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 ''''백기완의 경호대장'''', ''''독일 광부'''', ''''파리 낭인'''', ''''명동의 양장점 샬롱드방의 사장'''' ''''자급자족 공동체 마을 노느메기밭의 농사꾼'''' ''''긴급조치 위반 수배자'''', ''''민주투사'''', ''''민족깡패'''', ''''경복궁 지킴이''''……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지 ''''노동자''''로 불리고 싶어합니다. 땀 흘려 하는 일이 가장 숭고하다고 믿는 사람,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 벌고 나머지는 나누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
그래서 일흔 세 살인 현재도 여전히 현역으로 일하는 사람…… 배추 방동규 씨는 이처럼 진정한 노동자의 모습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온 방동규 씨 모시고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얘기를 7월 6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쌀 두가마니로 입학한 법대생
▶ 백기완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 인생이 바뀌셨다고 하셨는데, 그 이후에 백기완 선생님과 어떤 일들을 하셨나요?
녹화사업도 하고 농촌계몽사업도 했습니다. 물론 공부를 많이 한 친구들은 한글도 가르쳤고, 저는 도랑도 쳐주고 화장실도 새로 만들어주는 등 주로 힘으로 하는 일을 했죠.
▶ 고등학교 졸업하시고 나서 하신 일들인데, 대학은 안 가셨나요?
대학은 홍익대학교를 갔어요. 요즘은 홍익대학교 하면 미대라고 아는데, 당시에 법대를 2년 동안 다니고 수료를 했어요. 무식하니까, 제일 쉬워 보인 게 법과여서 간 거예요.
▶ 혹시 아버님이 법대를 가라고 하셨나요?
아버지는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에요. 일본에 유학 가셔서 법대를 나오셨는데 법대를 나오면 일본 사람들 밑에서 법관하고 못된 짓을 해야 하니까, 현재 오사카(大阪) 공과대학의 전신인 기계과 전문의로 다시 학교를 들어가셨어요. 이곳에 들어가서 기계학을 다시 했습니다.
우리나라를 살리려면 기술이 필요하다, 뭐든지 하려면 과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제가 사실 시험을 보고 대학교를 들어간 게 아니에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홍익대 총장이 항의를 할지 모르겠지만(웃음) 하루는 집에 쌀 두가마니를 들고 누가 왔어요. 당시 전쟁 때 쌀 두가마니면 어마어마한 겁니다. 제가 홍대 2기인데, 1기와 2기가 한꺼번에 학교를 시작하게 된 거죠. 쌀가마니를 들고 오더니 우리학교에 좀 와달라는 거예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역도부를 만드는데 거기에 관계를 좀 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시험도 안 보고 들어가니까 얼마나 신나겠어요? 그러자고 했죠.
그런데 학교에서 왜 안 오냐고 자꾸 통지가 와요. 그때는 홍대가 신촌에 있지 않고 남산에 조그만 아파트 같은 데 있을 때에요. 실감이 안 나서 일단 갔어요. 학교 서무과에 가서 이름을 댔더니 학생증을 주더라고요. 거기에 ''''법과 1학년 방동규''''라고 나와서 학생인 줄 알고 다녔어요. 그래서 기왕에 학생이 되었으니 법관이 되려고 고시공부를 하겠다고 부산 범어사에 가서 3년 동안 있었어요. 그런데 시험은 못 봤어요. 나는 결말을 못 보는 게 팔자인가 봐요.(웃음)결국 절에서 내려왔죠. 아마 내가 그때 시험을 봤으면 9회나 10회 정도였을 거예요.
◇ 가난을 벗기 위해 독일로...권총 그리고 기억상실
▶ 독일은 어떻게 가시게 된 거예요.
아버지가 대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한창 젊은 나이셨을 때 44살에 자결하셨어요. 옛날의 부잣집 아들들은 생각은 높게 갖고 있었지만 현실은 잘 몰랐거든요. 그런데 6.25전쟁이 나서 현실에 뛰어들어 보니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나약해지셨던 거 같아요. 나는 우리 아버지의 죽음을 참 싫어했어요. 그래서 자살하는 사람을 싫어해요.
