거네요? 그래서 제 시에 사성장군이라는 말이 나와요. 이를테면 어머니, 아버지, 시어머니, 남편 넷의 죽음을 보게 되는 거죠.

▶ 이제 겁나는 것은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외로운 것은 지금도 겁나요. (웃음)

▶ 여학생 때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너무나 발랄하고 아름다운 여학생이었죠. 부잣집 딸이었으니까요.50년대부터 쌀밥 먹고 아버지가 서울에서 사다주시는 구두 신고 차이나식 원피스입고... 어머니는 괴로운 것이 많았겠지만 딸이 많았어도 귀하게 자랐어요.저는 호강을 하면서 그렇게 살았고 긍정적으로 살았는데 사람 하나 잘못 만나서 인생이 그렇게 깨졌어요. (웃음)

◇ 아버지의 일기장을 통해 배운 내면의 빈공간이 문학으로 자리 잡아

▶ 문학에 대한 소양은 여학생 때부터 있었나요?

중학교 때부터 글 쓰면 선생님께 칭찬받고, 고등학교 때 전학 가서는 경남백일장에서 일등을 했어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숙대 국문과를 간 거죠.

▶ 연극을 하시려고 하셨다는 말을 들었어요.

중학생 때 국극단 하려고 집에서 가출하려다가 엄마한테 굉장히 혼났어요. 신나게 두드려 맞았죠. (웃음)언니에게만 말하고 언니 옷 훔쳐 입고 그 사람들이 묵는 여관에 앉아 있다가 엄마한테 걸렸는데 아마 우리 엄마 아버지한테 화난 것 그때 제가 다 맞아줬을 거예요. (웃음)

▶ 왜 굳이 대학원에 가려고 하셨어요?

돈이 없어졌거든요. 노인하고 환자, 아이들을 데리고 전세를 어떻게 살겠어요. 집까지 팔게 생겼는데 제가 장사도 해보고 그랬어요. 그런데 세상은 정말 더러운 것들이 있더라고요. (웃음) 어느 날 충격을 받고 물론 장사가 나쁜 건 아니지만 아빠도 이렇게 온전한 인간이 못되고 있는데 엄마가 이렇게 해가지고는 이 아이들을 제대로 건사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아빠가 안 된다면 나라도 고급상품을 만들어보자는 이런 생각을 했죠. 그래도 그때 돈을 빌려서라도 했으니까 이만큼이라도 됐잖아요.늦게라도 공부를 하고 어머님의 세 가지 숙제를 완수하게 한 것은 제가 그 가정에 최대한으로 뼈를 들어부어서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신 것 같아요.

▶ 딸들에게도 3가지 숙제를 주셨나요?

아니요. 제가 잘못 살아온 것을 딸들이 잘 알아요. 제가 직접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서로 암암리에 다 아는 것이고 그때는 어렸으니까요.겨울에 제 자서전적 에세이를 보면 그때 엄마가 이랬구나... 아마 알게 될 거예요.

저는 숨이 꽉 막혀서 이야기를 못 해요. 첫딸을 낳고 희망이 이 아이가 어느 정도 크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야지 했는데 아이가 크니까 엄마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무서워졌어요.

▶ 왜 무서우셨어요?

뭔가 엄마가 그렇게 산다는 것이 그렇더라고요.

▶ 큰딸이 몇 살인가요?


39살인데 아들이 벌써 중학생이에요. 둘째딸도 그렇고 저는 아들을 못 낳았는데 우리 딸들은 아들만 낳았어요. 막내만 아직 미혼인데 지금 둘이 같이 살아요.

▶ 딸을 키우시면서 딸에게 가장 미안했던 것은 무엇이었어요?

제가 봐도 저는 똑똑한 엄마는 아니에요. 여러 가지로 사는 것도 그렇고 돈 계산도 잘 못하고 좀 칠칠이에요. 제가 살아온 역경을 이겨낸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엄마인데 딸들에게 한 것을 봐서는 늘 부족한 엄마가 아닌가 싶어요. 미안하더라고요.

◇ 역경을 이겨낸 대단한 엄마지만 딸들에겐 늘 부족한 엄마

▶ 저도 딸들에게 그렇게 미안하더라고요. 딸들에게 당당한 엄마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워요. 글 쓰는 딸은 없나요?

