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할머니들 살아있는 박물관이자 거리의 선생님

윤미향 정대협(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

윤미향
매주 수요일 낮 12시 서울시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는 어김없이 ''''종군 위안부 할머니의 명예회복''''과 ''''일본의 사죄,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외침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지난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전 일본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시작한 수요 시위는 이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 시위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숱한 위안부 할머니들께서 애끓는 한을 머금고 돌아가셨습니다.

이 한가운데에 실무자 출신으로 92년부터 15년 동안 한결같이 20대와 30대 청춘을 다 보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윤미향 정대협 상임대표.

지난 91년,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 이후 봇물처럼 터져 나온 전쟁 성노예 증언을 기록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고 한밤중이든 꼭두새벽이든 할머니께서 편찮다는 소식이라도 들리면 바로 달려 나가서 돌봐드린 사람,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과 한마디 듣지 못한 채 한 많은 삶을 마치고 운명하는 순간도 늘 옆에서 지켜온 사람.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을 전공했지만 바로 이것이 사회목회라 말하는 윤미향 정대협 상임대표를 6월 25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곧 통과될 희망으로 바라보는 ''''위안부 결의안''''

▶ 개량한복이 너무 예쁘게 잘 어울리고, 참 고우시네요. 먼저 축하드릴 것이 저번에 제3회 ''''이우정평화상''''을 수상하셨죠?

죄송스럽게 제가 수상을 했는데 여전히 그 이야기만 나오면 부끄러워요.이우정 선생님은 살아 생전부터 제가 워낙 존경했던 분이고, 또 그분의 삶이 결혼도 안 하시고 오로지, 그야말로 민주화와 이 땅의 통일과 여성의 인권과 평화를 위해서 사셨던 분이세요.특히 여성의 정치지도력이라든가 이런 문제까지, 제가 감히 나갈 수 없는 부분까지 진출하셔서 참 선구자적인 삶을 사셨는데 그 상을 제가 받았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힘도 나지만 또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그렇습니다.

▶ 제가 생각할 때는 이우정 선생님이 굉장히 기뻐하실 것 같아요. 정말 상 잘 탔다 하시면서 지금 윤미향 씨가 하고 있는 일에 큰 박수와 격려를 보내주실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먼저, 제일 중요한 것이 일본계 미국하원의원인 마이크 혼다(Mike Honda)의 ''''위안부 결의안''''이 이제 곧 통과가 되겠죠?

그동안 계속 시도를 했었어요. 워싱턴이라든가, 뉴욕이라든가, 미국의 한인 동포사회 뿐만 아니라 미국의 여성단체, 시민단체, 인권단체들이 모두 함께 이 결의안의 빠른 채택을 위해 애썼습니다. 5월에 아베 총리가 미국을 방문할 때도 추진하려고 시도했었는데 그것도 안됐고.... 그런데 6월에 들어와서 굉장히 긍정적으로 여론이 형성되고 있어요.

특별히 아베 총리가 미국을 방문해서 부시 앞에서 사과 아닌 사과 발언을 한 것이라든가, 강제동원을 부인한 거라든가, 이런 것이 미국사회에 오히려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는 그런 계기가 되어서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난 거죠.찬동하는 국회의원들의 수가 이미 지난주로 140명이 넘어섰고, 언론에도 6월 26일에 채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도 미국 하원의 외교원장이 ''''할 것이다. 그게 내 책임이다.'''' 라고 직접 발언을 했기 때문에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 그동안 몇 번은 통과가 되지 못했는데 이번이 몇 번째죠?

여러 차례 했었죠. 네 번 시도를 했었는데 다 안됐고 이번이 다섯 번째인 셈이죠.

▶ 그동안 일본의 로비가 엄청났다고 들었어요.

네, 그렇습니다. 일본의 위안부 문제가 다뤄질 때마다 일본은 로비를 굉장히 많이 했어요.UN이든, ILO(theInternationalLaborOrganization:국제 노동 기구)든, 아니면 여성 관련한 국제회의든, 위안부 문제가 다뤄질 것 같다고 판단되면 저희보다 먼저 일본대표단이 와 있었어요. 와서 식사를 대접한다든가 선물을 하면서요.아직도 그런 로비가 국제사회에서 통용이 되고 있죠. 그래서 굉장히 저지를 해왔었는데 일본의 로비가 비열했다는 것이 이번에 미국 하원의 결의안 채택을 앞두고 나온 광고도 그렇고... 작년에는 거물급 로비스트를 동원해서 로비를 했는데 한 유력한 기관지에 공식적으로 나온 것에 의하면 미국 하원의 한 의원에게 한국 돈으로 월 6천만 원에 해당하는 돈을 지급하면서 결의안 채택을 저지하게끔 했어요.올해, 사실 저희는 그 광고가 나오자마자 결의안 채택되겠구나 생각했어요.이렇게 일본이 도와주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 저는 그것을 보고 굉장히 속이 상하던데요?

저희는 워낙 그런 일들을 많이 겪어서 딱 보면 우리에게 좋게 작용할지 안 좋게 작용할 지가 딱 보이는데 사실은 광고소식을 듣자마자 이것은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왜냐하면 미국의 하원의원들을 위안부 문제 결의안에 대거 참여하게 만든 계기가 아베총리가 위안부문제에 강제 동원한 자료가 없다며 일종의 국가 책임을 부인하고, 그 발언을 했을 때 미국사회의 여론이 굉장히 우리 쪽으로 돌아섰어요.