우리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뼈에 사무치는 게, 어머니가 40이었을 때 5남매를 남겨두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완전히 알거지가 된 상태에서 어머니가 전쟁 통에 행상도 하시고 별 고생을 다 하시면서 우리 5남매를 키우셨어요. 당시에 돌산에 가서 돌도 깨고 그랬는데 그것 갖고는 살기가 힘들었거든요. 어느 날 독일광부를 모집한다고 해서, 가난을 극복하려고 가게 된 거예요.많은 사람들은 중동에도 있었고 중국에도 있었고 구라파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닌 걸 상당히 부러워하는데, 영화를 보면 순탄하게 자란 주인공은 재미가 없잖아요. 하지만 복잡한 영화는 주인공이 그걸 연기하려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잖아요. 나는 힘들어 죽겠는데 다른 사람은 제 인생을 재미나게 봐요. 나는 제주도도 못 가본 사람이에요. 놀러 다녀 보지 않았거든요. 먹고살기 위해서 돌아다닌 거죠. 당시에 외국가기가 얼마나 힘들었어요. 독일 광부 시험을 봐서, 사실 시험도 아는 사람 통해서 간 거예요. 4명이 봤는데 시 쓰는 여성 등 별의별 사람이 다 봤는데 나만 됐어요. 그래서 독일에 가게 됐는데 내가 여태까지 해본 노동 중에 그렇게 심한 노동은 없었어요. 그리고 위험도도 대단하고요.거기에 갔더니 독일 사람들이 너무 위험하다고 미리 겁먹고 걱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전쟁터에서 군인들이 죽는 것보다는 덜 위험하니까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해요. 그 정도에요.어쨌든 거기서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집으로 보내줬어요. 그때 월급이 100불 정도였어요. 그렇게 해서 1년 동안 송금한 걸 가지고 처음 국민주택이 도곡동에 생겼는데 12평짜리 아파트를 살 수 있었어요. 지금 100불이야 얼마 안 되지만 40년 전이면 괜찮았던 거죠.
▶ 맏아들을 독일까지 보내놓고 어머니가 마음이 아프셨겠어요.
그렇죠.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광부 일 같은 게 나오면 TV를 끄셨어요. 그리고 내가 자학하는 습관이 있나 봐요. 위험한 곳을 자원해서 들어가서 일하고, 물론 돈을 더 받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한 때는 낙반사고 때문에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고생한 적도 있어요.
그때 내가 독일로 떠날 때 슬픈 일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총을 맞으셨어요. 둘째 동생 남편이, 그러니까 사위죠. 그 여동생과 이혼을 해야 하는 관계였어요. 요즘 보면 못난 놈들이 이혼을 하게 되면 다시 살게 해 달라고 처갓집에 들어가서 행패부리는 게 가끔 뉴스에도 나잖아요. 그런 거였죠. 군 출신이었는데 군용 총을 갖고 와서 어머니를 2번을 쐈어요. 한 번은 가슴으로 해서 등으로 빠지고 나머지는 목에서 어딘가로 빠져서 돌아가시기 일보직전인 거예요. 그렇게 의식이 없으신데 나는 떠나야 하고 다들 어머니가 죽게 생겼는데 어디 가냐고 하죠. 하지만 어머니가 죽고 사는 건 의사가 해야 하는 일이고 심정만 갖고는 살릴 수가 없잖아요.
나는 정말 가난을 극복해야겠다. 동생이 이혼하고 어머니가 총을 맞고 하는 것도 가난 때문이다.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떠난 거죠.그때 떠날 때 어머니가 의식이 없었는데 병원에서 손을 꽉 잡고 안 놔주시는 거예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겠거니 하고 떠나야 하니까 손을 빼고 김포공항으로 출발을 한 거죠. 그런데 나중에 그날 어머니가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어머니가 살았다고 편지가 왔어요. 그래서 자필로 편지를 써 달라고 했어요.
어머니가 초등학교 선생님도 하셨기 때문에 신문도 읽고 글도 쓰는 분이에요. 어머니가 편지를 썼어요. 다만 총을 맞으셔서 어깨에 힘이 없어서 초등학생처럼 썼는데 문체나 필체가 어머니 글씨체더라고요. 그때부터 내가 독일에 있으면서 술, 담배를 끊고 악착같이 돈을 붙여드렸죠. 독일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한테 별거수당을 주는데, 한 달에 한 번씩 20마르크를 줘요. 독일에는 공창이 있고 프랑스에는 사창이 있잖아요. 공장에 가서 회포를 풀라고 20마르크씩 주는 거예요.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정부에서 인정해 주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것이 사회의 무질서를 많이 해소한답니다. 굉장히 과학적이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심지어 그 돈까지 다 보내드렸어요.그래서 이번에 친구들을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도 있다고 하면, 친구들이 정말로 네 애가 맞느냐고 할 정도로 여자를 멀리하고 그랬어요.(웃음)
▶ 얼마동안 독일에 계셨어요?