네, 없어요. 둘째에게는 기대를 좀 했었는데 드라마를 하겠다고 하다가 미국으로 가서 살고 있어요. 딸 둘과 커피도 마시러 다니고 동대문 야간시장도 같이 다니고 친구같이 매일 어울려 다녀요. 물론 때때로 자식이지만 서운할 때도 있어요. 딸이 이 소리 들으면 안 되는데... (웃음)그래도 며느리보다는 더 좋지 않을까 싶네요.

▶ 사위들은 어떠세요?

사위들은 너무 잘 봤어요. 다 잘 생기고 사회적으로도 지위를 다 가지고 있고...

▶ 경우에 따라서는 다르겠지만 딸 가진 엄마들이 며느리 집에 가면 냉장고 문을 마음대로 열어서 먹고 싶은 것을 꺼내먹는데 딸집에 가면 그렇게 눈치가 보인다고 하더라고요.불편하지는 않으세요?

그렇지는 않아요.인간의 관계라는 것은 결국은 자기들이 관계를 이룩해나가야 하는 것이지 너는 내 딸이야 너는 내 엄마야 이렇게 해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서로 만들어 가는 거죠.창의력은 다른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자꾸자꾸 만들고 좀 멀리 있을 때는 멀리 있고 가까이 갈 때는 가까이 있고... 그런 것 같아요.

▶ 앞으로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요?

좋은 글을 쓰면 좋겠어요. 옛날에 젊은 시절에 정말 좋은 시를 쓰다가 나이가 들수록 시가 안 좋아지는 사람이 있고 젊었을 때 우왕좌왕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완숙한 시를 만들어내는 그런 시인들이 있고 그래요. 저는 그 후자가 됐으면 좋겠고 또, 지금 열심히 시를 쓰고 있어요.

내년이 명지전문대학 교수 정년인데 그냥 놀지는 못할 것 같고 여러 가지를 생각 중인데 조그만 공간을 하나 만들어서 여성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그런 일을 해볼까 생각 중이에요.구체적인 것은 없지만 제가 나이를 드니까 하나는 편안해 졌어요. 포기도 빠르고요.그리고 가능한 남에게 좋은 말해주고... 옛날에 그렇게 고생을 하고 환자가 집에 있고 해도 강의를 들으러 갈 때는 옷을 잘 입었어요. 향수도 뿌리고... 왜냐면 내 몸에 늘 뭔가가 있는 것 같아서요.그러면 후배들이 ''''언니는 집에 가면 아줌마 커피 타와. 그러고 있죠?'''' 그랬어요. 제가 고생 죽어라 할 때도 남들이 저 고생하는 것을 잘 몰랐는데 잘한 일 같아요.

딸들이 잘살고 있고 어딘가에 전화를 하면 같이 밥도 먹고 그럴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남자든 여자든 편안하게요. 남편이 죽었을 때 제일 어려웠던 것이 혼자 밥 먹는 것이었어요.남편이 살아있을 때는 1년 동안 간병인이 같이 살았고 늘 대가족으로 살았는데 남편이 가니까 한순간에 다 없어졌어요. 그때 막내는 미국에 있었고 저 혼자였거든요.

혼자 밥을 먹으러 나갔다가 몇 사람만 앉아있어도 도저히 못 들어가겠는 거예요. 그래서 혼자 라면을 끓여 먹고.... 그런 걸 많이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세련돼져서 혼자 아무거나 잘 사먹어요.한 가지 안 되는 것은 혼자 가서 고기는 못 구워 먹겠더라고요. (웃음)

▶ 저에게 오세요. (웃음) 저도 늘 혼자니까요.

옛날에 고생을 많이 해서 자주 앓는데 고기라도 먹어야겠다 싶어서 딸에게 시간 괜찮으냐고 물어보면 시간이 안 된다는 거예요. 딸이 ''''왜?''''하고 물어보면 ''''아니 그냥...'''' 그럼, 그날은 고기 못 먹는 거죠. (웃음)

▶ 네 올 가을 시집, 겨울에 자전적 에세이집 출간 잘 진행되기를 바라고요, 늘 좋은 작품으로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아프지만 진솔한 이야기 고맙습니다.

정리(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이상원)

추천기사

실시간 랭킹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