어떻게 총리가 저런 말을 할 수 있나, 굉장히 심각하다, 역사인식이 굉장히 중요한데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본사회가 우려할 점이 크다... 그때 찬동하는 국회의원들이 몇 십 명 늘었어요.

이번에 신문광고를 낸 사람들은 45명의 정치인들과 교수들, 평론가들, 등등이었어요. 그동안에 사실은 망언을 했던 정치가들 중심으로 교수들이라든가 언론인들이라든가 기사가 있었는데 우리에겐 충격이죠. 일본사회가 얼마나 많이, 그리고 넓게, 우익화가 퍼져있는가를 드러낸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워싱턴포스트지에 그 광고를 내면서 역시 ''''위안부문제에 국가가 강제동원하지 않았다, 합법적인 상태에서 매춘행위를 했다, 오히려 위안부들이 군인이나 장교보다 돈을 더 많이 벌었다, 그러니까 일본군 성 노예라고 표현한 것은 사실 왜곡이다,...'''' 뭐 아주 말도 안 되는 소리였죠. 왜냐하면 그동안에 UN 인권위원회라든가 또, 여성차별철폐위원회라든가, 국제법률가 협회라든가,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라든가 등등해서 계속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이것은 강제 동원이었고, 성 노예였고,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이미 판단을 내렸거든요.

그리고 93년에 일본의 ''''고노 담화''''라고 있습니다. 그때도 자민당 정권시절이었는데 고노 내각관방장관이 그 자료들을 입증하는 많은 문서를 발표하면서 일본군 위안부제도에 군의 강제성이 개입되었다고 발표를 했거든요. 그러니까 이미 다 알고 있어요. 사실 저는 유치원생들도 다 알고 있다고 봐요. 그런데 그런 사실을 정치가들이, 그것도 아주 미국사람들이 많이 보는 신문에다 대문짝만하게 냈기 때문에 그건 미국시민들, 특히 미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리더계층들이 보면 이건 말도 아니라고 생각하겠구나 싶었어요.

◇ 돈과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역사의 진정성

▶ 저는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그렇게 로비하고, 광고 내고, 엄청나게 쓰는 돈을 사죄하는 것에 썼더라면 오히려 국제사회에서도 더 인정받고 그러지 않았을까....

할머니들이 하시는 말씀이 ''''왜 저 사람들이 돈 들여가며 망신을 떠나...'''' 그러 얘기를 하시거든요. 그 사람들에겐 결국 돈이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일본사회에서 범죄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정말 어렵구나.... 천왕이라는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그 존재가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일본 국민들에겐 용납되지 않는구나.....

▶ 아니 종전 때 이미 죄 저질렀다고 다 얘기했잖아요.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부인하고 싶은 거죠.천왕은 이미 엎드려서 전 세계에 잘못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국민들이, 특히 정치가들이 부인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전장범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뭔가 배상을 한다고 하면 그건 법적인 책임을 지고 범죄를 인정하는 것이니까 가장 기본적인 것은 하지 않고 더 많은 돈을 다른 데 쓰고 있는 거죠.참 안타까워요. 그렇게 하면서 일본국민 전체를 너무 부끄럽게 만드는 나라, 정부가 일본이 아닌가 싶어요.

▶ 마이크 혼다 의원도 일본계인데....

일본계 2세라고 하는데 그분도 말하자면 전쟁을 경험한 세대예요. 그러면서도 오히려 역사문제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평화문제에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하원의원이 되기 전에 캘리포니아 주 의회 의원으로 있으면서 98년에 캘리포니아 주 의회에서 위안부결의안을 이끌어냈던 아주 중요한 분이십니다.

그 스스로 일본계이면서도 오히려 일본의 역사를 올바르게 청산하는 것이 자기의 할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죠. 정말 그런 분들이 있기 때문에 지금 그나마 일본이 일면의 양심이 조금이라도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요.

▶ 통과가 되면 어떤 효과가 있는 거죠?

사실 그동안 일본이 아시아 나라들에 대해서 해 왔던 태도는 거의 무시였어요. 고이즈미 총리 시절에도 야스쿠니 신사참배로 계속 아시아와 일본과의 갈등을 조장해왔잖아요. 그때마다 왜 하느냐고 항의를 하면 정말 들은 척도 안 하고, 미․일동맹관계만 중요시 여겨 왔고 그것만 강조해왔죠.

저희가 보기에 국회에서의 결의안이라는 것이 어떤 사법적인 권리나 의무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이 중요시하는 미․일 관계에 있어서 미국 하원에서 이러한 결의안을 채택한다는 것은 일본이 아시아 나라들에게 했던 것처럼 무시만 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죠.

또, 미국의회결의안이라는 것이 국제사회에서 가지고 있는 힘이 굉장히 크다 라고 보고 있어요. 그동안 UN에서도 그렇고 이런 반대와 거부를 해왔는데도 불구하고 미국 의회의 결의안이 여러 나라로 퍼지고 있거든요. 캐나다나 호주의 의회에서도 결의안 채택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고, 이제 앞으로 우리가 유럽에도 만들 겁니다. (웃음)

▶ 호주의 얀 오헤른 할머니는 어떻게 해서 증언을 하신 거예요?

