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은 이 사람을 문화평론가라 부릅니다. 대중음악에서부터 영화까지 온갖 문화현상에 대해서 평론합니다.
30살까지는 사회운동을 열심히 하다가그 이후 책 출판, 인디 밴드 활동, 잡지 일도 하고, 축제도 기획했습니다.
그리고 연세대학교가 운영하는 문화예술 대안학교인 하자작업장 학교에서 교사 일도 하고 기획부장 일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한창 성장통을 앓고 있는 많은 10대 학생들을 만나면서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즐겁게 일하며 놀며 배우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재활용품을 활용한 이상한 악기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21C 풍물패, 생태주의 퍼포먼스 그룹 노리단의 단장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는 문화평론가 김종휘를 만나봅니다.
◇ 아내의 경고 ''''돈 때문에 일을 하는 거라면 그만둬라''''
▶ 실제로 생각만 하고 실천은 못하는데 정말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어요.
저도 반대로 나이를 더 먹었을 때 손 숙 선생님처럼 살았으면 하는 꿈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살아온 것은, 어디 가서 자신 있게 경험했던 열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깊게 바닥까지 갔다 왔다는 말씀을 못 드리겠어요. 욕심이 있으니까 맛만 보면서 살아온 것 같아요.
▶ 자기가 하는 일에서 일탈한다는 것이 마음처럼 쉽지 않아요. 벼르다가 인생을 끝내고 또 끝낼 때쯤이면 너무 늦은 거죠. 그런데 실천을 하신 거잖아요. 책 표지에 이렇게 적혀 있어요. ''그냥 어느 날이었다. 답답했다. 아내와 걸었다.'' 어떻게 해서 아내와 함께 일탈 속으로, 더구나 부부가 함께 걸을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요.
가장 큰 계기는 아내였어요. 2005년 11월에 결혼을 했는데 그 전에 일을 통해서, 대안학교의 하자센터에서 알게 되었는데, 저나 아내나 짧은 인생에 굽이굽이 거쳐서 하자센터에 와서 만났고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했어요. 그런데 아내가 생각하는 결혼은 돈을 많이 벌고 안락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매일 이야기를 나눌 사람, 결혼서약도 그런 내용으로 했는데 그게 결혼이라고 생각하고 했어요. 저는 반대로 결혼하니까 속으로 돈 계산도 하면서 더 일이 많아지는 거예요. 아내가 계속 경고하더라고요. 당신이 즐거워서 일을 하는 거면 일을 해라. 물론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돈 때문에 일이 늘어나는 거라면 하지 말라는 경고가 하나 있었고 결혼을 하고 나서 좀 시간이 지났는데 저도 약간 겁이 났어요.이렇게 몇 십 년 결혼생활을 할 수 있겠구나. 얼굴 마주보고 같이 밥 먹고 저녁에 그날 하루 무슨 일이 있었는지 두런두런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 눈을 마주보는 시간을 늘리는 게 결혼이라고 아내가 이야기했는데 그게 점점 줄어들고 밥 먹는 것은 연애 때보다 더 줄어들더라고요. 그래서 겁이 났어요. 이렇게 더 가다가는 아내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더 늦기 전에 초반에 강한 것을 보여줘야겠다 싶어서 어느 날 ''''가자!'''' 이렇게 된 거예요.
▶ 결혼한 지 얼마만이셨어요?
결혼한 다음 해 4월에 떠나서 5,6개월 정도 걸린 것 같아요.
▶ 한창 신혼 때이셨을 텐데 벌써 겁이 났어요?
결혼 전에 서로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었고 아내가 어떻게 살아갈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 가야겠다, 나한테도 아주 좋은 기회다 하고 간 거죠.하던 일도 차근차근 다 그만두었어요. 저희가 65일이 걸렸는데 얼마 걸리겠다는 계획 없이 그냥 간 거예요. 가다가 질리면 언제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쉬다가 다시 갈 수 있는 곳을 택하다 보니까 국내가 제일 좋겠더라고요.
또 제가 물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물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너무 편안해 지는데 당연히 바다를 생각했고 아내랑 연애할 때 많이 갔던 장소가 홍대 앞 카페인데 이름이 바다에요. 그래서 기타 등등해서 바다를 보면서 걸으면 국토 횡단한 것과는 다르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바닷길로 무조건 걷는다. 그리고 동해부터 남해안, 서해안으로 죽 올라오자, 이 정도가 계획의 전부였어요.출발일자를 일주일 뒤냐, 한 달 뒤냐, 내일 이냐, 이렇게 잡다가 며칠 뒤라고 결론을 내리고 나서 짐도 별로 안 싸고 갔어요.
◇ 하루 30km 강행군 ''''퀵 서비스 배달 가?''''
▶ 처음 가신 곳이 어디였어요?
