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양성철 전 주미대사.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한 이후 곧바로 한국일보 기자로 있다가미국 유학 후에 줄곧 미국에서 혹은 한국에서 정치학과 교수 생활을 해 왔다. 그러다가 1996년 15대 국회에서 의정활동도 경험했다.
2000년부터는 김대중 정부 밑에서 주미대사로 3년여 동안 공직생활도 하신 양성철 전 주미대사를4월 25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다.
◇ ''''엔 카오 키''''라는 별명의 콧수염 교수
▶ 늘 여쭤보고 싶었던 것이 콧수염을 언제부터 기르셨는지 궁금했어요. (웃음)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시는데 65년에 미국에 가서 5년 만에 박사학위를 따고 70년대부터 대학 강의를 시작했는데 그때 제 나이가 만으로 29살이었어요. 명색이 조교수임에도 유학생으로 생각을 하는데 좀 나이 들어 보이고 싶어서 기르기 시작했어요. 베트남 전쟁 때라 구엔 카오 키[阮高祺, Nguyen Cao Ky]가 신문에 계속 나오니까 제 별명이 ''''키''''였어요. (웃음) 74년에 하도 말이 많아서 한번 수염을 깎아 본 적이 있어요. 저는 68년에 낳은 아들과 71년에 낳은 딸이 있는데 아들은 수염을 기르지 않았을 때의 모습을 봤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딸은 막 울면서 아빠수염 어디 갔느냐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는 계속 길렀죠.
▶ 공식석상에 나가시면 수염이 화제가 되기도 할 것 같아요.
시골에 가면 어르신들이 꼭 물어보시고 국회의원 출마할 때도 말이 많았어요. 그래도 안 깎았죠. 중동에 한번 갔는데 수염 기른 사람이 많으니까 제 고향에 온 기분이 들더라고요. (웃음)
▶ 지난 2월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시고 오키나와로 휴가를 다녀오셨다고 방송을 통해서 들었는데 대통령님은 건강하신가요?
건강하십니다.
▶ 모처럼 해외여행을 같이 가셨는데 가서 어떤 것들을 하셨어요?
저도 처음 갔는데 2차 대전의 격전지라 미군, 일본군, 한국군을 비롯한 22만명 정도가 희생을 당했다고 하더라고요. 한국군을 비롯한 모든 희생 군인들의 추모비에 헌화하고 추모한 것이 공식일정의 전부였고 나머지 시간은 휴식을 취했어요.
▶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어떤 인연으로 만나시게 됐나요?
65년 6월에 한국일보 기자를 하다가 미국 하와이 대학에 존슨 대통령이 만든 ''''동서문화센터''''라는 곳에 장학생이 되었어요. 우연히 한국에서 국회의원 세 사람이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으로 가는 길에 하와이를 들르는데 통역을 해보겠느냐고 연락이 와서 돈키호테처럼 흔쾌히 승낙을 했지요. 그것을 인연으로 처음 만나서 80년대 미국 워싱턴에 계실 때 찾아가서 만나 뵙게 되었죠.
◇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맺은 40년 인연
▶ 주미 대사도 하시면서 자주는 아니더라도 종종 찾아뵈면서 40여 년 동안 인연을 맺으셨는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그분의 어떤 모습을 듣고 싶네요.
신문에 난 부정적인 이미지나 긍정적인 이미지만 알고 있었지 사실 저도 잘 몰랐어요. 미국 중서부에는 19세기 중반에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온 이민자가 많아요. 노르웨이 같은 경우는 노벨상의 시작지 아닙니까? 그쪽 이민자들 중심의 5개 대학에 컨소시엄을 만들어서 전년도 노벨상수상자를 초청해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도록 하더라고요. 2000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으셔서 2002년에 초청을 받으셨는데 현직 대통령이 노벨상을 받아서 초청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어요.