참 놀라운 일인데요. 저희는 처음 운동을 시작할 때 우리의 운동이 이렇게 세계적으로 퍼져 나갈 것이라고 생각을 못했어요. 또 세계적으로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것이라든가 이런 것까지 생각을 못했죠. 왜냐하면 우리문제 해결하기도 너무 바쁘고 급했으니까요.

오헤른 할머니가 언론사들 앞에서 했던 이야기가 ''''전쟁이 끝나고 나서, 물론 내 남편은 내가 일본군 위안부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결혼을 했다. 그렇지만 내 자식들에게는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내 주변과 사회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였어요. 단지 그 할머니는 어릴 때부터 수녀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돌아와서 신부님께 이런 몸으로 수녀가 될 수 있겠는지를 물었고, 신부님은 그냥 신도로 남으라고 얘기했데요. 그러면서 크게 상처를 입으셨죠.

그분이 그림을 하나 그린 것이 있는데 성당이 하나 있고, 그 밑 땅속에 굴이 하나 있고, 한 여자아이가 옆으로 누워있는 모습을 자기 자신으로 표현을 했더라고요. 굉장히 오래전에 그리셨는데 가슴 아픈 얘기죠. 자기도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땅속에 묻었다는 거죠.

91년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김학순 할머님이 증언을 하셨어요. 한국뿐만이 아니라 일본을 비롯한 세계 매체에 알려졌죠. 그걸 보시고 용기를 얻어 가족에게 얘기도 할 수 있었고, 한국할머니가 자신에게 용기를 줬다고 고백을 하시더라고요.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같은 피해자들 끼리 만이 느낄 수 있는 언어들, 용기들... 그건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 올해 오헤른 할머님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현재 85세예요. 혈액이 응고되는 병이 있으셔서 건강하지 못하세요.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는데 그 할머니가 지난 2월에 열린 미국 하원의 청문회에 참석을 하셨어요. 그때 사실 백인 할머니가 증언을 했다고 해서 우리 언론에 많이 공개가 됐죠. 그 할머니가 가실 때 따님이 건강이 안 좋다고 반대를 했어요. 그런데 본인이 가신다고 한 거예요.

그 이유가 ''''그동안에 17년이 넘게 아시아에서 나하고 같은 경험을 한 똑같은 아픔을 가진 여성들이 그렇게 길거리에서 데모를 하고 그랬는데도 일본이 저렇게 변하지를 않고 미국도 그동안에 관심도 없었다, 나는 백인이니까 백인인 내가 얘기를 하면 백인사회가 좀 움직여서 저 아시아여성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말씀을 하시면서 가기로 결심을 하셨대요.

◇ 용기에서 희망으로 이어지는 인권 릴레이

▶ 실질적으로 도움이 됐잖아요.

그렇죠. 일본이 그동안 위안부문제를 한․일간의 문제고 아시아와 일본과의 문제인데 왜 자꾸 미국이 관여를 하느냐고 했거든요. 그런데 완전히 그것을 엎어놓은 것이죠. 설마 백인 여성이 끌려갔을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던 것이고, 그 여성이 지금 호주에 살고 있었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이고.... 그것이 호주 사회를 불러일으켰고, 백인 사회를 불러일으키고, 네덜란드인이니까 네덜란드도 그렇고....

▶ 그 할머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사셨잖아요. 우리들의 할머님들은 거의가 기가 막힌 인생을 살아오셨기 때문에 그것이 문화의 차이인가 싶으면서 우리 문화는 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남편도 참 대단하신 분 같은데 오헤른 할머님의 자식들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뭐라고 했는지요? 92년에 자식들에게 얘기를 했고,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 자식들이 어머니를 그렇게 존경한다며 그 고통을 겪고도 지금까지 살아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렇게 격려하는 분위기였데요. 지금도 딸은 그 어머님이 다니시는 곳마다 함께 동행 하고, 어머니를 바라보는 눈빛이 얼마나 애절한지 몰라요.

그러나 우리나라는 물론, 지금도 딸이나 아들들은 없지만 조카들이라도 할머님이 TV에 나와서 얘기라도 하려고 하면 제발 하지 말라고, 부끄럽다고 하거든요.어떤 할머니는 사돈의 팔촌에 눈이 두려워서 수요시위조차도 못 나가겠다고 하세요. 가서 소리라도 실컷 지르면 분풀이라도 될 것 같은데 지금까지도 그것조차 못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 윤 대표는 어떻게 할머니들과 인연이 되셨어요?

저는 목사가 되려고 했는데 제가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딜까 언제나 고민을 했죠. 교회목회보다는 내가 있을 곳은 언제나 남다른 사람들 곁에 있고 싶었는데 김학순 할머님의 증언이 제 인생을 변화시켜 줬어요. 91년 8월이었는데 그전에는 제가 교회 기장여신도회 전국연합회라고 간사를 하면서 정신대문제에 관련해서 시위를 한다고 하면 관련 돼서 나가고 그랬었어요.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에요.