속초로 갔어요. 고속버스를 타고 속초에 내려서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1박을 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어요.
▶ 하루에 얼마씩 걸으신 거예요?
동해안은 제가 젊은 혈기가 있겠거니 생각하고 또 해안이 죽 뻗어있고 시원하고 망망대해니까 처음 일주일은 하루에 30km이상, 7~8시간씩 걸었어요. 그런데 뒤로 가면 갈수록 아내가 또 경고를 했어요. 당신은 걷는 것도 일처럼 한다고. 중간에 가다가 쉬고 놀고 이러자고 간 건데, 그래서 싸움도 하고 충고도 듣다가 동해안 절반 이후로는 조금씩 속도를 줄였고 딴 짓도 많이 하면서 갔어요.
▶ 딴 짓이란 어떤 건가요?
해안도로를 걷다가 샛길로 빠지는 겁니다. 가다가 표지판을 보거나 지도를 보다가 저기 가면 가까운데 뭐가 있다는데 거기에 갖다 오자 이러는 거죠. 처음에는 지도를 들고 다니다가 동해안 끝나갈 때부터는 여관에 들어가서 하루에 한 번 정도 봤어요. 지도 볼 일이 거의 없더라고요. 해안선은 거의 연결이 되어 있어서 바다 나타나는 것만 보면서 걸으면 문제가 없는데 저는 약간 지도 보는 중독자처럼 매번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하고 잃어버릴까봐 체크하고, 나중에는 이것도 별로 필요가 없겠구나 싶어서 하루에 한 번씩 봤어요.
▶ 길을 잃어버리거나 하지는 않으셨어요?
그런 일은 전혀 없었어요. 중간에 산을 타거나 숲을 들어갈 때 헤매는데 결국 왔다 갔다 하다 보면 결국 어딘가로 나오잖아요. 몇 번 해 보니까 이것 때문에 당황해 할 일도 없고 조급할 이유도 없고 아내 말처럼 하루에 몇 km를 걷는다, 어디까지 간다, 이런 목적이 없는 거니까요. 그래서 조금씩 동해안, 남해안, 서해안으로 가면서 태도가 많이 바뀌었어요. 많이 즐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남해안 가서는 정말 엄청나게 샛길로 빠졌어요. 해안에서 보성 녹차밭까지 내륙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근처에 왔을 때 거기 가자고 하더라고요. 식사도 그런 식이었어요. 정보는 아예 없고요. 돌산도 갔을 때는 내려오다가 빵을 팔더라고요. 막걸리도 있고 식혜도 있고 갓김치랑 있어서 이걸로 먹자고 해서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식사가 되고 그런 식이었죠.
▶ 두 분이 걷다 보면 다투기도 하셨을 텐데, 먹는 거 갖고 다투지는 않으셨어요?(웃음)
싸우기는 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어요. 아내는 맛있게 성실히 먹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저는 깨작깨작 먹으면서 많이 먹지 못하는 편이에요. 먹으면 되지 뭘 고르는 것에 잼병이에요.
싸우기는 했어요. 아내가 왜 매번 나만 고르냐, 너도 골라라. 이런 거 말고는 음식 먹는 거 가지고 싸운 적은 없었는데 지금 먹자, 이따 먹자는 것 때문에 싸운 적은 있어요.저는 좀 걷고 먹자는 거였고 배가 고픈데 먹고 걷자, 그러자고 걷는 건데 당신은 퀵 서비스 배달 가냐, 목적지가 있는 게 아닌데...분명히 그렇게 약속하고 갔지만 제 몸이 이미 길들여져 있어서 저도 모르게 누가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도 하루에 30km는 걸어야지, 점심시간 되었으니까 이 정도까지는 가야지, 이게 너무 많은 거예요.
▶ 그런데 그런 것들이 길을 걸으면서 차츰 버려지던가요?
버려진 거죠. 그리고 이렇게 안 해도 된다는 것을 머리만이 아니라 몸이 조금씩 느끼니까 조금씩 다르게 행동하게 된 것 같아요.
▶ 1차, 2차로 나뉘어져 있던데요?
그것도 인위적인 거예요. 동해안은 2차까지 걸었어요. 한번은 울진에서 돌아왔고 또 한번은 부산까지 가서 걸었는데 그날 걸으면서 정해져요. 여행하면서 느끼는 묘미 중의 하나는 동행인이 있을 때 둘이 마음이 맞아서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를 아는 정서 같은 거예요. 서로 말을 안 해도요. 오늘 갈까, 내일 갈까하고 있는데 아내가 먼저 오늘 갈까? 그러면 집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 고층아파트 34층, 11층, 최종적인 꿈은 1층 흙 집
▶ 그렇게 걷다가 집에 오면 어떤 마음이 들어요?
