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의 프리선언, 보다 신중해져야"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영원한 방송인 차인태 교수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으로 시작된 장학퀴즈 프로그램은 전국의 고등학생 뿐만 아니라 성인, 어린아이 할 것 없이 TV 수상기 앞에 몰려들게 했던, 1970년대 당시 전국적인 열풍을 불러 일으켰던, 정말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당시 문화 아이콘이었다.

장학퀴즈 하면 떠오르는 한 사람, 아나운서 차인태!

따뜻하고 정갈한 분위기, 깔끔한 진행은 이분의 트레이드 마크였고 스포츠 중계면 스포츠 중계, 뉴스면 뉴스, 정말 아나운서계의 팔방미인이었다.

제주MBC 사장을 끝으로 방송생활을 정리한 이후 경기대 영상학부 교수로 계시다가 이북 5도청의 평안북도 도지사라는 공직으로 봉사를 하고 다시 경기대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는 영원한 방송인, 차인태 교수를 4월 26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다.

차인태 차인태
◇ 너무 많은 사랑, 너무 많은 갈채

▶ 젊은 사람들은 나이 드신 분들이 오랜만에 만나서 ''''여전하시네요.'''' 라는 인사를 하면 그렇게 웃기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여전하시네요. (웃음) 건강과 젊음의 비결이 궁금합니다.

=생활의 리듬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규칙적으로 살고, 감사하고 편안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 영원한 방송인이신데, 다시 방송을 하고 싶지는 않으세요?

=할 만큼 했고요. (웃음) 아시다시피 흑백TV 시대부터 시작해서 컬러, 케이블, 이른바 다매체 다채널 시대로 오기까지 AM, FM, 녹음, 녹화, 생방송... 너무 감사하게 프로그램을 많이 해서 이제는 후배들도 해야지요. (웃음) 오죽했으면 옛날에 수사반장에도 카메오로 출연했었고 시트콤의 원조 격인 ''''부부만세''''라는 코미디 프로그램에도 출연을 해봤겠어요.

▶ 방송을 정말 원 없이 다 하셨는데 교수, 지사님, 사장님, 어느 호칭으로 불러드려야 하나요?

=충정로에 있는 경기 대학교 다중매체 영상 학부에 교수로 있으니까 지금은 그냥 교수죠.

▶ 언제부터 대학 강단에 서신 건가요?

=학교는 98년에 제주문화방송 대표이사를 그만두고 사실은 집사람과 손잡고 쉬려고 했는데 여기저기서 가르쳐달라고 연락이 많이 오더라고요. 그중에 한 곳이 경기대학교였는데 마침 다중매체 영상학부가 새롭게 생겨서 그것을 일구는 과정을 했지요. 5년간 학교에 있다가 행정자치부 이북5도 위원회 평안북도 지사로 가면서 공무원 생활을 4년 했고 지난 3월 2일자로 다시 학교에 복직을 했어요.

◇ 학생들에게 찬거리를 제공하는 자유로운 강의

▶ 가르치는 일과 방송일이 어떻게 다르고 어떤 것이 더 어려운지요?

=가르치는 것이 더 신나요. 분명하게요. (웃음) 방송은 흐름이 있고 주어진 시간 안에 순서와 대본에 맞춰 그대로 진행을 해야 하는데 강의는 한 학기 동안에 주어진 학과목과 시간을 자기가 마음대로 편성해서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내용을 찬거리로 제공하고 잘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니까, 우선 강의하는 방법과 분위기를 전적으로 제가 스스로 만드니까 신나지요.

▶ 젊은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도 즐거운 일인 것 같고 인기도 아주 좋으실 것 같아요.

=1학년 학생 중에 88년 10월생이 있어서 ''''올림픽 때 엄마 뱃속에 있었겠구나.'''' 했더니 올림픽을 모르더라고요. 나중에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들어봤대요.

▶ 그럼 교수님에 대해서 잘 모르겠네요?

=제가 장학퀴즈는 90년까지 했고 마지막 방송을 93년까지 했으니 알 리가 없죠.

▶ 요즘 대학생들을 보면 어떠세요?

