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부른 노래로 가수가 되었고, 그 이후 25년간 한결 같은 마음으로 독도를 노래했습니다. 독도 명예군수로서 국민들의 관심을 불러 모으기 위해 각종 행사를 마련하기도 했죠.
그는 또, 독도 주민이 되기 위해 미국 영주권을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뿐인가요? 독도가 우리 곁에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몸소 보여주겠다며 직접 만든 뗏목으로 또는 릴레이 수영으로 독도 땅을 밟았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정광태 씨에게 비자조차 내어주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독도 지킴이 정광태 씨의 삶은 이렇듯 독도와 맞물려 있습니다.
오늘은 ''''독도는 우리 땅''''의 정광태 씨를 모시고 독도를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얘기를 5월 24일 CBS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독도 지킴이 정광태, 첫 출발은 토크 송 개그
▶ 가수를 시작하신지 얼마나 되셨죠?
74년에 데뷔를 했으니까 햇수로는 34년이 됐어요. 처음에는 개그맨으로 데뷔를 했는데 그때 전유성씨, 송영길씨, 임성훈씨도 있었어요. 꿀단지라는 팀으로 활동할 당시 처음 TV출연 할 때 사회자가 윤영주씨였어요. 남산에 KBS TV가 있었을 때였죠.
▶ 어떤 레퍼토리를 갖고 있었나요?
저는 당시에 토크 송을 했었는데 한심이라는 여자아이의 이야기에요. ''''제 여인의 이름은 한심이였습니다. 나는 언제나 한심이의 주근깨를 보며 얼핏 그 애의 주근깨를 잡으면 평생 동안 참기름 걱정은 없을 것 같았어요...'''' 이런 이야기였어요. 저는 스탠딩 개그를 했는데 기타 치면서 이야기를 하는 거죠. ''''나는 찐빵 집 딸을 사랑했었지. 내가 찐빵을 사러 가면 언제든 찐빵을 2개씩 더 주곤 했었지. 치사하기는 했지만 그 뒤부터 찐빵 집 딸을 너무 좋아하게 됐어.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찐빵 집 딸이 시집을 간다는 거야. 육교 건너 밀가루 집으로 말이야...'''' 스토리 있는 개그를 했어요. 당시는 코미디가 즐거움을 주는 시대였으니까 그런 것들이 신선했어요.젊음의 행진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선배들이 처음으로 개그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한 때 제가 나온 거예요.
▶ 다른 사람을 웃긴다고 생각하셨어요.
다른 사람을 웃긴다고 생각한 적은 없고 사실은 가수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명동의 르시랑스라는 지하실 카페에 놀러갔다가 아마추어 스테이지라는 순서가 있기에 나가서 좀 해봤더니 거기서 너무 재미있다고 이런 건 처음이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1주일에 1번씩 나와 달래요. 그래서 게스트로 사회를 보면서 진행하던 어느 날, KBS PD가 와서 봤는데 너무 웃긴다고 TV에 출연하자고 해서 방송에 데뷔하게 된 거죠.
▶ 시험을 보신 게 아니고 스카우트되신 거군요.
우리 때는 시험이라는 게 없었어요.
▶ 요즘 개그 프로그램은 어떤 것 같으세요?
굉장히 스피디하고 재미있어요. 요즘도 노래로 하는 개그들이 있는데 당시 정재환 같은 친구들이 제가 했던 것들을 습득해서 데뷔한 친구들이었어요. 기타치고 노래하면서 웃기는 개그를 좀 더 발전시킨 거죠.
◇ 유머 1번지에서 소개 된 코믹송, "독도 송"
▶ 독도는 우리 땅을 1980년도에 발표하셨죠?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는 1982년도에 발표가 되었어요. 당시에 ''''유머 1번지''''라는 개그 프로에서 임하룡씨, 장두석씨, 김정식씨, 그리고 저, 이렇게 4명이 포졸복을 입고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를 코믹하게 불렀어요. 가사를 쓴 분은 박문영씨라고 지금 미국에 계시는데 당시 KBS PD였어요. 그런데 TV 방영이 되고 나서 제작자가 보더니 이 시기에 너무 맞아떨어지는 노래라고 우리를 만나자는 거예요. 그래서 만나기로 했는데 임하룡씨, 장두석씨, 김정식씨가 너무 바쁜 거예요. 반면에 저는 막 제대하고 TV에 복귀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별로 바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만나기로 한 분이 너무 늦게 오는 바람에 세 사람은 가고 나만 남았어요. 다들 어디 갔냐고 해서 너무 늦게 오셔서 다들 갔다고 했더니, 그럼 저만 하자고 해서 노래를 하게 된 거예요.