3년 동안 있었는데 그 사이에 집안은 많이 안정이 되었죠.그리고 독일에 있었을 때 재미있었던 게, 광부로 와서 독일여자랑 결혼해서 사는 네덜란드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낙반사고 때문에 기억이 없어졌잖아요. 영화에서는 기억이 없어지면 기억 없는 채로 사는데 나는 기억을 잃은 걸 안다고요. 그 기억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거죠. 그래서 기억을 찾으려고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 한 군데만 보고 집착을 한 거예요. 그런데도 기억이 안 나요. 그 네덜란드 사람이 노동판의 반장을 했는데 내 기록을 갖고 매일 찾아왔어요. 서울, 한국, 가족이름을 자꾸 대주는데도 알기는 아는데 나하고는 관계가 없단 말이에요. 결국 대사관에서 문제가 심각하다고 귀국조치를 시키려고 했는데 보름 정도 지나니까 다시 기억이 살아나서 계속 있게 된 거예요. 그래서 그 고마운 사람, 항상 부를 때 반장님이라고만 해서 이름을 몰라요.
내 나이에 크리스마스가 의미가 있겠어요? 그런데 크리스마스는 서양에서 큰 행사니까 카드라도 하나 써서 보내야겠는데 주소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고 알고 있는 건 반장님뿐이라 결국 감사의 표현을 못하고 왔어요. 지금도 그 사람을 기억합니다. 몸도 외소한 사람이었는데 그때 내가 느낀 게, 가난해서 일시적으로 노동하는 사람은 자신도 노동자라고 그래요. 또 옛날에는 학생들이 위장취업을 해서 데모도 유발하고 그랬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자기도 노동했다고 자처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리고 잘못하면 노동자 위에 군림을 하기도 하죠.그런데 이 사람은 평생을 노동할 사람이니까 국적을 떠나서 같은 노동자로서 안타까운 거예요. 일 하다가 낙반사고가 났으니까. 그래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 평생 노동을 하는 사람과 가난해서 일시적으로 노동을 해서 벗어나는 사람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죠.
◇ ''''낭인''''에서 ''''집시''''까지, 아홉 끼까지 굶어봤어
▶ 광부로 가서 아예 독일에 정착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파리는 어떻게 가시게 된 거예요?
광부도 많이 왔지만 간호사들도 많이 왔어요. 간호사들이 젊으니까 서로 짝을 많이 이루었어요. 그래서 캐나다로도 가고 미국으로도 가고 남아있기도 하고 그랬는데, 당시는 외국에 나가기가 힘들 때니까 기왕 외국을 나왔으니 광부 생활만 하고 가는 것보다 조금 더 공부도 할 겸 세상도 넓힐 겸 해서 파리를 택한 거예요. 프랑스어를 한 마디도 못할 때 파리를 갔죠. 사람이 살다 보면 유혹에 빠질 때가 있는데 유혹에 빠지지 않고 나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가, 내 주위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아요. 독일에서도 네덜란드 사람이 있었고.
지금 살아계실 텐데, 나보다는 나이가 아래인 성난희라는 화가가 있었어요. 그분도 홍대를 나와서 파리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죠. 우연히 성난희씨를 만났는데, 공부를 좀 하러 왔다고 했더니 우선 말 배울 때까지 거처가 있어야 한다고 중국집의 접시닦이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성난희씨는 그곳에서 서빙을 하고 나는 부엌에서 접시닦이로 일한 거죠.얼마나 고마워요. 그 분이 귀국해서 개인전도 하고 그랬는데 살기가 힘들어서 한 번 찾아간 적이 있어요. 이상하게 그렇게 고마운 분들이 있어요.그래서 나는 열심히 살기만 하면 된다. 성격도 그렇지만 잔꾀를 부리거나 하는 건 못하게 된 거죠.