그런데 91년 8월에 김학순 할머님의 증언을 들으면서 어떻게 저런 고통이 지금까지 있을 수 있을까, 저것은 딸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여성이었기 때문에 저 문제가 아직까지 안 알려졌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무너지던지 만약 내가 저렇게 되면 나는 살아있지 못하거나 진작 괴로움에 미쳐서 돌아다니든지 했을 거예요. 정말 대단하시다는 생각을 했죠.

제가 할머님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은 그런 일을 겪고서도 얼굴에 어떻게 저렇게 힘이 있을 수 있었을까 싶었어요. 그 할머님도 역시 교회를 다니시고 계셨는데 할머님의 고백 속에서 제가 찾아야 할 신앙을 본 거죠. 전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래서 92년도에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실무 간사를 뽑는다기에 일을 하게 되었죠. 그때까지만 해도 자원봉사자들이 거의 돌아다니면서 전화 받아주고 일하고 그런 식이었어요. 데모를 한다고 하면 다른 단체들이 와서 돕고... 그런데 처음으로 간사를 뽑은 거죠. 저 혼자였어요.

수요시위에, 할머님들 신고 전화 오면 증언에 조사 다니고 할머님들 아프다고 하면 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오랫동안 저 혼자서 할 수밖에 없었죠. 그때는 힘든 것 몰랐어요. 20대라 젊었고요. (웃음) 그렇게 해서 제 목회방향이 달라졌어요. 지금도 저보고 그 문제에 너무 오래 있는 것 아니냐고 하는 질문을 하거든요. 그때마다 제가 있을 곳은 아직은 여기라고 말합니다.

▶ 처음에 정대협에서 일하면서 할머님들 만나고 그러셨을 때 할머님들 반응은 어떠셨어요?그때는 그래도 많이 생존해 계셨죠?

네, 대부분 60대셨죠. 사실은 이 할머님들이 전쟁 때 일본군들에게 당한 것뿐만이 아니라 해방 후에 우리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것과 당한 것에 대한 상처와 한이 더 크고 깊었어요. 외롭고 힘드니까 누군가 잘해주면 금방 정들잖아요. 정 듬뿍 들고, 돈도 빌려달라고 하면 돈도 빌려주고, 그러면 곧 이용해서 버리고 떠나고... 이런 경우가 많았어요. 물론 상대를 속이고 결혼이라는 것을 할 수밖에 없었던 할머님들도 있었어요. 그럼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까 남자들이 금방 알았겠죠. 그러면 할머니를 옆에 두고 다른 여자를 들여서 잠자리를 한다든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를 실컷 키웠는데 남편 죽고 나면 그 아이들도 이미 엄마를 떠나버리고, 역시 혼자되고 외톨이가 되고... 그러니까 인생 전체가 빼앗기고 버림당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할머님들이 처음 만나면 정신적으로는 피해의식으로부터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는 대인기피증까지 온갖 질환들을 다 갖고 계셨어요.젊은 사람이 와서 당신들을 위해서 일한다며 찾아다니고 하는데 처음에는 앞으로 보면 고맙기도 하지만 뒤로 가면 저 사람이 나에게서 뭐를 이용하려고 그러나 하신 거죠.그래서 기쁨만 많았던 것은 아니고 박해도 많았어요. (웃음)

지금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지만 그때는 할머니들이 어떤 얘기를 했느냐면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윤미향이가 다 벌어간다''''든가 (웃음) 그때 제가 정대협에서 활동비로 몇 년 동안 매달 30만 원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것도 저희 대표였던 윤정옥 선생님, 이효재 선생님 이런 분들이 개인 사비를 내고, 실행위원들이 회비 내고, 또 윤정옥 선생님이 어디 강연을 가시면 강연료를 주셨어요. 그 강연료를 고스란히 후원금으로 내셨죠.

그런 것이 저희들로 그대로 배움이 돼서 저희 실무자들도 어디 강연을 가면 받은 강연료를 고스란히 후원금으로 내요, 그게 살림살이예요. 왜냐하면 특별히 정부의 지원금이 없으니까 그런 돈으로 할머님들도 돕고 단체를 운영해 가는 거죠.

그러다 할머님들이 저를 검찰에 고소까지 했어요. 사기횡령 조사해달라고요. 그래서 제가 한 가방에 통장이며 장부며 들고 검찰에 가서 하루 종일 검사를 받았죠. 그런데 뭐 검사가 보니 뻔하죠. 돈 들어오는 데는 없고, 후원자 명단을 보니 전부 정대협에서 활동하는 윤미향, 윤정옥, 이효재 등등등....그때도 제가 참 감동스러웠던 것은 추석이나 설날이면 이효재, 윤정옥 선생님이 불러내요. 두 분이 엽서를 쓰고 ''''정옥아 네가 5만 원내라, 내가 8만 원 낼게..'''' (웃음) 뭐 그러시면서 저보고 떡값 하라고 명절에 주셨어요.

그러니까 30만 원밖에 못 받았지만 감동으로 일했죠. 사람은 감동으로 일한다고 저는 늘 이야기를 하는데 검사 분도 돈을 횡령했다고 하니까 기가 막혔는지 무혐의에 대해 명예훼손으로 맞고소를 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이분들이 이러는 것은 사실은 우리의 책임이다, 사회의 책임이다, 내가 가슴은 아프지만 이 할머니들의 병은 사회가 준 것이다, 일본이 준 것이 아니다... 내가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했어요.사실 머리는 그러는데 가슴은 쉽지가 않더라고요. (웃음)

◇ 죽음 앞에서도 잠들지 못하는 상처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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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히 쉽지 않죠.