=약간 천방지축이어서 감당이 안 되는 측면도 있지만 밖에서 보는 것과 학교에서 보는 것이 달라요. 다소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제가 느끼기로는 갈수록 밝고 순수하더라고요. 고등학교 때 도시락 두세 개씩 싸가지고 다니면서 학교, 학원으로 어떻게 해가 뜨고 지는지 모르고 지내다가 갑자기 생긴 자유를 감당 못하는 학생들이 있어요. 그러나 통통 튀고 풋풋한 아이들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저는 제 시간에 모자에 바닥을 쓸고 다니는 힙합바지와 항공모함 같은 운동화를 신어도 다 좋은데 발소리만 내지 말라고 이야기해요. 그리고 배꼽티도 좋은데 다른 사람에게 혐오감만 주지 말라고 하죠. (웃음)

▶ KBS에 입사하신 게 언제세요?

=66년이요. 1월 24일에 42명이 첫 교육을 시작했는데 그때는 아나운서 뿐만이 아니라 기자, 프로듀서, 기획, 사무직 전부 다 했었고, KBS가 되기 전인 방송공사로 문화공보부 산하 공무원 시스템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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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부대에 다시 푸는 나만의 장학퀴즈

▶ 그때도 시험이 어려웠고 응시자도 많았을 텐데 동기로는 어떤 분들이 있었나요?

=동기로는 스포츠 아나운서도 했던 이세진 씨, 스포츠국장까지 했던 박세호 씨, 조춘제 아나운서도 있었어요.

▶ 오래 남아서 방송을 계속 하신 분은 교수님이 유일하신가 봐요?

=비교적 그런 편이죠.

▶ 1972년에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 석사를 받으시고, 99년 신문방송학 박사과정 마치셨더라고요. 연세 드셔서 하실 것 다하셨는데 웬 공부욕심이 그렇게 많으세요?

=무슨 한이 맺혀서 한 것은 아니고 (웃음) 방송을 하면서 모자라고 부족한 부분이 많다는 것 을 느꼈어요.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청취자나 시청자에게 전해 줄 때는 본인의 의사를 얹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알고 방송하는 것과 작가나, 프로듀서나, 기획자가 요구하는 것을 단지 전달하는 입장만 가지고는 그 사람의 깊이를 들어가기가 어렵거든요. 그래서 뭔가 충전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학교를 다니면서 생활이 절제되는 측면도 있었어요. 술을 먹지는 않지만 그런 모임이나 자리는 많으니까 흐트러지게 되거나 자칫 실수할 개연성도 있잖아요. 저는 고고하고 도도해서가 아니라 방송하는 사람은 자기 스탠스(stance)를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 정말 자기관리를 잘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도 나이가 들어서 공부하려면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아요.

=논문이 아직 남아있는데 이삼십 대에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들과 스터디그룹을 만들어서 보완하고 자기 것을 쌓아놓지 않으면 혼자 그 나이에 공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니가 싶어요. 논문이라는 것은 자기의 주의, 주장이 아무리 옳다고 하더라도 제3자로부터 정식으로 인정받고 그 나름대로 당위를 얻기까지는 내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또, 유사한 다른 것도 살펴야 하고 기존에 나와 있는 것이 아니면서도 본인의 삶이나 전공하고 너무 유리되어도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 평안북도 도지사를 4년 동안 하셨던데 어떻게 하시게 됐나요?