바다를 보다가 집에 간다는 생각으로 왔는데 아내나 저나 똑같은 경험이, 집으로 돌아온 게 비현실 같은 거예요. 우리가 어제까지 십 며칠씩 바다만 보고 계속 걷고 자고 했는데 집에 오니까 처음에는 다 현실 같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나중에는 집에 있는 게 비현실 같은 거예요. 바다 보면서 걷는 게 더 현실 같고 약간 갑갑증 같은 게 있고요.예전에 바다에서 태어난 사진작가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바다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오랜 시간 바다를 안 보면 우울해진다고 그러더라고요. 이게 그런 건가? 살짝 맛을 봤죠.
▶ 사람에게는 회귀본능이라는 게 있는데 돌아갈 집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정말 다른 것 같아요.
책의 마지막 장이 집이거든요. 아내랑 저랑 같이 살면서 집이라는 게 정말 중요하잖아요. 그 이야기도 많이 나눴고, 우리가 돌아왔을 때 쉴 수 있는 안식처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했고 특히 바닷가에 있는 근사한 집들이 너무 많은데 폐가들, 버려진 집들이더라고요.그래서 집 생각이 많이 났어요.
▶ 버려진 집들은 언젠가 한 번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을 안 해 보셨어요?
하기는 했는데 아내가 갖는 최종적인 꿈은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바로 흙을 밟을 수 있는, 흙이 가까이 있는 1층에서 살자는 거예요. 그리고 동네에 있는 키보다 더 높이 사는 건 사람한테 안 맞는다고 하더라고요.처음에 살던 집은 전셋집이었는데 34층에 한강이 보였어요. 그래서 한강 보면서 경치 죽이네~ 폼도 잡고 아내도 결혼해서 좋다고 했는데 아내가 몸이 반응하더라고요. 시름시름하고 두통이 있었어요. 처음에는 제가 무감각하고 많이 무시했어요. 그러다가 이거 아니구나 싶어서 34층에서 내려온 집이 11층이에요. 아직 땅을 못 밟고 있죠.(웃음) 지금 11층 아파트에 살고 있고 아내가 다음으로 생각하는 집이 흙 있는 집이에요. 걸으면서 그런 집을 너무 많이 봤고 너무 근사해 보였어요.
▶ 65일 동안 걸으셨으면 몇 번 집에 돌아오셨어요?
5번 떠나고 5번 돌아온 거예요.
▶ 마지막은 혼자 가셨다면서요?
4차와 5차를 혼자 갔어요. 왜냐하면 3차에 남해안까지 같이 걸었는데, 1차 동해안 무렵에 아내가 유기견 한 마리를 데려왔어요. 7개월쯤 된 잡종인데 유기견 사이트를 보다가 임시 보호자가 보호시설에 넘겼는데 워낙 유기견이 많으니까 입양을 안 하면 안락사를 시킨다고 공지가 올라간대요. 인터넷에 카운트다운이 공지되는 거죠.그걸 보다가 하루가 지나서 큰일 났다고 갔는데 너무 밀려있어서 아직 안락사가 안됐대요. 그래서 그 개를 데려왔는데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맡기고 가자고 했더니, 버려진 개인데 얼마 있다가 우리가 또 길을 떠나는 거니까 맡기면 개가 또 버려진 거라고 느낄 거라고 해서 개를 데리고 갔어요. 개 이름이 ''''고미''''인데 동해안 2차까지는 함께 데리고 걸었죠.
▶ 7개월짜리가 따라오던가요?
따라왔어요. 제가 좀 무식하고 용감한 주인이었던 거예요. 하루에 30km씩 그렇게 끌고 다니니까 나중에는 안 걸으려고 하더라고요. 비도 많이 오고해서 이건 아니라고 결론을 냈는데 그것 때문에 아내랑 많이 싸웠어요. 아내는 안고 걷고 저는 괜찮다고 걷다가 더 이상 데려갈 수가 없어서 어디다 맡겼어요. 그렇게 3차까지 했을 때 아내가 너무 오래, 자주 맡긴다고 하면서 자기는 집에 있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유기견 한 마리를 더 데려왔어요. 그래서 지금 두 마리랑 살림을 하고 있고 그 사이에 저는 4,5차를 마무리한 거죠.
▶ 처음부터 65일을 정한 것도 아닌데 왜 4,5차를 마무리하셔야 했어요?
서해안을 넘어가고 싶었어요. 남해안에 진도가기 직전까지 아내와 걸었고 진도부터 혼자 걷다가 꺾어지고 싶은 거예요. 계속 가다가 안산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그 근처까지 갔을 때 그때도 똑같은 거죠. 아내도 보고 싶고 전화하면 ''''이제 그만 올라오지?~'''' 그렇게 몇 번 이야기를 하고 올라온 게 끝입니다.