▶ 파리에서 고생은 안하셨어요?
고생 많이 했죠. 그것도 만화 같은 이야기인데, 중국집 주인이 한국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이 함경도 사람인데 18살 때 3.1운동 당시에 만세를 부르다가 잡혀서 중국으로 도망을 갔어요. 그러다가 중국에서 파리로 간 거예요. 그런데 모국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거냐 하면 지금 미국이나 일본에 이민을 간 사람들이 말을 더듬고 못 알아듣잖아요. 나는 그게 이해가 안 되는데, 이 사람은 18세에 파리로 가서 67,8세가 되었어요. 그러면 자기 인생의 3분의 2 내지는 4분의 3을 파리에서 한국말 한 마디도 안 하고 살았잖아요.
그런데 프랑스 사람한테 물어보면 프랑스 말이 서투르대요. 외국사람 같다고 해요. 한국말을 더 잘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국어라는 것이 이렇게 대단한 거구나 생각했어요.그리고 그 사람도 노인이니까 그렇게 나라 걱정을 해요. 그냥 말로 걱정하는 게 아니고 자기 가슴을 치고 엉엉 울면서 하는 거예요. 그때 한국은 독재정권 때였으니까.외국에 오래 사는 사람들은 혁신적이고 진보적이라 하더라도 구라파식 사고방식이에요. 나는 구라파식 사고방식이 못마땅해요. 분명히 해야지, 요즘 중도파라는 게 있잖아요. 그건 말장난이지 웃긴다고요.
그래서 언쟁을 하다가 화가 나서 ''''에잇, 이놈의 영감. 다시는 상종 안 해!'''' 그러고 뛰쳐나왔는데 갈 데가 없어요. 좋은 말로 낭인이고 그보다 덜 좋은 말로 노숙자고 나쁜 말로 하면 거지 아닙니까? 그렇게 거리 생활을 한 6개월 정도 했을 거예요.세느 강을 갔는데 세느 강은 흙이 없어요. 전부 돌로 만들어져 있어서 흙이나 풀 같은 곳에 앉으면 엉덩이가 덜 시릴 텐데, 돌에 앉으면 환장을 해요. 한쪽으로 앉았다가 한쪽이 얼면 반대쪽으로 앉고, 종일 서 있는 것도 힘드니까요. 거기서 9끼를 굶어봤어요.독일은 석회질이 많아서 수돗물을 못 먹어요. 하지만 파리는 수돗물을 먹을 수 있어서 지나가면서 분수대의 수돗물만 먹는 거예요. 배가 고프니까. 그런데 9끼가 되니까 배가 안 고파지더라고요. 자동차로 하자면 기름이 다 빠져나간 거지요. 힘이 없어지는 거니까.
▶ 그 정도로 굶으셨으면 중국집 할아버지께 돌아가시지 그러셨어요?
그러게요. 내가 좀 머리가 나빠요.그런데 저쪽에 보니까 집시들이 있는데, 집시들은 집단으로 거지 생활을 해요. 거기에는 아들, 딸들도 있고 연애도 하고 개도 길러요. 슬리핑백을 구석에 놔뒀다가 끼고 자다가 아침에는 거울 조각으로 콧수염도 다듬고 여자들은 화장도 해요.하루는 나한테 오더니 왜 아무것도 안하고 먹지도 않고 여기서 이러고 있느냐고, 혹시 노래 부를 줄 아느냐고 해서 모른다고 했더니, 그럼 악기라도 다룰 줄 아냐고, 그것도 모른다고 그랬죠. 그랬더니 자기들끼리 쑥덕쑥덕 대더니 우리하고 같이 돌아다니면 밥은 먹을 거라고 하겠냐고 물어봐요. 그러겠다고 했죠. 반갑잖아요.
그 사람들은 그냥 달라는 법이 없어요. 우리나라 거지하고 다른 게 우리나라 거지는 그냥 달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뭘 하든 해요. 난리를 치고 봤으니까 수고비를 달라고 하죠. 그거 하고 나서 모자 가지고 돌아야 하는데 저 보고 그걸 하라는 거예요.(웃음)나는 고맙다는 말만 하고 돌면 되니까 했죠. 그러면 기다란 빵을 사서 주면 먹고는 했어요. 어느 날엔가 하염없이 아침에 길을 가는데 이것도 믿어지지 않는 얘기에요. 건물에 한글로 요만하게 글씨가 쓰여 있어요. ''''끝에 층에 올라오면 몇 호실에 배추형,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세느 강에 몇 번을 찾아갔는데 만나지 못했다. 혹시 이리로 지나가다가 이걸 보면 내 방 문 앞에 빨래를 걸어놨는데 양말 속에 열쇠를 두고 다닐 테니까 들어와서 먹고 자고 해라.''''