=2003년 봄부터 2007년 봄까지 만 4년을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전화가 왔었어요. 선생님도 평생 무대가 좋고, 배우가 관객 만나고, 작품 속에서 울고 웃는 게 전부였지만 살짝 점을 찍는 그런 시기가 있었잖아요. 그것이 원한다고 되는 건 아닌 것 같고, 안 하겠다고 꼬리를 빼고 도망간다고 해서 없었던 것으로 되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다행스러운 것은 제가 표준어를 쓰지만 제 핏속에는 분명히 한반도에서 태어났지만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전체를 놓고 볼 때는 이북출신이거든요. 평안북도 벽동에서 태어났다는 인연으로 아마 임명직 도지사가 된 것 같아요. 해방 당시의 행정구역인 함경 남북도, 평안 남북도, 황해도가 49년에 생겼더라고요.명예직으로 쭉 오다가 63년 5,16혁명 후에 이른바 별정직으로 됐다가 나중에 정무직으로 옮겨갔는데 92년에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4년제 선출직으로 바뀌었잖아요. 그전에는 대통령이 지사, 시장, 군수 다 임명했거든요. 그런데 이북 5도 청은 그대로 남아있었어요. 지방세 수입은 전혀 없지만 기본급, 자동차, 비서, 사무실에 정규 출,퇴근을 해요. 공휴일은 쉬고 국경일은 세종문화회관에서 행사를 하죠. 공무원 겸직은 안 되니까 교수직을 할 수는 없었지요.

◇ 의사인 아버지 손을 잡고 월남해

▶ 언제 월남을 하셨나요?

=남과 북에 각각 정부수립이 되던 해인 48년에 일가족이 서해로, 강원도로, 경기도로 뿔뿔이 흩어져서 월남을 하고 나중에 합류를 했다고 들었어요.

▶ 아버님은 어떤 일을 하셨나요?

=아버님은 의사이셨고 어머님은 장로님 집안의 자손이었어요. 노 할아버지가 지주에다가 중국과 무역을 해서 돈도 많고 땅도 많으셨죠. 게다가 많이 배우셨기 때문에 ''''떠나거라''''의 영순위셨죠. 숙청이라는 단어는 안 쓰겠습니다만, 재산을 다 내놓고 달구지에 봇짐을 싸서 내려오신 거죠.

▶ 월남을 해도 아버님이 의사라서 고생은 별로 안 했겠어요?

=그렇죠. 그렇지만 6,25때 아버님이 군의관으로 징집이 되어서 양구, 화천, 횡성으로 다니셨어요. 큰 도시의 종합병원이나 육군병원이면 좋았을 텐데 ''''빽이 없으셨는지''''.. 어머님과 외할머님이 고생을 좀 하셨죠.

▶ 고향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으시겠어요?

=흑백사진 한두 장뿐이지 말로 그려보라고 하면 동서남북 잘 모릅니다. 나중에 북한은 가봤지만 고향은 못가 봤어요.

▶ 도지사를 하시던 2004년에 용천폭발사고가 났었는데 고향인 벽동과는 가까웠나요?

=용천이 가깝지는 않아요. 벽동은 백두산에서 서해로 흐르는 압록강줄기의 가운데쯤에 있고 용천은 맨 서쪽인 의주 아래쪽으로 서해안에 인접해 있는 비옥한 도시입니다. 서울에서 신의주까지 들어가는 경의선에서 신의주시 들어가기 전이 용천역이에요.

▶ 용천폭발사고로 고향이 이북인 분들은 굉장히 가슴이 아팠을 텐데 돕기에 나서기도 하셨다고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돕기를 하셨어요?

=실향민들이 걱정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후속 보도가 안 나오니까 답답한 마음에 혹시나 사망이나 부상자 명단에 헤어진 가족이 있을까 해서 지사에 오시기도 하는데 알 길이 없죠. 모금운동을 했더니 그 체제나 정권 자체로 가는 것에 반대해서 돈으로 주는 것보다는 실제로 도움이 되는 일억 원 상당의 아이들 학용품, 이불, 내의 같은 물품들을 인천항에서 남포항으로 가는 대한적십자사의 정기 화물선으로 보냈어요. 두서너 달 후에 대한적십자사의 부총재가 현지를 갔더니 당의 시장격인 용천 시의 인민위원회위원장이 부총재 중의 한 분에게 손을 꼭 쥐면서 감사하다고 꼭 좀 전해달라고 그러더랍니다. 그게 바로 영수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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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과 마음이 통할 수 있는 인도적인 통일의 길

▶ 실향민들이 그쪽에 대한 적개심이 더 큰 것 같아요.