집에 오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거의 제 개인적인 사생활을 팽개치고 주말에도 만나러가고 그랬는데 그렇게 무시당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니까..... 그래도 여전히 감동스러운 것은 다른 할머니들도 계시니까, 딸처럼 손녀처럼 고마워하고, 또 울었던 할머님들이 웃으시고, 화냈던 할머님들이 평화로워하시고, 그런 것을 보면 저한테 감동이 되지요.

▶ 오해를 하셨던 할머님들이 오해도 다 푸시고 지금은 괜찮으시죠?

저더러 ''''저 사람이 할머니가 다됐다''''고 얘기를 하세요. 저는 그것을 칭찬으로 받아들이죠. 달인이 다됐다고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이제는 그만큼 웃어넘길 수 있고, 할머니들이 무슨 얘기를 해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고 그래요.

▶ 많은 할머님들을 만나셨지만 특별히 더 깊은 인연을 맺으신 할머님들도 계시잖아요. 故강덕경 할머님과의 인연을 얘기해주세요.

참 안타까워요. 지금 살아계시면 제가 정말 잘해드릴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하고 또, 저에게도 힘이 많이 됐을 것이라는 생각을 참 많이 하는데 그 할머니는 화가였어요. 그분이 예전에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았다면 지금은 정말 훌륭한 화가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분은 단체에서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아셨던 것 같아요.

제가 93년도에 결혼을 했는데 어느 날 그 할머니가 저를 살짝 부르시더니 하얀 봉투를 제 손에 쥐여 주세요. 이게 뭐냐고 했더니 결혼을 한다기에 따로 할 것은 없고 뭐 필요한 것 사라고 주시는 거예요. 봉투를 열었더니 20만 원이더라고요. 당시에 할머님들은 수입이 없었어요. 정부지원금도 없었기 때문에 그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제가 알잖아요. 그 피 같은 돈을 제가 도저히 받을 수 없어 뿌리쳤더니 ''''내가 친정엄마가 되어보지 못했다. 나는 시어머니도 되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너를 보면서 언제나 저 아이가 시집갈 때 내가 친정엄마처럼 해 줘야지...'''' 하는 생각을 하셨다는 거예요.

더 이상 할머님이 주시는 것을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몸이 정말 안 좋으셔서 그 할머니가 아프다고 하시면 한밤중이라도 저는 벌떡 일어났어요. 마지막에 폐암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병상을 지켰는데 정말 숨을 못 거두시는 거예요. 가시는 길이 길어지는 것이 참 안 좋은 것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느꼈는데 한이 많으셔서 계속 숨을 못 거두시고 욕을 하시고 그러시더라고요. 일본사람들에 대한 욕도 하시고 그러셔서 마지막에 제가 ''''할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를 믿으시고.... 제가 끝까지 할게요. 할머니 제 딸이 있잖아요. 제 딸의 딸도 있을 거고... 할머니 걱정하지 마시세요...''''라고 약속했어요.

98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언제나 지금도 저는 길거리를 지나가다가도 비슷한 뒷모습이 보이면 ''''강덕경 할머니다'''' 소리를 질러요. 그런데 보면 아니죠. 지금도 그 할머니와 약속했던 것이 언제나 생각이 나요. 운전을 할 때도, 잠자리에 누워 천장을 쳐다볼 때도 가만히 할머니와의 약속을 생각하며 내가 잘살고 있는 것인지 자문을 많이 하죠.아마 할머니가 살아계셨으면 더 많은 그림도 그리셨을 것이고, 더 많은 곳에서 저희와 함께 운동도 하셨을 것이고, 제가 느끼기에는 피해자라는 생각보다는 같이 운동을 하는 동지고, 언니고, 동생이고, 자매라는 생각을 참 많이 가졌어요. 정말 안타까워요.....

▶ 뭔가 좋은 결과를 보시고 가셨다면 한이 조금은 풀리셨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데 15년 동안 몇 분이나 돌아가신 거죠?

지금 저희가 운동을 하면서 신고전화를 통해서 신고 되고, 조사를 통해서 위안부라고 확인되신 분들이 234명이었어요. 그중에서 딱 절반인 117명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또 117명이 남으셨죠.

◇ 할머니들의 역사를 삶으로 보여주겠다는 약속

▶ 그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뭔가 한을 좀 풀어드려야 할 텐데.... 굉장히 지금 불안해하세요. 돌아가실 때마다 저희가 가서 드릴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어요. ''''할머니 가슴속에 있는 것들 다 저희한테 풀어놓고 가세요. 그건 저희가 다 받을게요. 할머니는 할머니 깨끗한 영혼만 가지고 가세요....'''' 돌아가실 때 의식이 희미해지시고 때로는 사람도 못 알아보는 지경까지 가시거든요. 그런데 그 이야기만 하면 정말 제가 여러 할머니들에게서 그것을 봤는데 가슴을 툭툭 치시면서 ''''그게 안 돼! 그게 안 돼!'''' 하시는 거예요. 다른 건 다 버릴 수 있는데 그게 안 버려져진다고...