그런데 못 오시니까 저보고 대신 가라고 하셔서 자료를 조사하는데 김대중 대통령의 ''''옥중일기''''와 ''''나의 사랑 나의 조국'''' 읽게 되면서 그분이 얼마나 고생을 하셨는지 알게 되었죠. 그 뒤로 서로 바빠서 못 만나다가 제가 대사 임기가 끝나고 자문위원으로 있으면서 거의 한 달에 한번 이상을 만나 뵈면서 그 집념과 강인한 열정, 젊은 사람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의지, 국가에 대한 특히, 통일문제와 동북아정세에 대한 집념이 너무나 감격스러울 정도로 깊은 인상을 주었어요. 그래서 많은 것을 존경합니다.
▶ 우리나라에서 제일 막중한 자리인 주미 대사를 3년간 맡으셨는데 그 시절이 북미 관계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나요?
개인적으로는 영광스러운 자리였는데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죠. 클린턴 정권 말기였던 2000년 8월에 갔는데 대북 정책에 있어서 김대중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은 뜻이 맞아서 모든 것이 잘 진행되어가는 과정이었어요. 잘 아시겠지만 올 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하는 전례가 없는 상황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고 또, 조명록 차수가 파격적으로 미국에 와서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 백악관에서 사진을 찍고... 이런 상황이었다가 부시 정부가 2001년에 등장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면서 2002년 소위 고농축 핵 프로그램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북미관계에서 양자회담도 거부하게 되고 어려운 조건도 내놓고 그러다 보니까 오늘 같은 상황이 오고 제가 책임을 많이 통감하게 됐죠.
▶ 그 당시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에 간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만약 평양에 갔더라면 상황이 많이 변했겠지요?
클린턴의 자서전인 ''''My Life''''에 북한에 관한 장이 있어서 읽어보았어요. 올브라이트의 자서전에서도 북한 문제에 대해 썼는데 클린턴의 고백 중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북한을 가려고 했는데 5가지 이유로 못 갔다는 말이 있어요. 첫째는 시간이 없다는 것인데 북한을 방문하게 되면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맹 우호 국가를 다 들러야 하니까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는 겁니다. 두 번째 이유는 차기정권이 누가 되든 대북관계를 계승해서 하리라고 믿은 거예요. 세 번째는 부시가 당선자가 됐는데 부시한테 북한을 다녀와도 되겠느냐고 물었는데 부시의 대답이 냉담했다는 거예요. 확답 대신 ''''이 순간부터 내년 25일까지는 당신이 미국대통령이니 당신이 알아서 해라'''' 그랬다는 겁니다.
네 번째 이유는 정치상황인데 부시와 고어의 플로리다 투표 사건으로 시간이 많이 흘러버린 것이죠. 그리고 다섯 번째로 제일 결정적인 사건은 야세르 아라파트 사건이에요.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생긴 이 문제에 클린턴은 가장 큰 실망을 했다고 하고 올브라이트도 자기들 재임 중에 가장 큰 실망으로 야세르 아라파트 일을 들었어요. 다 북한하고 관계가 있죠.
◇ 미국과 북한이라는 두 가지 힘의 역학
▶ 한 나라의 운명도 어떤 한순간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국민의 정부는 끊임없이 햇볕정책을 폈고 성과가 있어서 6.15공동선언까지 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일부에서는 퍼주기다 이런 얘기가 많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북이 핵실험까지 하는 바람에 관계가 아주 악화됐다가 이제는 조금씩 좋아지고 있잖아요. 이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지금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부시 정부 1기에서는 양자 대화도 거부했는데 2기에 들어와서는 국무성이 주도하는 6자회담이라는 대화협력 채널이 있어서 2005년 9월 19일에 공동선언이 나왔고, 금년 2월 13일에 베이징에 합의까지 도달하는 굉장히 긍정적인 상황까지 와있는데 미 재무성은 북한에 국제 금융 불법 거래 상황을 갖다가 파악하는 바로 마카오의 방코 델타 아시아(BDA) 문제를 주도하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양면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고, 이중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국무성이 추진하는 것은 수면위로 올라와서 대화하고 협력하고 신문에 많이 나고 그러는데 재무성이 하고 있는 불법거래는 가짜 위조지폐, 마약밀매, 가짜 담배 같은 것의 거래, 불법적인 금융행위 이런 4가지 정도를 가지고 계속 조사를 하고 검증을 하고 있어요.