◇ 내 안에 남겨진 것...''''걷는 용기''''와 ''''사람들''''
▶ 65일을 걷는 동안 내 안에 남겨진 것과 버린 것이 있을 것 같아요.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하나는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일을 벌이기 좋아하고 많이 하고 푹 빠지는 편이에요. 그러느라고 몸과 마음이 일이라는 틀에 갇혀서 감성도 그리고 몸의 크고 작은 행동도 정해지고 길들여지는 게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벗어나는 게 머릿속에서는 너무 근사했는데 정작 걸어보니 쉽지 않은 거예요. 어쨌든 벗어나본 걸 내 몸이 맛보았다는 것이 제일 커요. 용기를 가진 거죠. 이제 한 번 더 결심을 하면 내가 하던 일, 길들여진 관계 속에서 벗어날 수 있어, 내 몸이 그걸 할 수 있다는 걸 얻은 겁니다. 대신 일에 대한 태도를 많이 바꾸게 된 것 같아요.
또 하나는 저도 모르게 나중에 혼자 걷다 보니까 무의식중에 자꾸 사람들 얼굴이 떠올라요. 이사람, 저사람... 초반에는 부모님이 떠올랐는데 나중에는 살아오면서 죽을 것처럼 소중하게 간직했던 사람들이 떠오르더라고요. 어떤 순서대로 떠오르는가 하면 행복하게 유지되는 관계나 아쉬운 게 서로 없었던 건 아닌데 미워했거나 다투었거나 거의 결별수준으로 헤어졌던 사람들 위주로 먼저 떠올랐어요.
내 마음에 있던 독한 감정들이 씻겨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이상한 감정이었어요. 기도하거나 집중해서 떠올린 것도 아닌데 20년 전의 사람도 떠오르기도 했거든요. 여행을 하고 자연 속에서 걷다 보니까 다 떠오른 것은 아니지만 다음에 또 가면 다시 다른 사람이 떠오를 것 같아요.(웃음)
▶ 부모님은 왜 떠오르셨을까요?
두 분 다 전쟁 때 이북에서 넘어오신 분들인데 아버님은 병이 드셔서 반신불수가 되셨어요. 제가 막내인데 태어나자마자 그렇게 되셨으니까 저는 건장한 아버지를 보지 못했어요. 위의 형까지는 다 봤다고 하더라고요.제가 봤던 아버지는 병자였는데 제가 20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제가 막내니까 주로 아버지랑 놀았는데도, 많이 사랑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아버지가 이북에서 어떤 청년기를 보냈지? 어떤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난 거지? 무슨 꿈과 좌절이 있었지? 내가 20년간 아버지랑 살면서 한 번도 인터뷰를 해 본적이 없는 거예요.
내가 눈으로 봤던 병이 든 아버지, 나한테 잘해준 아버지를 당연하게 여겼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를 아는 분들의 인터뷰를 무작정 하고 다녔는데 그게 다시 되살아난 거였어요. 그러면서 아버지도 북한에 있을 때 바닷가를 가 봤겠지? 살아계실 때 나와 같이 바다를 본 적은 없는데 아버지가 본 바다는 뭘까? 이런 생각들이 많이 떠올랐고 어머니는 30년을 같이 살았어요. 어머니가 다 돈을 버셨죠.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암에 걸리셨는데 제가 병수발을 6개월 정도 했어요. 그 기간이 떠오르고 제가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살다 보니까 항상 어머니가 사회적으로나 친척들이 모였을 때 우리 막내가 이런 정도는 하고 있어, 이런 돈벌이도 해 등등. 이런 것들을 친척들한테 내놓고 싶으셨을 텐데, 그런 건이 3,4건이 있어도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생기니까 그때까지 속상하게 해 드린 거죠.그러다가 병치레를 하실 때 도리는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때도 모든 일을 그만두고 병원에서 일주일씩 같이 살았는데 바닷가를 걷다 보니까 그 기간에도 어머니와 대화로나 눈빛으로나 미처 교류하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어요. 그런 것들이 떠올랐죠. 그리고 아내가 저랑 결혼할 때 부모님을 못 만났으니까 사진으로만 보고 궁금해 하는 게 많았어요. 그래서 아내랑 같이 걷는 동안에는 밤마다, 밥 먹을 때마다 가족이야기를 제일 많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부모님을 떠올린 거죠.
◇ 청소년에게 날개를! AS까지 확실하게!
도시 안에 세워진 대학학교입니다.하자작업장 학교는 2001년에 세워졌고 그 전에 하자작업장 학교가 세워진 곳이 하자 센터입니다. 그게 1999년 연세대 사회학과 조혜정 교수님과 젊은 문화예술인들 그리고 인문학을 전공하고 계속 관심이 있는 젊은 사람들 이렇게 해서 우리사회에서 한 명의 청소년을 제도학교와 가족의 울타리가 아니더라도 제대로 길러내는 시스템을 고민하다가 하자 센터가 1999년에 세워졌고 그 안에 대안학교가 필요해서 2001년에 하자작업장 학교를 세웠죠.