얼마나 그게 한이 되었기에 저러시는지 상상할 수는 없지만 그게 무엇이라는 것은 그려볼 수 있잖아요. 왜 저러실 거라는 것이요.돌아가시기 전에 그분들이 당하셨던 역사를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 할머님이 돌아가셔도 우리가 할머니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의 삶으로 보여드리겠다고.... 기독교는 부활이라고 표현하는데 할머니가 죽지 않고 부활했다는 것을 우리가 모습으로 보여주겠다고 할머니들에게 약속을 하죠.

요즘은 할머니들도 젊은 사람들보고 그렇게 얘기를 하세요. ''''수요시위 때도 우리는 당신들을 믿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믿습니다. 우리가 못다 한 그 일들을 당신들이 다 해내리라고 믿습니다....''''그것이 정대협이 이루어낸 성과인 것 같기도 합니다.

▶ 가슴이 너무 아픈데....지금 드러나지 않은 분들도 많이 계시지요?

많죠.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2년 전만 해도 신고가 계속 들어왔었어요. 한번은 경기도 마석에서 연락이 왔었는데 조카가 이모님에 대해 엄마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데 이모님은 조카인 자기가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며 만약 조카인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아마 굉장히 괴로워하실 거라며 자기가 알았다는 것은 모르셨으면 좋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조카가 남자였는데 그래서 주소만 알려달라고 했죠. 제가 가보니 거의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시고 누워서 말씀을 하셨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부끄럽다는 말밖에 못 하셨어요. 누가 알면 절대 안 된다고, 그분이 교회 권사님이셨는데 특히 교회에서 알면 안 된다고 누누이 강조를 하시는 거예요. 걱정하시지 말고 이야기하고 싶으신 것 다 이야기하시라고 했더니 일본 군인들에게 당한 이야기만 나오려고 하면 찬송가 중에 ''''지금까지 지내온 것...'''' 그 노래를 계속 불러대시는 거예요.

상해로 그분이 가셨는데 친구들 이야기나 다른 이야기를 하시다가 일본 군인들이 자기를 범하려는 이야기만 하시려고 하면 얘기를 차마 못 하시고 찬송가만 하시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만도 주님의 은혜라고 하시는 거예요.그런 이야기를 죽 들으면서 아직도 이렇게 사시는 분들이 많겠구나 싶었어요.

실제로 천주교 신자들은 돌아가시기 전에 종부 성사를 하시는데 한번은 경기도 양산에 수녀님이 연락을 주셨어요. 마지막으로 종부 성사를 받는데 그 이야기를 하시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알아야 할 것 같다고 전화를 주셨어요. 수녀님들도 이 운동에 참여를 하시고 계시거든요.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찾아뵈어도 되는지 여쭤봐 달라고 했더니 반대하셨대요. 천주님께 고백한 것으로 됐다고....아직도 그런 분들이 많이 계세요.

이 사회의 편견이라든가 옛날부터 내려오는 ''''화냥년''''이라는 거 있잖아요. 손가락질....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어느 누구도 환영받을 수 없었던 여자들....그 여자들이 우리 할머님들이고 지금도 그 여성들은 생겨나고 있다고 봐요.

▶ 그런 것들을 다 깨고 증언하시겠다고 나오신 용감한 할머니들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알려지고, 이만큼이라도 온 것 같은데 수요시위가 지금 몇 년째죠?

지금 16년째입니다. 92년 1월부터 시작을 했어요.

▶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그렇게 오래하다 보면 별의별 에피소드들이 많을 것 같아요.

수요시위에 어느 날 일본에서 중학교 남학생들이 참관을 했어요. 그날 비가 조금씩 오고 있었는데 이 아이들이 오면서 겁을 먹었던 것 같아요. 일본 언론에서 보여줬던 것이 한국의 강경하게 데모하는 모습만 봤기 때문에 혹시 일본 대사관 앞에 가서 자기들은 가해국의 국민들인데 할머니들의 분노가 자기들에게 전해져오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데요. 그런데 그 학생들이 할머니들에게 편지를 써와서 읽었어요. 비를 맞으면서 읽으니까 앞에 앉은 우리 할머니들이 비 맞는다고 우산 씌어주라고 계속 얘기를 하니까 이 아이들이 그 순간 마음이 싹 녹으면서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가슴이 더 깊이 남았고 돌아가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또 한 번은 금발머리의 핀란드 여성학자였는데 수요시위 참석 후 우리 사무실에 와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자기가 핀란드에서 수요시위 이야기를 듣고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을 해서 왔는데 일본대사관 앞까지 오면서 오만가지 생각을 다 했대요. 혹시 모든 사람들이 화가 나있고 분노에 차있어서 소리 지르고 경찰들이 막고 있으면 어떡하나...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고민을 하면서 왔대요.

그런데 집회에 와서 딱 보니까 할머니들이 평화롭고, 희망차고, 굉장히 적극적으로 요구를 하시고, 웃으시고, 다 나비피켓을 들고 ''''자 이제 우리 할머니들을 날게 합시다.'''', ''''이제는 억눌림과 사회편견에서 해방시킵시다.'''' 다들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자기가 느낀 것이 여기는 이미 일본만 모르는, 일본 정부만 모르는 평화와 해방이 왔음을 느꼈다고 하더라고요.