▶ 전 국민의 노래가 되었어요. 소위 ''떴다''고 하죠?
당시에 일본에서 교과서 왜곡 사건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시기가 맞아떨어졌는데 정말 당시에는 대단했어요. 처음 그 노래를 부를 때 이순신 장군 복장을 하고 노래를 불렀어요. TV에는 많이 출연하지 않아서 지금도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는 아는데 제가 부른 줄은 몰라요. 또 당시가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어서 일본방문과 맞물려서 그 해에 잠정적으로 금지곡이 되었고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곡이 멜로디가 쉬워서 데모가로 개사를 해서 부르기도 했어요.
▶ 같이 못 부른 분들이 아쉬워하지는 않던가요?(웃음)
같이 불렀어야 하는데 이렇게 뜰 줄은 몰랐다 이거죠. 지금도 임하룡씨를 만나면 그때 같이 불렀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곤 해요.
▶ 지금까지 발표하신 노래를 보면 ''화랑관창'', ''의병대장 곽재우'', ''계백장군'', ''광개토대왕'' 등 이런 소재의 곡이 많은데요.
대게 역사 이야기로서 우리 청소년들에게 교육적인 노래들이죠. 지금 많이 알려진 노래는 ''힘내라 힘''이라는 응원가도 있고 ''김치 주제가'', 그리고 사람들이 동요로 알고 있는 ''코끼리 아저씨''는 ''독도는 우리 땅''과 같이 발표한 노래에요. 그밖에 ''도요새의 비밀'', ''아름다운 독도'' 등 주로 건전한 노래들이죠. ''힘내라 힘'' 같은 경우는 노래 자체가 파워가 있으니까 응원가로 불려요. 하지만 노래는 알고 있어도 제가 부른 줄은 모른다는 겁니다.
▶ 전공은 뭐였나요?
무역학을 전공했어요.
▶ 무역학 전공하고 개그 프로에 출연했다가 독도는 우리 땅으로 국민가수가 됐는데 이력이 참 독특하신 것 같아요.(웃음)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것을 통해서 많은 분들에게 이 사랑하는 대한민국에 아름다운 독도가 있음을 알리는 일에 노래를 부른 죄인으로서 끝까지 하는 거죠.
▶ 그 노래를 부르고 난 뒤부터 더 애국심이 생기신 건가요?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를 부를 때는 독도를 가본 적이 없어요. 그러다가 84년에 해양경찰청에서 독도는 우리 땅을 부른 사람을 초청하고 싶다고 해서 저를 초청했어요. 그래서 한국일보 사진부, 취재부 기자와 함께 처음으로 독도에 가게 됐어요. 당시에는 독도에 배를 댈 수 있는 접안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았어요. 그리고 제가 독도에 처음 갔을 때 지금은 돌아가신 독도 최초의 주민 최종덕 할아버지가 독도에 살고 계셨어요. 우리가 독도 부근에 도착해서 최종덕 할아버지가 갖고 오신 작은 배로 뛰어내려서 독도에 들어갈 수 있었죠. 독도라는 섬은 크게 동도와 서도가 있는데 동도에는 독도경비대가 있고 서도에는 주민이 살고 있는 거예요. 제가 갔을 때 최종덕 할아버지의 아들, 딸, 그리고 어부들이 7~8명 정도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너무 반가워하시면서 그곳에는 다 해산물이 채집되니까 미역도 주시고 선물도 많이 주셨어요. 또 독도 경비대에도 갔는데 예포를 받아본 사람은 아마 저 밖에 없을 겁니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를 부른 가수가 왔다면서 경비대에 계신 분들이 굉장히 기뻐하셨어요. 그래서 굉장히 감동을 받았는데 돌아오면서 더 열심히 이 노래를 불러서 알려야겠다고 생각을 한 거죠.
◇ 한일 역사의 꼭지점, 독도는 우리 민족의 자존
▶ 독도 경비대를 하시려면 굉장히 외로우실 것 같아요.