▶ 그곳에는 어떤 아이들이 옵니까?
처음에 하자작업장 학교를 만들 때에는 굳이 도식화하자면 부모님의 경제적인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서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사회적으로 날개를 달아주지 못하다 보니 이런 청소년들을 찾아서 우리가 확실히 날개를 달아주자, AS까지 제대로 하면서. 이렇게 시작이 되면서 그런 청소년들이 왔었어요.근래에는 그런 게 없어지고 굉장히 다양하게 들어옵니다. 전교 1,2등 하던 아이들도 매년 들어오고 있습니다.
▶ 시험을 봐서 들어가나요?
아닙니다. 서류가 있고 부모님의 의견서도 내야합니다. 서류전형이 있고 인터뷰를 하고 그 다음에 형식은 없지만 프레젠테이션을 시킵니다. 그렇게 해서 뽑고 있습니다.과정은 3년 과정인데 1년 단위로 수료할 수 있게 했어요. 의견을 묻는 거죠. 그 중에는 1년 다니고 교사들이 다시 모여서, 너는 공교육을 다시 가는 게 너한테 진짜 맞는 대안교육인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려서 공교육으로 다시 간 아이도 있고 2년 정도 다니다가 자기는 다시 검정고시 보고 영국에 있는 디자인스쿨이 있는데 거길 알아보겠다고 해서 2년 수료하고 담임선생님이셨던 분이 같이 알아봐주고 추천서를 보내주고 가이드를 해줘서 간 경우도 있고 취업을 한 경우도 있어요.대부분은 국내에서 대학을 가더라고요.
▶ 하자 학교의 선생님으로 계시는 건가요?
하자 센터의 기획부장을 하다가 이번처럼 여행을 가거나 그만 둘 때가 있습니다. 그만뒀을 때 조혜정 교수님이, 네가 하자 센터에서 이것저것 다 해봤는데 직접 아이들과 담임 관계로 한명 한명을 돌본 적은 없지 않았냐고 하시는데 생각해 보니까 없더라고요.그래서 담임을 해 보겠다고 하고 2년 동안 했는데 오히려 배우고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된 점들이 많아요.
▶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기성세대가 10대들을 오해하고 있었구나 하는 부분은 없었어요?
저는 아직 자식을 못 낳았어요. 엄마들의 조기교육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많은 비판을 하는데 저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담임을 맡으면서 아이들을 한 명씩 보니까 우리 사회의 엄마들에 대한 비판과는 별도로 숙명인데 거기에 들어가는 엄마의 속상함, 이런 것들에 대한 이해가 많아진 것도 있고요.
그리고 오해라기보다는 요즘 세대가 많이 달라졌죠. 그 중의 하나가 정보화 사회라고 하잖아요. 예전에는 만화가가 되고 싶다고 하면 주변의 만화가를 찾아가거나 하면서 만화가에 대한 꿈을 키웠는데 지금은 인터넷에 들어가면 동호회나 이런 것들이 무지 많아요.어른들이 보는 9시뉴스를 아이들이 다 보잖아요. 만화가 사이트에 들어가면 좌절한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겠어요. 그러면 청소년들이 나는 꼭 될 거야 라는 뜻을 키우기보다 해도 안 되는 일들이 너무 많구나 하는 것을 정보로서 입력을 해요. 그러니까 예전보다 훨씬 더 무기력해질 수 있죠. 그런 것들을 부모님이 ''''나 때는 배고파가면서 공부 했어'''', ''''등록금만 내줘도 감지덕지 했어'''', ''''방도 있지, 학원 보내주지, 그런데 뭐가 부족해서 안 되는 거야?'''' 그러시거든요.청소년들이 겪는 마음의 몸살이 있는데 성격이 너무 달라져서 그런 부분들이 오해 아닌 오해가 되는 것 같아요.
◇ 스페어가 아닌 내가 누린 복, 내게 주신 기회
▶ 늦둥이 막내라고 하셨는데 어머니가 몇 살 때 낳으셨어요?
42살에 낳으셨는데 66년도니까 저희가 2남 2녀거든요. 바로 위부터 7년, 9년, 11년이에요. 제 위로 셋은 2년씩 차이니까 패를 지어서 자기들끼리 잘 어울렸죠. 위의 누나 둘과 형은 물론 저를 많이 사랑해줬겠지만 농담 삼아 집 안의 여분, 스페어로 자랐다고 해요.