파리는 집이 8층 건물로 비슷하잖아요. 정문이 있고 뒷문이 있는데 지붕 밑에 있는 뒷문으로 올라갔어요. 소설에서 보면 이런 치사한 작자가 어디 있냐고 할 거잖아요. 그런데 이게 실화에요.박진만이라는 친구인데, 올라갔더니 양말에 열쇠가 있어서 들어갔어요. 그 친구는 잘 사는 편이라 방이 두 칸이에요. 한 칸은 부엌으로 쓰고 있더라고요. 부엌으로 갔더니 아예 목침대를 만들어놨어요. 거기서 샤워하고 빵 먹고 배가 부르니까 자고, 그때부터 세느 강하고는 끝난 거죠.저녁에 그 친구가 들어와서 서로 반갑다고 인사하고 포도주도 마시고 지난 이야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 친구가 나를 취직을 시켜줘서 중국집에 접시도 닦고 심부름도 하고 먹고 살게 되었어요.
◇ 40에 한 결혼, 아내에게 늘 미안해
▶ 얼마 만에 귀국하게 되신 거예요?
4,5년을 있었어요.
▶ 불어를 잘 하셨겠어요.
그때는 쉬운 말은 잘했는데 지금은 다 잊어먹었죠.
▶ 귀국하셔서 양장점도 하셨어요?
확실히 한국에 오니까, 나는 유행을 따르고 옷을 멋있게 입는 걸 좋아합니다. 장사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유행을 모르면 장사를 못합니다. 네가 사장인데, 요즘 흰 바지가 유행이니까 흰바지를 입어라. 흰 운동화를 신고 가면 외국 바이어들이 정말 좋아할 거다. 더운데 꼭 넥타이를 매고 다니냐 등등. 어느 날 갑자기 귀국이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하지만 비행기 표도 없고 모아놓은 돈도 없어서 일단 독일로 가서 그 다음에 알래스카로 가서 일본으로 가서 여기로 왔죠. 그렇게 싼 값으로 연결해서 4번을 갈아탔어요.
그래서 일본에 왔는데 자꾸 사진을 찍어요. 그때가 9월 27일로 확실히 기억하는데, ''''맥시''''라는 게 있어요. 내 오버가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A라인으로 넓게 퍼져서 복숭아 뼈까지 오는데, 짐이 너무 많아서 들고 다니기가 어려워서 입고 왔어요. 머리도 박정희 정권 때인데 치렁치렁 길었고요. 그런데 일본에 오니까 사진을 찍고 난리를 쳐서 왜 그런가 했더니 일본 사람들이 가르마 타서 기름 바르고 넘길 때였죠. 거기에 무심했는데 한국에 와서 그게 문제가 되서 경찰이 와서 뭐라고 하더라고요. 여권을 보여주면 여권이 뭔지 모르는 경찰관들이 많아요. 대단한 사람인 줄 알고 그러시냐고, 그냥 넘어갔어요.
그때가 39살이었는데 40이 다 돼도 장가를 안 간다고, 집도 장만하고 고생도 그만큼 했으면 됐고 장손이니까 아이도 낳고 그래야 되지 않겠냐고 하세요. 우리 집사람한테는 미안한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장가가기가 싫었어요. 구속되고 가정을 갖는 게 싫었다고.그때부터 내가 공동체 사회를 하려고 땅을 보러 다녔는데 어머니가 펄펄 뛰시는 거예요. 이상한 저쪽 사상 같다고, 자꾸 그러다가 잡혀가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일단 장가가서 자손을 퍼트리라고 하시는데, 그게 밀가루지 어머니가 약을 어디서 구하셨겠어요. 장가 안 가면 네 앞에서 이걸 먹고 죽는다고 협박을 하시지 뭐예요.(웃음)어머니가 마음에 드는 여인을 하나 데리고 오셨는데 우리 집사람을 소개를 하신 거예요. 그때부터 집사람이 팔자가 사나워진 거죠. 성악을 하는 여자였는데 결혼하자마자 산에 가서 노느메기 밭 매고 지게도 지고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 후에 형무소 드나들었지, 친구들이 많으니까 마냥 새벽까지 술 먹고 그랬어요.