그곳은 바람도 세고 망망대해라서 아무 것도 없어요. 울릉도에서 92km, 배를 타고 2시간 반 정도를 더 가야 해요. 그리고 1년 365일 중에 독도의 땅을 밟을 수 있는 기간이 45일 정도 되는데 이 중에서도 바람이 너무 분다든지, 파도가 너무 친다든지 하면 독도에 도착을 못 해요. 기상변화가 굉장히 심하죠.
▶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래로 펜 레터도 굉장히 많이 받았겠어요.
하루아침에 달라지더라고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큰 포대자루로 별안간 우체부 아저씨가 갖다 주니까 어머니는 아들의 유명세 때문에 우체부 아저씨가 너무 힘이 든다고 달걀도 싸서 드리고 그랬어요. 재미있는 일들도 많았어요. 제가 굉장히 돈을 많이 버는 줄 알고 돈 좀 보내달라는 분도 있었어요.(웃음)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가 행사를 할 수 있는 노래도 아니고 밤 업소에 나가서 부를 수 있는 노래도 아니라서 유명세에 비해 돈은 별로 못 벌었어요. 그러니까 그런 편지는 안 주셔도 되겠습니다.(웃음)
▶ 제가 초등학생이 보낸 편지 하나 소개해 드릴게요.''''아저씨가 부른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를 좋아하는 학생입니다. 저는 그 노래를 5절까지 다 외우고 있어요. 그래서 이번 국사 시험에 그 노래가 나와서 쉽게 맞출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는 정말 좋은 노래 같아요. 그 노래를 자주 듣고 부르면서 저도 모르게 독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답니다.'''' 역사 공부가 절로 될 것 같아요.
역사책에 그대로 나와 있는 사실을 멜로디로 붙여서 만든 곡이니까요. 요즘은 초등학교에 가서 ''''사랑한다, 대한민국. 이곳에 아름다운 독도가 있다''''라는 주제로 강연도 하고 있어요. 그리고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바뀌었어요. 왜냐하면 독도가 2004년에 행정구역이 바뀌면서 옛날에는 도동산 63이었는데,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로 주소가 바뀌어서 가사를 새로 녹음을 해서 방송을 하고 있어요. 나머지 가사는 다 똑같고 대신, ''''대마도는 일본 땅'''' 중에서 대마도를 ''''몰라도''''로 바꿨어요. 왜냐하면 우리나라 땅이었으니까, 일본 사람은 하물며 자기 땅도 아닌데 자기 땅이라고 우기고 있잖아요. 그래서 막강 대한민국이 돼서 우리 대마도를 찾아와야 하니까 몰라도로 새롭게 바꾼 거예요.
▶ 독도는 우리 땅이 왜 두 번이나 방송금지가 됐었죠?
과잉충성이었던 부분도 있을 것 같고, 노래가 금지된다고 해도 우리가 왜 금지시켰냐고 따질 수 없잖아요. 그럴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고요. 방송국에서 안 틀겠다는데 어떡해요.5공화국 당시 실세였던 문공부 허문도 차관이 저를 부르는데 안 갔어요. 그 분이 기자시절에 독도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이 많았다면서 계속 들어오라는 거예요. 무서워서 갈 수가 있어야지요. 어쨌든 좋은 일이라고 들어 오라서 해서 갔어요.갔더니 녹차 한 잔을 주시면서 자기는 독도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은 많은데 애로사항이 뭐냐고 하더라고요. 노래가 금지가 돼서 안 틀어준다고 했더니 모르고 계셨대요. 아무튼 이야기를 나누고 집으로 갔는데 다음 날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어요. 그렇게 좋은 노래를 누가 금지를 시켰냐고 하면서요.(웃음) 아니, 저한테 어쩌라는 거예요.