어머니가 장녀, 차녀, 장남까지 키우다 보니 자녀들과 지지고 볶는 것을 3라운드까지 겪으시고 저한테는 약간 방임하시더라고요. 저한테는 공부 잘 해라, 뭐 해라 이런 말씀이 없으셨어요. 누나와 형은 네가 누린 복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저는 반대로 여분이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지금에 와서는 내가 누린 복, 어머니가 나에게 주신 기회라고 생각해요. 이것 하다가 저것 하다가 어떤 강박도 없이,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는 않아도 어머니가 막지 않으셨어요.
딱 한 번 초등학교 때 막으신 것은 있는데, 초등학교 6년 동안 상 받은 게 미술상밖에 없었어요. 그 당시에 어머니는 그게 걱정이 되셨나 봐요.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 미대로 보내라고 하는데 어머니가 하지 말라고 하셔서 어머니의 뜻을 따랐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돈을 못 벌 때였어요. 그때 미술 하라고 할 걸...하시면서 후회를 하셨지만 나머지는 제 위의 형제들이 누리지 못했던 자유나 혹은 실패를 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여지의 울타리가 되어주셨구나 생각하면 두고두고 감사해요.제 유년기는 엉뚱한 일들과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사고도 많이 쳤고요.
▶ 어떤 사고를 치셨어요?
어렸을 때 가장 큰 사고는 동네 친구랑, 그때 우리나라에 ''''재미니''''라는 자동차가 처음 나와서 비쌀 때였어요. 비탈길에 친구 아버지가 항상 세워두세요. 그런데 친구를 꼬셔서 차 키를 갖고 나와서 차에 들어가서 장난을 한 거죠. 사이드 기어를 안 올리셨는지 비탈길이어서 내려가기 시작했어요. ''''어어어~~~'''' 하면서 내려가다가 앞에는 가로로 놓여진 2차선 도로가 있었어요. 우리가 가면 가로지르는 거예요.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해요. 앞이 하얘지는데 차는 계속 천천히 가니까 차에서 내릴 생각은 못하고 결국은 가로질렀는데 마침 지나가는 차가 없었어요.가로질러서 가드레일에 쿵 하고 부딪쳤어요. 친구랑 나랑 내렸죠. 그리고는 무조건 도망갔어요. 동네 공사장에 공사하려고 맨홀을 쌓아둔 데 들어간 거예요. 친구 부모님, 저희 부모님이 이름을 막 부르시는 거죠. 결국 배고프고 졸려서 나왔어요.
◇ ''''애썼다. 너는 나한테 할 만큼 했어! 나 죽어도 회한 갖지마''''
▶ 어머니 병수발을 6개월 동안 하셨다고 했는데 나이 차이 나는 형제들이 안 하시고 김종휘씨가 하게 되셨어요?
제가 20살 초반부터 10여년 가까이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았어요. 누나, 형들은 이미 출가를 했고요. 누님 두 분은 미국에 가 있다가 한 분은 돌아오셨고 형님은 목회자의 길을 가실 때였어요. 암 선고를 받고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을 했으니까 간병인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당시에 사회운동을 하느라고 굉장히 오랜 시간을 집에도 안 들어갔어요. 어머니가 수술을 받고 나서 형과 형수님이 병원에 와서 수발을 들겠다고 하니까 어머니가 반대를 하시는 거예요.
너는 목회 일을 보고 너도 목회 사모 일을 보라고, 일주일에 한번 오라고, 만약 수발하러 오면 다시는 안 본다고 하셨어요. 그 옆에 제가 있었거든요. 결론은 저 밖에 없는 거잖아요.(웃음)그리고 어머니랑 같이 살면서 가끔 그러셨어요. 네가 막내아들이 아니라 막내딸이었으면 좋겠다고요. 그 말에 마음이 짠해지더라고요. 친구가 필요한데 막내아들은 매일 밖에 나가있으니까. 그래서 하던 운동, 단체 등을 이유를 대서 다 접고 수발을 들었죠.6개월을 같이 살고 퇴원하시고 집에서 임종하셨어요.
▶ 6개월 동안 어머니와 나눈 이야기 중에 어떤 게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저는 술에, 담배에, 바깥일에 그렇게 살았어요. 형님까지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셨고 저도 20살 때까지는 잘 다녔는데 그 이후에는 잘 안다녔어요. 어머니는 그게 걸리시는 거죠. 계속 하시는 말씀이 어머니 자신의 간병을 빌미로 와서 성경 3장 읽어라, 찬송 해 봐라, 기도 해 봐라 하시면서 6개월 내내 저를 위해서 시키셨어요. 마지막 임종하시기 한 달 전부터 들었던 이야기는 ''''애썼다'''', ''''너는 나한테 할 만큼 했어'''', ''''회한 같은 거 갖지 마'''' 이런 느낌의 이야기들을 수시로 하셨어요.이 두 가지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제가 어머니에 대해서 다시 느끼게 된 건 암으로 돌아가시는 분들이 대부분 몸이 말라가잖아요. 저희 어머니가 깔끔하신 편이라서 병원에 있을 때도 목욕을 해야 하잖아요. 대소변도 받고 목욕도 시켜 드리고, 저 보고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일주일에 1,2번씩 하는데 나를 낳고 기르시고, 한 때는 아주 탱탱한 몸을 가졌던 여자인데 67살에 돌아가셨는데 그 시점에 나이가 들어서 작아지고 주름이 자글자글해지고, 여성의 몸이 어떤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몸 곳곳을 씻겨드리면서 보게 됐죠.