그 두 가지 이야기를 제가 들으면서 이것이 우리 수요시위가 가지고 있는 힘이구나 싶었어요.처음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요구의 표현 장으로, 보통 시위가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서 하잖아요. 그렇게 시작했는데 이제는 저희가 어디를 가도 ''''우리 할머니들은 이제 살아있는 박물관이고, 거리의 선생님들이다. 우리 할머니들은 16년째 거리에 서 있는 거리의 선생님들이시다.... 여러분들이 언제든지 수요일에 일본대사관 앞에 오면 여러분들은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다.'''' 라고 얘기를 합니다.

◇ 수요시위 16년에 옥바라지 4년

▶ 한 분이 살아계실 때까지, 끝까지 뭔가 우리가 할머니들의 한을 풀어드리는 일에 동참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너무 바빠서 결혼하실 시간도 없으셨을 것 같아요.

그래도 감사하게 이 운동하면서 남편을 만났어요. (웃음)처음에는 이 운동을 다 여성단체들만 관여를 해서 시작했는데 제 남편도 그때 당시 평화운동하는 단체의 실무자였어요. 자기들도 위안부 할머님들의 문제를 위해 할 것이 없을까 해서 처음 사무실에 방문을 하고, 회의를 하고, 수요시위참여를 하고, 그러면서 뜻도 맞고,, 서로에 대한 관심도 있고, 그래서 결혼을 하게 됐죠. 그렇게 해서 결혼을 했는데 요즘은 우리 실무자들이 다 처녀예요. 저만 빼고요. (웃음)걱정입니다. 그때처럼 멋있는 남자가 찾아와줬으면 좋겠는데... (웃음)

▶ 사랑도 사랑이지만 동지적인 그런 마음도 강했던 것 같은데 결혼을 하시고 고생을 많이 하셨더군요.

우리 사회가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평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못하다 보니까 결혼하고 5개월 28일 만에 남편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이 됐어요. 93년 3월에 결혼을 했고 9월8일에 연행이 됐죠.

▶ 이유가 뭔가요? 그 당시에 저희 남편은 군사평론가였어요.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청년들이 군대 끌려가면 의문사 당해서 죽기도 하고, 국가 기구 내에 의문사 위원회도 있잖아요. 그런 것을 조사해서 ''''청년과 군대''''라는 책을 냈어요. 일본판으로 일본에서 책이 출판됐는데 출판을 앞두고 일본에 방문해서 한통련(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대표를 만나 출판된 책에 대해서 소개도 하고, 일본에서 이런 문제를 적극적으로 알았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것이 군사기밀누설이 되어서 말하자면 간첩죄로, 스파이 짓을 했다는 거죠. 그래서 꼬박 4년을 살았어요.

2년 동안 재판을 해서 처음엔 15년 구형이 나왔는데 7년, 그다음에는 4년....결국은 그사이에 안기부 프락치가 간첩으로 만드는, 그러니까 저희 남편은 한통련 만난 것은 극히 일부고 안기부에서 프락치를 일부러 해서 말하자면 간첩사건을 만든 거죠. 그래서 국회에서 진상규명위원회 열리고 안기부 프락치에 대해 안기부장이 우리 직원 맞다는 인정도 하고 그랬는데... 재판은 다 끝나서 남편은 이미 살 거 다 살고 97년에 나왔죠.

▶ 정대협을 하시면서 옥바라지도 다 하셨네요.

네,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 활동부터 딸도 키우고... (웃음)

▶ 어떻게 그걸 다 하셨어요? 수입도 한 달에 30만 원 받아가지고....

그러게 말이에요. (웃음) 저희 친정에서 많이 도와줬어요. (웃음) 아이도 친정에서 키워주고 남편이 옥에 들어간 뒤로는 아예 아이와 친정에 붙어서 살았죠. 가족이 도와주지 않으면 아직은 운동이 불가능한 것 같아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지금도 딸은 거의 친정에서 키워주고 있습니다.

▶ 딸은 지금 몇 살이에요?

중학교 2학년이요. 밤늦게 학원에서 돌아오는 아이도 저희 친정어머님이 데리고 오시고, 저도 밤늦게야 집에 들어가고 그럽니다.


▶ 부모님이 어떤 일을 하는지는 알고 있나요?

제가 유치원 때 얘기를 해주었어요. 아이가 질문을 하더라고요. 친구들이 묻는다고저희 남편이 감옥에 있으면서 머리가 하얗게 세서 나왔는데 아이들이 언제 한번 놀렸나 봐요. 할아버지라고.... 아이가 의아해하면서 묻기에 설명을 했죠. 이래 저래서 우리나라가 아직 둘로 쪼개져 있고 통일이 안 되고 있는데 아빠가 통일운동 하다 보면 또, 통일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 일을 겪었다고 얘기를 해주었는데 그때 뭔가 이해를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어릴 때 면회를 갈 때면 제가 꼭 데리고 갔거든요. 그럼 아빠 저 속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얘기를 했어요. 왜냐하면 어린 아이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 공부가 이런 공부였다고 받아들이고 요새는 자랑스러워해요. 그래서 친구들이 너희 엄마가 그런 일을 하시는데 우리가 가서 자원봉사할 일 없느냐고 묻는데요.