=세습, 독재, 유일한 분단국가로서의 체제 자체는 인정하지 않지만 고통 받고 있는 북한의 주민들을 어떤 형태로든 돕고 싶어 하고 하루아침에 정치적인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경제, 문화, 스포츠, 이런 쪽으로 좀 더 가까이 가고 서로가 마음과 마음이 통할 수 있는 그런 입장에서의 인도적인 지원은 해야 하겠다 하는 정서입니다. 죽기 전에 개별적으로 고향에 가게만 해준다면 국수공장이나 두부공장이라도 만들 수 있게 재산을 모두 주고 오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신 분들도 많아요.

▶ 연세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셨는데 어떻게 아나운서가 되실 생각을 하셨어요?

=저 노래 못해요. (웃음) 여러 발표회를 다니면서 제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제 소리와 제가 가진 음악적 재능으로는 어렵겠다고 판단했죠. 맏이라 의사가 되기를 바라셔서 이과를 선택했고 의과대학을 시험 봤는데 떨어졌어요. 그래서 재수를 했지요. 오현경 선배도 잠깐 있다가 나가고, 오태석 선배도 있었던 연세대학의 연세교육방송국(YBS)과 연세 춘추라는 학보사에 매료가 되어서 그것이 전환점이 되었죠. 제가 음악 학점이 안 좋아서 F도 몇 개 있답니다. (웃음)음악, 미술, 연극은 뭔가 하늘이 내려준 달란트와 끼가 있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이과생 머리로 음악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어렵겠다고 결정하고 방향을 돌렸죠.

▶ 집안에서는 반대하지 않으셨나요?

=음악보다는 낫다고 하셨어요. (웃음)

▶ 장학퀴즈를 언제부터 시작하셨어요?

=73년부터 90년까지 했어요.

▶ MBC로 옮기시고 시작하신 건가요?

=네, KBS에 근무할 때 지방발령이 났는데 부모님이 지방에 내려가면 안 된다고 반대하셔서 공보처에 얘기해보고 취소가 안 되면 그만두라 하셨어요. 그래서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시험을 보고 MBC에 들어갔어요. 유수열, 육창웅, 고진, 김우룡 다 입사 동기들입니다.

◇ PD 12명, 여자 MC 15명과 18년을 하루같이

▶ 처음부터 장학퀴즈로 인기를 얻으신 건가요?


=처음에는 홍길동이 마당 쓸듯이 궂은 심부름하면서 선배님 물도 떠다드리고 자장면 배달도 하고 다 했어요.장학퀴즈를 하기 진전에 ''''MBC챔피언 스카우트''''라는 인기 있는 권투 프로그램의 담당 캐스터가 됐는데 군대로 치면 소위가 대위쯤 된 거에요. 그런데 같은 일요일에 장학퀴즈가 신설되는데 딱 3개월만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3주 만에 MBC 정동사옥 앞에 기마경찰이 뜨기 시작하는 거예요. 학생들이 몰려드니까요. 원래는 6개월 한학기만 하고 가을개편에 막을 내리는 것으로 했었는데 저 혼자 남자 MC로 18년, 프로듀서는 12명, 여자 아나운서는 15명과 같이 일을 했지요.

▶ 지금까지 그 기록을 깬 프로그램이 있습니까?

=교양프로그램으로는 없지만, KBS의 ''''가요 무대''''가 쇼프로그램으로는 제일 길어요. 그런데 MBC에서 장학퀴즈는 막을 내렸지만 교육방송으로 가서 포맷의 변화는 있지만 계속 가고 있죠.

◇ 고(故 )SK 최종현 회장은 인재양성의 독특한 철학자

▶ 광고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SK의 최종현 회장이 단독으로 하셨다면서요?

=그것이 하나의 기록인데요. 우리나라에서 민간방송에 단일 스폰서는 그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초기에만 제품광고를 했고 장학퀴즈가 궤도에 올라선 다음에는 처음으로 패기, 열정, 이런 것으로 인재육성을 위한 기업홍보를 했어요. 장학퀴즈는 단일 스폰서라 광고료가 올라도 계속 지원을 해주셨기 때문에 광고나 영업직에 있는 분들이 걱정을 안 해도 되었죠. 기장원이 되어서 사립대학의 의대에 합격하면 12학기 등록금을 당해 연도에 고지서 나오는 대로 그대로 주라고 했어요.