당시 ''''가요 톱10'''' 프로그램에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었는데 83년도 연말에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어요. 독도는 우리 땅의 인기가 하늘을 찔러서 신인가수 후보에 올랐다고. 너무 기분이 좋잖아요. 제가 개그맨을 하다가 가수가 된 거니까 매니저가 있겠어요, 뭐가 있겠어요. 매니저 없는 가수는 저밖에 없더라고요. 독도는 우리 땅이 히트가 되면서 정수라씨가 부른 ''''아, 대한민국'''' 같은 건전가요들이 굉장한 붐을 이루었어요.잠실 체조경기장에서 마지막에 발표를 하는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사회자가 ''''남자 신인 가수 상''''이라고 하니까 관중석에서 ''''정광태! 정광태!'''' 하는데 머리가 쭈뼛쭈뼛 서는 거예요. 저는 돈도 별로 없고 의상도 없어서 연말시상식인데도 여름옷에 통기타를 메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런데 수상자 발표자가 영화배우 강수연씨였는데 ''''남자 신인 가수 상, 정!광!태!''''하는데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제가 탈 줄 담당 PD도 몰랐다고 하더라고요.당시에 조용필씨가 최우수 가수 상을 타고 너무 기분이 좋아서 같이 사진도 찍고 트로피를 들고 집으로 왔는데 기타를 잠실 체조경기장에 두고 온 거예요. 결국 잃어버려서 당시에 받은 상금으로 다시 샀잖아요.(웃음)
◇ 뗏목탐사로 시작된 태극기의 물결
▶ 독도명예 군수까지 되셨잖아요.
''''독도의용수비대''''라는 게 있어요. 돌아가신 홍순칠 대장님이 굉장히 저를 좋아했어요. 사람들이 독도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어요. 일본 사람들이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그럴 때만 정부도, 언론도 관심을 갖는 거거든요. 그런데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가 나오면서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된 거니까 저를 좋게 보셔서 울릉도에 초청을 하셨어요.감사패도 주시고 이런 훌륭한 노래를 불러줘서 너무 고맙다고, 당신 같은 사람이 군수를 해야 한다고 해서 받은 게 벌써 24년이 흘렀어요. 대한민국에서 월급 안 받고 이렇게 장기 집권하는 군수는 저밖에 없을 거예요. 그분들은 정말 독도를 지키려고 목숨을 내놓은 분들이었어요. 순수하게 울릉도 주민들이었는데 지금은 다 연로하신데 그런 분들이 계셨으니까 독도를 많은 사람들이 왕래할 수 있는 거죠.일본 사람들은 1년에 3~4번씩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이야기를 하곤 해요. 왜냐하면 계획적이고 지속적으로 그런 자료를 역사에 남기는 거잖아요. 그리고 주한일본대사라든지, 총리라든지 꼭 고위직들이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이야기를 하면 신문에 나서 역사에 기록이 되는 거잖아요. 우리나라를 36년 동안 빼앗아놓고 아직도 사죄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잖아요. 위안부 문제도 마찬가지고요. 하늘이 보고 있는데도 그런 것들에 대해서 뉘우침이 없고 올해부터는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교과서에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10년이나 20년 후에 우리나라 고등학생들과 일본 고등학생들이 만나서 독도 문제를 놓고 이야기할 때 우리나라 학생들이 얼마나 독도에 대해서 정확하고 논리정연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 일본이 그렇게까지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이유가 뭘까요?
아무래도 섬사람들이다 보니까 바다를 차지하는 것은 땅을 차지하는 것과 똑같잖아요. 독도까지 차지하면 영해가 달라지는데 그렇게 되면 울릉도 주민들은 먹고 살 수가 없어요. 그런 문제가 주된 목적이겠죠.그리고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서 전진기지로 삼아서 대한민국을 재침략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그건 누구도 장담 못하는 거잖아요. 1954년에 우리나라 외무부 장관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독도는 일제 침략의 최초의 희생물이었으며 대한민국의 해방과 함께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독도는 몇 개의 바위덩어리가 아니라 대한민국 영해의 닻이며 독도를 잃고서 어찌 독립을 지킬 수 있겠는가. 일제가 독도를 침탈하려는 것은 대한민국의 침략을 의미한다는 것을 국민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장관이 없어요. 명명백백한 자국의 영토도 주장하지 않는 자에게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물며 일본 사람들은 자기네 땅도 아니면서 자기들 땅이라고 우기는 현실인데 왜 떳떳하게 이야기하지 못하느냐는 거죠.
▶ 우리들만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할 게 아니라 국제사법재판소 등을 통한 이성적인 대처가 더 적절할 것 같은데요.
사법재판소에 갈 일이 없는 게 우리 땅이니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문제를 만들 일이 없잖아요.
▶ 일부에서는 굳이 우리 땅인데 우리 땅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냐는 말도 있어요.
내 것은 내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해요. 어떤 사람들이 독도가 우리 땅인데 구태여 그 노래를 부를 필요가 있겠느냐고 말하기도 했어요. 그게 얼마나 떳떳하지 못한 말이에요.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서 우리 것이라는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그리고 노래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르고 이해도 빠르잖아요.