◇ 이미지가 먼저인 기업의 기부문화를 바꾸자

▶ 강덕경 할머님께 약속까지 하셨으니까 대를 이어서 하겠다고 나올 수도 있겠어요. (웃음)고향은 어디세요?

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당항이에요. 제가 어릴 때 그런 얘기 많이 들었어요. 이웃집의 할머니가 정신대 안 끌려가려고 빨리 결혼을 했는데, 그 당시에 남아있는 남자들이 다 건강하지 못한 남자들이잖아요. 다 징용으로, 징병으로 끌려갔고... 그래서 결국 남편이 일찍 죽어 고생했다는 얘기서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때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게 뭔지 몰랐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랄 수밖에 없었던 곳이 제 고향이에요.

▶ 어떻게 목사가 되실 생각을 하셨어요? 경상도 그 완고하고 보수적인 곳에서...

제 고향의 여자 친구들 중에 중학교를 나온 친구가 없어요. 저희 친정 부모님도 주변 친지들로부터 굉장히 놀림을 당하셨어요. 무슨 딸 교육 시킨다고 수원으로 이사를 가느냐고요. 제가 맏이인데 중학교 3학년 때 수원으로 이사를 왔어요. 동네 근처에서는 진학할 고등학교가 없었거든요. 고등학교를 가려면 진주나 부산으로 자취를 해야 했어요. 그래서 저희 부모님이 굉장히 고생을 하셨죠. 농부들이 도시에 올라와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요.

▶ 부모님이 수원에서 어떤 일을 하셨어요?

아버님이 수원에 오시자마자 오랫동안 교회에서 사찰을 하셨어요. 교회 관리집사를 오랫동안 하시면서 그 속에서 저도 배운 게 많죠. 교회의 안 좋은 모습들 속에서도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던 것도 저는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저희 부모님이 저에게는 신앙부터 어떤 역사부터 의식의 선배이셨어요. 제 고향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보수적인 곳인데 거기서 딸 공부시키려고 도회지로 나왔고, 또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여자 목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젊은 사람이 없으니까 중학교 2학년 때 주일학교 유치부 교사를 했어요. 제가 신앙이 좀 열성적이었기 때문에... (웃음)

그때는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꿈을 키울 때였는데 기장의 목사님 중에 양정식 목사님이라고 맹인 목사님이 있었어요. 그 맹인 목사님의 수기가 ''''먼동이 틀 무렵''''인데 저는 아직도 기억을 하고 있어요. 그 책이 어떻게 저희 집에 왔는데 그 책 읽으면서 여자도 목사가 될 수 있구나, 이렇게 맹인도 목사가 됐는데 내가 목사가 되겠다... 그렇게 생각을 했죠.

▶ ''''여성인권박물관'''' 건립을 지금 계획하고 계시는데 그게 생각대로 잘 안되시나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아요. 저희가 박물관제목을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이유가 할머니들의 역사를 통해서 전쟁을 바라보고, 그 전쟁이 얼마나 참혹 한가, 그래서 평화교육, 또 그 전쟁 속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인권유린을 당했는가 하는 것을 통해서 인권교육을 제대로 시키자는 것이죠.우리가 과거 역사 중에서 무슨 영웅적인 일들, 이순신 장군이라든가, 역사 속에서 우리의 자부 감을 갖게 하는 역사들, 이런 것을 기억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죠. 물론 그런 것을 통해서 우리 자손들에게 자부 감을 줄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것보다도 사실은 더 중요한 것이 우리가 어떤 아픔을 겪었던가, 우리가 또 어떤 피해를 다른 나라에 줬던가 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왜냐하면 그걸 잘 배워야 다시는 그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게끔 만들 수 있으니까요.그래서 저희가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이라고 했습니다.다시는 이런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들지 말자는 것이죠.그런데 문제는 이제 돈이죠. (웃음) 저희가 모금을 하고 있는데 아직도 우리의 기부문화가 특히, 위안부 문제가 아직은 조금 터부시 되는 경향이 있어요.

▶ 아직도 그런 게 있습니까?

네, 저희가 박물관을 지으면서 기업들 몇 군데에 타진을 했었는데 기업의 사회공헌 팀들이 있잖아요. 그 팀의 책임자들한테서조차 위안부 문제와 자기네 기업의 이미지가 맞지가 않다는 말이 나옵니다.저희만 알고 있으면서 삭혀서 그렇죠. 만약에 할머니들이 그거 아시면 내가 정말 이 짓 당하려고, 이 부끄러움 당하려고 신고를 했나.... 그 말씀 나오실까 봐 저희는 겁나요. 이미지가 뭔데요.....

▶ 좀 더 마음을 열고 뭐가 더 중요한지 그런 것을 좀 생각해주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단지 불쌍한 위안부 할머니들 문제에 내가 도움을 준다는 것이 아니고, 그 할머니들이 겪지 않았으면 내가 격을 수 있는 일, 또 앞으로 전쟁이 나면 내 딸과 내 손녀들이 격을 수 있는 일, 즉 내 문제로 여기고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 박물관에 좀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셨으면 좋겠어요.이 땅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문제인 이 위안부문제, 이미지가 맞지 않는다며 도외시되고 있는 이 위안부 문제에 뜻을 좀 모아주셨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해봅니다.

▶ 네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에 힘을 보태주실 분께서는 서울 전화 02-392-5252번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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