▶ 그분이 키운 인재가 굉장히 많겠어요.

=그분이 참 존경스러운 이유가 졸업생들과 기장원들을 가끔 불러서 밥을 사주시면 선경보다 더 좋은 기업, 더 좋은 나라로 가라고 하시면서 선경으로 올 생각 말라고 하셨어요. 혹시라도 빚 갚는다는 생각으로 선경에 오겠다면 장학금 끊겠다고 하셨어요. 그 대신 도저히 취직이 안 되고 고생스러워서 거두어 달라고 하면 주유소에 기름 넣는 것은 할 수 있도록 해주시겠다고 하셨어요. 정말 사람 키운다는 것에 대한 독특한 철학을 가지고 계셨어요.

▶ 그 프로그램을 하시면서 정말 많은 분들을 만나셨을 텐데 기억나는 분 몇 분만 얘기를 해주세요.

=LG 그룹의 부사장도 장학퀴즈 출신이고, ''''만수와 칠수''''의 이규형 영화감독이 있습니다. 그 친구는 고2 당시 출연할 때도 꿈이 영화감독이었어요. 그리고 저는 기억이 안 나는데 방송 때마다 장학퀴즈를 나왔다고 주장하는 기타치고 노래하는 이택림 씨, (웃음) 새로운 문화 비지니스의 첨단을 개척한 난타의 송승환 씨를 비롯해서 전문직으로 활동하는 분이 많고, 심장 전문의, 법조인 등 아주 많죠. 아직까지도 자기들끼리 수람(收攬)이라고 하는 모임을 이어져 오고 있어요.

▶ 그렇게 오랫동안 방송을 해오시면 방송 사고나 에피소드도 많으실 것 같은데 혹시, 기억나는 것이 있으면 부탁할게요.

=워낙 많아서요. (웃음) 뉴스 펑크 나서 자다가 모골이 송연 해지는 꿈도 많이 꾸고 실제로 방송시간에 늦어서 감봉도 되고 그랬어요. 숙직하다가 잠이 들어서요.

▶ 자녀는 따님만 두 분이신가요?

=둘 다 결혼했는데요, 큰딸은 사회복지계통의 일을 하고, 둘째딸은 해양생물학을 하는데 다행히 길이 잘 열려서 미국 중부의 캔자스대학에서 논문 통과하고 최종 인터뷰만 남겨놓고 있어요.

▶ 특별히 더 하고 싶은 일이 있으세요?

=저는 모든 면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구순 가까운 부모님도 다 살아계셔서 모시고 있고 정말 감사하죠. 얼마 전에 결혼 60주년을 맞는 회혼례도 하셨어요. 이제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거나, 내가 가진 그 무엇이라도 나눌 수 있는 일이라면 하겠다는 것이지 뭔가를 더 이루겠다는 생각은 이미 집사람과 같이 접었습니다.

▶ 그래서 모습이 더없이 편안해 보이시는데 마지막으로 요즘에 아나운서들의 프리선언이 유행인데 선배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의지라고 생각하고, 본인의 능력이고, 지금까지 쌓아 온 본인에 대한 승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그 책임도 결과적으로는 본인이 질 수밖에 없겠지요. 지금의 방송환경이 과거의 아날로그시대에 비해서 엄청나게 발달하고 매체 간의 경쟁도 심해지고 종사하는 방송 인력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고 사회적인 분위기도 평생직장보다는 평생직업의 개념으로 가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방송을 먼저 했던 선배의 입장에는 아쉽죠. 좀 더 커리어를 쌓고 기초가 튼튼해지면 나중에 그 위에는 무엇을 쌓아 올려도 되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만에 하나 기초가 무너지거나, 바람이 조금 세게 불거나, 외부적인 충격이나, 개인적인 생활에서 한번 부러지거나 꺾어지면 이 직업이라는 게 회복이 참 어렵거든요. 그런 면에서 신중해 졌으면 좋겠고, 이 분야의 전문성과 자기만의 강한 개성... 이러 것들을 가지고 누가 뭐래도 승부를 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부모도 못 말리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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