◇ 전기고문은 고마운 편...매가 제일 힘들었어
▶ 형무소는 왜 가게 되신 거예요?
노느메기 밭이라는 게 순수한 우리말인데, 제사를 지내고 나면 그 먹거리를 똑같이 노나먹는 거예요. 그래서 권세나 지위가 높더라도 식구가 2명이면 2명분만 주고, 아랫사람이라 하더라도 식구가 5사람이면 5사람분만 주고, 공정한 분배의 원칙이죠. 그러니까 우리 사회의 분배가 균등하고 평등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 일종의 원시 공산주의의 장점을 취하신 거군요.
요즘은 그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어머니가 생각하기에는 큰일 날 일을 하고 있거든요. 백기완씨가 하고 있는 출판사 이름이 노나메기에요. 노나메기라는 것은 현대어이고 노나서 김을 매자. 그러니까 공동생산체 같은 의미가 있고 노느메기는 우리의 옛말인데 공동분배의 원칙 같은 것입니다.
▶ 철원에 들어가셔서 그 일을 하셨는데 감옥에는 왜 가신 건가요?
거기서 일을 하는데 찾아오는 분들이 함석헌 선생, 장준하 선생, 백기완 선생 등. 그 전부터도 조금씩 알았고 지금은 다 훌륭한 사람들이 많잖아요. 국회의원도 있고 민주화 운동했던 사람들은 거의 다 드나들었어요. 산골에 우리 집 하나니까 거기서 소리를 지르고 별의별 이야기를 해도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게 정부에 문제가 되어서 긴급조치법 1호로 백기완씨, 장준하씨가 걸려 들어갔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나를 잡아갔는데 서울에서 잡아가지 않고 대구에서 잡아갔어요.이 녀석은 너무 아는 놈이 많으니까 서울은 빠져나가기가 쉽다고 생각했나 봐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대구의 대공분실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무서운 곳이래요. 거기가 박대통령 고향이다 보니까 빨갱이를 잡는데 가장 무서운 곳인데 그곳으로 데리고 갔어요. 그래서 다들 고생했겠지만 나도 상당한 고초를 겪었어요. 그래서 형무소까지 갔다 왔죠.
▶ 김근태 의원을 고문했다는 이근안씨는 어디서 만나신 거예요?
전두환씨가 정권을 잡았을 때 그때 언론문제로, 지금 국회의원을 하는 김태홍씨가 편집거부를 했었어요. ''''월간 말''''지 사건 전인가? 언론문제로 김태홍씨를 피신시켜줬다고 해서 상당히 혼났죠.
▶ 보도지침 사건이죠? 그래서 이근안씨를 만나게 되셨는데 고문도 많이 당하셨겠어요.
고문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때는 가면 고문은 다 당하는 거예요. 전기고문 같은 경우는 박정희 때 잠깐 당했는데 전기고문은 아주 고마운 겁니다. 이런 전기가 아니고 배터리로 하는 거라서 죽지를 않아요. 매달아서 고문하는데 정신만 짜릿하고 기절만 하지 죽지는 않아요. 기절하면 그날 고문은 끝이에요. 그리고 죽을까봐 링겔도 맞혀주고 그랬어요. 그거 당하고 나면 며칠은 호강해요.
그런데 그건 감옥 초보자들, 처음 별 다는 사람들한테 하는 것이고 오래된 사람들한테는 전기고문 안 해요. 그날 잠깐 고생하면 끝나는 거니까요. 그 후에는 매로 계속 때리는 거, 심지어는 책상을 혀로 청소를 해요. 그러면 혀가 갈라져서 피가 나요. 침이 많은 것 같아도 금세 마르고 침이 안 나와요. 내 경우는 매가 제일 힘들더라고요. 약골들은 한두 대 때리면 기절을 하는데, 계속 아프기만 하고 기절을 해야 끝나는데 기절이 안 되니까요.