그때는 무덤덤했던 거 같아요. 일이었으니까 깨끗이 씻겨드려야지, 또 어떨 때는 박박 문지르면 아프다고 하시면서 넘어갔는데 지금에 와서는 어머니의 마지막 몸을 봤다는 게 저도 모르게 엄마의 일생을 봤다는 착각이 약간 들었었어요. 이미지가 안 없어져요.
▶ 65일 동안 걸으면서 총 비용이 얼마나 드셨어요?
장부를 적지는 않았는데 얼추 계산해 보니까 450만원 정도 들어간 거 같아요. 저희는 많이 썼다고 생각하는데 일단 5차례나 왔다 갔다 하면서 대중교통비가 들어갔고, 하루에 2끼 정도 사먹은 것 같아요. 1끼는 간식으로 때우고.그리고 2일 걸러, 3일 걸러 한 번씩 아내와 싸웠거나 의견이 달라서 불편했거나 또 아침에 되면 기분이 좋은데 저녁이 되면 몸이 피곤하거든요. 어쨌든 2,3일에 한 번씩 우리끼리 보상이 필요했어요. 보상은 거나하게 먹는 겁니다.(웃음)회도 먹고 번갈아가면서 먹고 술잔도 기울이고 하면서 돈이 많이 들어갔고 숙소는 처음에는 허름한 여관도 하다가 일주일에 1,2번은 깨끗한 모텔에 가게 되었어요. 그랬더니 대충 그 정도 비용이 나오더라고요.
▶ 일을 그만두시고 그 정도 돈을 쓰고 돌아와서 일자리를 다시 찾아야한다는 불안은 없으셨어요?
불안했죠. 떠나기 전에 했던 일들의 종류를 정리해 보니까 저한테는 다 연관되어 있고 통합되어 있더라고요. 아까도 평론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영화나 기타 등등 전문적으로는 잘 몰라요. 그런데 세상이 다 연관되어 있으니까 그 연결된 세상을 보는 재미를 느끼는 거거든요. 일도 굳이 나눈다면 5,6가지가 되더라고요. 그걸 다 그만두다 보니까 돈도 돈이었지만 이 관계들을 내가 1년 정도 살다가 돌아왔을 때 다 복원이 될까? 하는 걱정이 들었었어요.그런데 길을 떠나고 나서 일을 대하는 내 태도가 바뀌는 것과 거의 비례해서 걱정도 많이 없어졌어요. 지금은 다시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이 많아요.
◇ 아내와 함께 만든 ''''사랑의 서약 5계명''''
▶ 두 분이 결혼하실 때 결혼서약이 화제가 되었는데 어떤 서약이었나요?
5가지였는데 주례사도 따로 없었어요. 신랑 측 친구 한명, 신부 측 친구 한명 그리고 아내와 제가 다 아는 어른 한분, 세 사람이 사회자석에서 축복하는 멘트를 줬어요. 그리고 혼인서약 대신 결혼서약 5가지를 한 거예요. 둘이 같이 만들어요.1번, 매일 아침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하루의 삶에 감사하겠습니다.2번, 매일 밤 별을 보면서 우리와 마음을 나눈 분들을 기억하겠습니다.3번, 부모님께서 살아오신 삶을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그 의견에 귀 기울이겠습니다.4번,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서로의 변화를 축하하면서 관계의 믿음이 더욱 성숙해지도록 잘 보듬어 가겠습니다. 5번, 행복은 상대방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서로 성장을 도와주고 기뻐해 주는 동반자의 삶을 가꾸며 살도록 애쓰겠습니다.이렇게 5개를 읽고 박수 받고 결혼식이 끝났어요. 이제 1년 6개월이 넘어가고 있는데 저는 5개 중에 5전 전패라고 생각하고 아내는 꽤 지키면서 산다고 생각합니다.(웃음)
▶ 왜 전패에요?