▶ 당시 독도에 가실 때 일본 경비정이 따라붙지는 않았나요?
독도 수호대 친구들과 함께 8명이 뗏목 탐사를 했어요. 그때가 2002년도였는데 한강에서 연습을 하고 뗏목을 타고 가는데 정말 힘들더라고요. 사람들이 배타고 가면 쉬운데 왜 그렇게 힘들게 가냐고 해요. 우리는 신기록을 세우려고 가는 게 아니라 울릉도 생활권이었던 독도를 뗏목탐사를 통해서 대한민국의 땅임을 확인시켜 주는 작업에 우리가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다, 그런 걸 우리는 역사에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거죠. 너무 오래 걸려서 시간은 잴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2005년도에는 중학생에서부터 나이 많으신 아저씨까지 전국에서 45명의 애국전사들을 모집했어요. 제가 애국전사라고 하는 이유는 그분들이 그 귀한 시간을 내서 돈을 받고 가는 것도 아닌데 우리 땅 독도가 대한민국 땅이라는 것을 확인하러 가는 거였거든요.울릉도에서 새벽 5시경에 입수를 해서 28시간 동안 45명이 릴레이로 독도까지 가는데, 독도는 정말로 하늘이 원하지 않으면 독도 땅을 밟을 수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릴레이로 가는 동안에 바다가 밤낮으로 그렇게 조용할 수가 없는 거예요. 또한 울릉도에서 독도로 가는 관광여객선이 우리가 수영으로 독도까지 간다는 것을 알고 태극기를 흔들어 주는데 그건 눈물이었어요. 완전히 감동 그 자체였죠. 별안간 헬기도 나타나서 우리가 가고 있는 모습을 찍고 날아갔어요. 우리가 감동으로 흘린 눈물 때문에 바닷물이 더 늘었다고 해요.(웃음)독도에 아침 7~8시에 도착했는데 정상에서 독도경비대가 우리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서 대형 태극기를 흔들어 주는 거예요. 45명이 각자가 태극기를 준비해서 독도 땅을 밟자마자 태극기를 다 펼쳤어요. 그리고 월드컵 때 상암 경기장에서 붉은 악마들이 하던 것처럼 대형 태극기를 펼치는데 그 시간에 맞춰서 또 헬기가 나타났어요. 울릉도와 독도의 수영 종단에 참여했던 45명을 지금도 만나고 있어요.
한국, 중국, 일본 청소년들에게 나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1등이 일본 청소년, 2등이 중국이고 꼴찌가 한국 청소년들이었다고 해요.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다 보니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나라가 있어야 가정도 있고 내가 있는 거잖아요. 그런 점들이 아쉽고 저는 정부가 알게 모르게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우리의 것을 지키고 있는 귀한 사람들을 불러서 수고했다, 여러분들이 있기에 대한민국이 있다, 이런 말 한마디라도 해 주면 동참한 사람들이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겠어요.그럴 때 애국자들이 더 많아지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게 없네요.그 다음에는 33명의 여전사들이 수영을 해서 독도를 갔는데 더 빨리 갔어요. 21시간. 그런데 독도에 도착해서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을 못했어요. 여전사들이 해낼 수 있을까 염려했는데 정말로 해낸 것에 대해 너무 자랑스러웠죠.
◇ ''''노래만 불러가지고 독도 찾것시오?''''
▶ 미국 이민은 어떻게 가게 된 거예요?
친구가 1990년에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어 방송을 하고 있었어요. 6개월만 도와달라고 해서 ''''오후의 희망가요''''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했지만 당시는 이민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6개월만 도와주려고 했던 것이 연장이 되고 또 연장이 되다 보니까 샌프란시스코에서만 6년을 있게 된 거예요.어느 날 전화가 왔어요. ''''형, 독도는 우리 땅 노래를 부른 사람이 미국에 있으면 어떻게 해요?''''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독도문제가 터졌다는 거예요. 내가 독도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닌데 무조건 나오라고 해서 가족들은 미국에 남아있고 저만 96년도에 나오게 됐어요. 6년 동안 미국에 살면서 영주권을 받았는데 그때 나오면서 영주권을 포기했어요. 영주권을 포기하려고 대사관에 갔더니 영주권 받기 힘든 거니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자꾸 권고하더라고요. 포기한 사람한테는 그 이후로 5년 동안 미국 비자를 안 주거든요. 안준다고 거기서 싸울 수 없잖아요. 일본 대사관에서는 난리가 났었어요. 제가 비자를 못 받아서요. 방송국에서 추석 특집으로 가자고 해서 일본에 갈 일이 있었는데 일본 대사관에 갔더니 내일 출발인데 비자를 안 내주는 거예요. 비자 받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는데 그곳에서 엄청나게 싸웠어요.