그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예전에 북에서 내려온 김신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15분 만에 기절을 했다고 그래요. 이 사람이 특수훈련을 받은 사람인데도 말이죠. 나는 파리에 있었을 때니까 이 사건을 몰랐어요. 그런데 이 놈은 어떻게 된 게 30분이 됐는데도 끄떡을 안 하느냐고, 이런 놈 처음 봤다는 거예요.그리고 홀랑 벗겨놓으니까 몸 좋다고, 때리기 좋다는 거겠죠. 명문 대학생들이 데모 몇 번 했다고 들어와도 새 다리 같은 걸 어디를 때리겠어요? 따귀만 때려도 기절하는데.어쨌든 내가 기절을 했어요. 깨어났더니 아랫도리가 끈끈하더라고요. 그래서 피가 흐른 줄 알고 만져봤더니 대변이에요. 맞아서 똥 싼다는 얘기가 항문의 괄약근이 풀어져서 안에 있는 것들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게 일주일 이상을 가요. 먹은 물도 계속 나와요.
▶ 후유증은 없으신가요?
두 달 동안 집에서 대소변을 집사람이 해결해 주었어요. 비싼 애완견은 병도 잘 걸리고 약해요. 그런데 잡견들은 잘 안 죽잖아요.(웃음) 내가 그 과라서 금세 회복이 됐어요. 그런데 지금도 그때 다친 허리 때문에 하체운동을 상체운동보다 심하게 못 합니다.
◇ 시대의 굴곡에 사라진 이상향 ''''노느메기''''
▶ 노느메기 밭 공동체는 실패하신 건가요?
실패했어요. 집사람이 큰 아이를 임신 중이었는데 형무소에서 나오니까 처갓집에 가 있다가 아이를 낳았대요. 그런데 내가 나올 때까지 이름을 안 짓는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놈아, 내가 네 애비다.'''' 그랬더니 방글방글 웃어요. 그래서 방그레로 짓자고 해서 방그레가 됐죠. 둘째딸을 낳았는데 이왕이면 같은 항렬로 해야겠는데 웃는 항렬로 하려니까 아리송해요. 가만히 생각하니까 방시레도 웃는 항렬이고 ''''레''짜가 끝에 맞고 해서 방시레가 됐어요.(웃음)
형무소를 나왔는데 철원 쪽이 간첩 루트라고 해요. 그리고 박정권 때는 독가촌은 없었어요. 사실 독가는 한 집이니까 촌이 되겠어요?그때 용어는 독가촌이라고 해서 산골에 집하나 있는 것은 다 폐쇄를 시켰어요. 간첩이 거기 드나들면서 나쁜 짓을 한다고 해서요. 그래서 우리 집을 헐었어요.내가 그걸 허허벌판에서 흙벽돌로 고생고생 해 가면서 지은 건데 그걸 헐고 문짝은 동네 사람이 다 떼어가고, 또 동네 사람들이 빨갱이다, 간첩이다 해서 간첩죄니까 생전에 못 나온다고 생각해서 자기들 마음대로 한 거죠.
그래서 그걸 다시 살리려고 하니까 돈도 너무 많이 들고 좌절감도 있었고 또 동네에서 간첩이라고 하는 바람에 동네를 지나다닐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나하고 같이 있던 친구한테 맡기고 갔는데 그 친구도 나중에 흐지부지 된 거죠.
▶ 그렇게 해서 철수를 하시게 된 건데, 땅은 어떻게 된 거예요?
땅은 문서까지 받았어요. 생전 처음 본 사람인데 저한테 땅을 줬어요.최재돈이라는 분인데 나보다는 선배죠. 거기가 3.8선 지구니까 낮에는 국군이 점령하고 밤에는 인민군이 들어오는 지구에요. 그런데 이 양반이 일제시대 때 일본 경찰을 죽였어요. 자기 아버지를 괄시한다고 분해서 때려죽여서 일본으로 도망을 갔는데 일본 경찰을 죽인 사람이라고 해서 만주에서 독립군 심부름으로 끌어가서 어쩔 수 없이 독립군이 된 거예요.