''''매일 아침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하루의 삶에 감사하겠습니다.''''가 1번인데 매일 아침 밥상머리를 함께 하면 가능한데 아침 7,8시에 미팅이나 회의가 있으면 못 지키는 거죠. 매일 밤 별을 봐야 하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지난 밤 별을 못 봤다는 게 한 달에 한 번 환기되고 그래요. 그래서 1,2번을 못 지킵니다. 그런데 아내는 습관적으로 되는 것 같아요. 길을 가다가도 저 달 좀 봐...이런 게 많고 여행할 때 저의 초기 태도는 도로가 나오면 저도 모르게 끝점을 봐요. 가야 될 길로 보는 거죠. 그런데 아내는 수시로 땅 밑을 봐요. 이거 봐라, 저거 봐라 하는 이야기를 자주 하고 허리 굽혀서 쭈그리고 앉아서 봐요.
제가 보기에는 생명의 리듬을 가진 사람들이 걷는 자세더라고요. 제가 노리단을 하면서 어린이 단원이 있는데 길들이기 전까지 길을 혼자서 걸어보라고 하면 지그재그로 걷고 걷는 속도도 일정하지 않고 딴 짓하면서 걸어요. 그게 생명이 있는 사람의 걸음인데 학교 가고 군대 다녀오고 기업생활을 하다 보니 직진의 대로를 직선으로 걷는 것, 그게 제가 몇 십 년 길들여진 거죠. 거기에 비하면 아내는 훨씬 생명의 리듬으로 걸을 줄 아는 편인 거죠.
◇ 21세기 풍물패, 악기까지 직접 만들어
▶ ''''일하며 논다'''', ''''일하며 배운다'''' 노리단이라는 건 어떤 모임인가요?
''''일하며 논다'''', ''''일하며 배운다''''가 모토이고 21세기 풍물패라는 소개가 맞습니다. 공연을 하고 교육을 하고 악기나 소리 놀이터의 악기들을 직접 만들어요. 어린이부터 54살 되시는 분까지 30명이 같이 사는데 주식회사에요. 종업원 소유제의 주식회사이면서 대안학교 같은 역할을 하자, 그리고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함께 모여서 살 때 돈도 더 잘 버는 것 같고 서로 배울 수 있는 것 같고 일하면서 놀고 배우는 것들이 가능한 것 같다, 그런 걸 실험하는 공동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지금 공연을 하고 있어요?
사업으로 치면 공연사업, 교육사업, 놀이터 설치사업 3가지를 하고 있습니다.
▶ 사람은 실수, 사고, 사건을 통해서 더 잘 배운다. 사람은 암기는 못해도 학습은 잘 할 수 있다. 사람 사이의 돌봄은 주고받는 게 아니라 순환하는 것이다. 사람의 비약적인 발전은 기대와 부담 속에서 이루어진다. 사람은 연습이 아니라 실전에서 더 잘 된다. 사람 사이의 소통에는 때로는 연출이 필요하다...이런 건 함께 만드신 건가요?
함께 하면서 나이차이도 많고 성별의 차이, 저희 안에는 탈북 청소년들도 있었고 외국인도 있었고, 기획이 있었다면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을 모아서 하자, 그거 하나 밖에 없는데 그러니 오만 가지들이 부딪쳤겠죠. 그 속에서 저희 스스로 배운 거예요.
▶ 악기를 재활용품으로 만드신다고 하셨는데 어떤 것들인가요?
주로 산업자재들입니다. 자동차 바퀴의 휠, 그런 단단한 쇠, 나무 등등 오케스트라처럼 다 소리를 냅니다. 타악기들은 세기와 빠르기, 재료의 음질의 차이가 있는데 저희는 다 공명이 되도록 작업을 해서 다 멜로디가 나와요. 타악기인데 관악기가 되는, 그래서 멜로디가 되는 식이고 모양은 저희가 공장을 하나 세웠어요. 거기서 별의 별 걸 만드는데 폐품도 모아오지만 요즘은 폐철도 안 버려서 중고품을 사 가지고 옵니다. 저희가 가장 최근에 재미있게 만든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만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있는데 거기에 엄청난 고철덩어리가 하늘도 날고 괴상하게 생긴 로봇인데 저런 게 다 악기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일부 만든 것도 있고 그게 또 하나의 계획인 거예요.
◇ 끝나지 않을 ''''아내와 함께 떠날 길''''
▶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앞으로의 계획은 아내와 함께 하는 1년 12달 중에서 내년 넘어가면 1년 중에 한 달을 계산해서 한 달이 노는 날이 되면 너랑 나랑 잘 산거야. 2년 뒤에 두 달이 되면 아주 잘 산거야. 이런 식의 기준은 정해놨고 당분간은 일을 다시 시작했어요. 올 여름 넘어가면서 이 일, 저 일을 다시 하게 될 것 같고 아이도 낳으려고 합니다. 제가 안 낳자는 주의였는데 그것도 바뀌었어요. 조만간 흙집으로 안 가면 또 경고가 들어오기 때문에 빨리 그것도 준비를 해야 합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