▶ 비자를 안 준다는 이유가 뭔가요?
결격사유가 없는데 결격사유가 있다는 거예요. 당시는 미국의 영주권이 있었을 때였는데 미국 영주권자는 세계 어느 나라에나 갈 수 있잖아요. 너무 화가 나서 서류 다 찢어버리고 국어사전에도 없는 욕을 막 했어요. 그랬더니 여권을 내일 찾아가래요. 거부당하면 오늘 못 찾고 내일 찾아야 된다는 거죠. 난 내일 여기 올 일이 없으니 여권 내놓으라고 일본 사람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니까 나중에는 여권을 주는데, 보니까 여권에 REJECT(거부)라고 선명하게 찍혀있더라고요.그 이후로는 가려고 생각도 안 했고 노비자인 지금도 갈 마음이 없어요.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우리 땅인 독도를 밟을 수 있는 확률이 그다지 많지 않아요. 대한민국 국민이 살아서 한 번은 독도를 가면 좋겠다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실제로 가 보면 웅장한 독도의 기를 받아보실 수 있어요.
▶ 금강산에 가셔서 북한의 관리들에게도 독도 이야기를 하셨어요.
금강산에 다녀온 일이 있어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를 부른 가수라고 했더니 여자 안내원이 깜짝 놀라는 거예요. 왜 그런가 했더니 그 노래를 안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들었냐고 물어봤더니 라디오를 통해서 들었대요.그래서 금강산에서 독도는 우리 땅 노래를 불렀어요.더 히트는 올라가면 사람들이 소개를 하잖아요. 이 분이 독도는 우리 땅을 부른 가수라고 하니까 남자 분이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를 언제 불렀시오?'''' 그러는 거예요.언제 불렀다고 대답했더니 ''''노래만 불러가지고 독도 찾것시오?'''' 거기 있는 사람들이 한바탕 웃었잖아요. 애국적인 노래를 불렀다고 박수도 받았어요. 북한에서 굉장히 유행했던 노래라고 하더라고요.
◇ 음악사랑, 독도사랑은 영원한 나의 운명
▶ 고향이 어디세요?
저는 서울입니다. 어머니는 황해도 이북 분이셨고 아버지는 경기도 분이셨어요.
▶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세요?
지금은 두 분 다 하늘나라에 계시는데 아버지는 우리 4형제를 키우시면서 한 번도 잔소리를 안 하셨어요. 제가 막내인데 어느 날 큰 형님이 혹시 아버지에게 혼난 적이 있었냐고 물어볼 정도였어요. 한 번도 화를 내시는 걸 본 적이 없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생활력이 굉장히 강하셔서 모든 일을 다 하셨던 것 같아요. 아버님은 평생을 사시면서 말씀이 별로 없으셨어요.
▶ 어릴 때 꿈은 뭐였어요?
노래를 그다지 잘 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어렸을 때도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고등학교 때 YMCA에서 만우절에 열린 ''''거짓말 대회''''라는 게 있었어요. 상금도 많이 준다고 해서 제가 거기에 출전했죠. 어떤 소재였냐 하면, 어느 날 미국 대통령이 우리 집에 와서, 어쩌고 하는 내용이었는데 너무 웃겨서 1등을 했어요. 그런데 상을 안주더라고요. 그날이 만우절이었거든요. 1등한 것도 거짓말이었나 봐요.(웃음)
▶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35살에 했어요.
▶ 가족들이 너무 독도사랑에 열을 올리는 것에 대해 뭐라고 안하세요?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대한민국 국민이 독도를 더 사랑할 때까지 살다 가야죠. 후배나 아는 사람들에게 늘 ''''네가 참 잘됐으면 좋겠다. 그래야 네가 맛있는 것도 많이 사줄 거 아니냐.''''는 말을 해요.(웃음)
▶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세요?
현재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고 있어요. 후배 가수들을 키우고 있거든요.
▶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요.
축구도 좋아하고 산을 자주 다니니까 건강한 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체력은 국력이라고 했으니까 건강해서 독도도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