이 사람이 문맹자인데 해방이 되고 나서 오니까 이북에서는 영웅이 돼서 인민위원장이 되었어요. 그런데 6.25 전쟁 통에 국군이 들어가니까 사형감이잖아요. 그래서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이 사촌인데 국군 장교가 돼서 와가지고 보니까 자기 형이라서 살려준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어느 날 밤에 또 인민군이 점령했어요. 그러니 또 반동분자가 되고. 죽음을 몇 번 겪은 사람이 돼서 이제 세상을 해탈했어요. 그래서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자네, 아우 삼세.'''' 그러더니 그 땅을 준 거예요. 그냥 쓰라고 하면 어떡하느냐고 내가 그랬더니, 그럼 나가자고 하더니 계약서를 대서방에서 써서 인감도장을 찍어서 나한테 준 거예요. 그래서 거기 들어가서 일을 한 거죠.
▶ 그 땅은 그 분한테 다시 간 건가요?
그 땅이 내 땅이 될 줄 알았는데 이북에서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국방부 관할이래요. 그래서 나중에 알아보니까 두 사람 명의로 바뀌었어요. 자기들끼리 어떻게 했겠죠.
◇ 도전! 미스터 코리아, 실버에게 희망을
▶ 따님들은 몇 살이에요?
34살, 32살입니다. 둘 다 아직 결혼은 안 했어요.
▶ 어떤 일을 하고 계세요?
큰 아이는 지금 중국에서 대학교 교수를 하고 있는데 중국에서 홍일점이에요. 교환교수는 중국에서 받아줘도 중국 돈을 받으면서 정식 공무원으로 취직한 교수는 중국에서 처음입니다. 그리고 막내는 아버지 핏줄을 이어받아서 그런지 디자인을 했는데 영세업체들이 많아서 월급을 못 받고 하다가 지금은 중국어 해설사를 하고 있어요.
▶ 따님 두 분 다 중국하고 인연이 있으시네요.
제가 중국에도 가서 몇 년 살았어요. 다른 사람의 회사 사장 노릇을 했어요. 그때 이 아이들이 중국에서 학교를 대학원까지 나오고 해서 그런 것 같아요.
▶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들려주셨는데,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글쎄요. 특별히 내가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요즘에는 자꾸 늘어만 가는 노인들한테 건강하고 용감하게 사는 일에 보탬이 될까 그러고 있습니다.늙었다고 꿈을 버린다든지, 늙었다고 일을 안 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죽어가는 마당에 소극적인 것 같아서 죽는 날까지는 적극적으로 살자, 그런 모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서 내년에는 꼭 미스터 코리아에 나가서 내 몸을 한 번 보여주려고 합니다.
◇ 초심은 꿈을 지키는 것...그런 인생이 귀중해
▶ 인생의 소중한 가치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런 건 철학자가 교수나 인생을 훌륭하게 사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이야기인데, 저한테는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어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좌절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변질되는 사람들이 많아요. 정치적인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특히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들이 어떻게 보면 높은 자리에 취직하기 위해서 민주화 운동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심지어는 박 정권을 타도하겠다고 고생했던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 밑에서 딴 걸 한다든가, 그나마도 못 해서 줄을 서서 난리를 친다든가, 그런 걸 보면 백기완씨처럼 변절되지 않는 사람, 초심을 버리지 않는 건 꿈을 버리지 않는 거겠죠. 그런 인생이 귀중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소위 3대 구라라고 하셨는데 황석영 선생님, 백기완 선생님, 유홍준 선생님, 방동규 선생님 중에서 누가 최고의 구라 같으세요?(웃음)
나한테는 별 게 아닌데, 이 이야기는 황석영씨가 만든 이야기에요. 그런데 이 사람이 남을 올려놓고 나도 이 사람하고 친하다, 이래야지 더 올라가니까 그래서 이런 풍조가 생기지 않았나 생각해요. 내가 보기에는 황석영씨는 말을 잘 하는 사람이고 백기완씨도 질은 다르지만 말을 잘 하는 사람이고 유홍준이라는 후배도 아주 말을 잘 합니다. 그리고 전라도 쪽으로는 김태홍씨, 말이 아주 술안주로는 최고입니다. 저 밑으로 더 내려가면 목포에 박화성 선생의 아들인 천승세라는 소설가가 있어요. 이 사람도 상당히 성능이 좋습니다. 이 세상에 라디오 성능이 좋은 사람이 많아요. 나를 굳이 콕 집은 건, 세고 말도 잘 하고 나하고 가깝다고 해서 만든 거지, 내가 거기에 낄 자격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