재미있는 것은 2005년 9월 19일에 미 국무성이 주도한 공동 성명이 나왔는데 그 성명이 나오기 나흘 전에 미 재무성이 방코 델타 아시아(BDA)는 미 애국법 311조에 의해서 불법혐의, 돈세탁, 주은행이라고 지목을 했단 말입니다. 이번에는 2월 11일에 합의가 있었는데 3월15일에 그 결정을 해버렸단 말이에요. 그래서 방코 델타 아시아(BDA)는 돈세탁 주은행이라고 결정했단 말입니다.
그 얘기는 어떤 얘기냐면 미국 법에 의해서 방코 델타 아시아(BDA)하고는 전혀 금융거래를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미국은행과 거래를 안 하는 은행이 세계 어디에 있습니까. 거의 다 하잖습니까. 2005년 9월부터 지금까지 북한이 가지고 있던 은행들이 세계에 22개 정도 되는데 그 사람들이 다 꺼내서 은행을 못하게 되는 것이죠. 이번 결정은 거의 북한이 가지고 있는 총액이 2,400만 불에서 2,500만 불정도 되는데 이걸 가져가라고 하는데 어떻게 가져갑니까. 택시로 가져갑니까, 수송차로 가져갑니까, 아주 어려운 상황이죠. 이런 문제가 해결되어야죠.
▶ 국무성과 재무성이 이끄는 해법이 좀 다르니까 그게 잘 해결이 됐으면 좋겠네요. 한 가지 더 여쭤보자면 이번에 버지니아 사건이 있었잖아요. 우리는 너무 많이 걱정을 했지요. 한국계가 저지른 일이라... 그런데 미국의 정서는 많이 다르더군요.
미국은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 사회이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학생인데 그것은 인종을 떠나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죠. 어떤 인종이나 민족이나 국가나 극한 상황에 있으면 있을 수 있는 일 아닙니까. 그것을 자꾸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그러는데 감정을 줄이고 좀 더 냉정하게 한 젊은 아이가 국적과 민족을 떠나서 참 안됐고 그런 상황에 가서는 안 되겠다 각성해야 할 것입니다.
▶ ''''움 - 민구의 작은 발견'''' 이라는 책을 저술하셨는데 책 제목이 너무 재미있어요. 움이 무슨 뜻인가요?
뜻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처음에는 제가 구멍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책을 쓰다 보니까 상스럽게 보이고 그래서 많이 고민을 하다가 움으로 결정을 했어요.움이 우리나라 말로 ''''움트다''''할 때 쓰이고 그리움 이라든지 외로움 같은 끝맺음 말로 쓰이죠. 책에도 맨 마지막에 왜 움이라는 제목을 붙였느냐 하는 얘기를 했는데 우리나라 사전을 찾아보니 4가지 뜻이 있더라고요. 4가지 뜻이 모두 제가 생각하는 책을 흐르는 핵심 생각과 비슷한 것 같아서 잘됐다하고 움이라고 했죠. 그랬더니 제 친구들을 비롯한 지인들이 그 ''''움''''이 뭐냐며 많이들 물어보시더라고요. (웃음)
▶ 굉장히 책 제목이 특별했어요. 그래서 저는 인도, 티벳 이쪽의 얘기인가 하는 생각도 했었거든요. (웃음) 그럼, 민구는 뭔가요?
민구는 내일모레가 칠십이니까 아호가 있는 것도 괜찮겠지 싶어서 만든 제 아호입니다.
▶ 책의 내용이 뭔가요?
제가 인생을 살다 보니까 여러 가지 생각들도 있고 느낀 것도 있고 가보고 해본 일도 많고 그래서 그런 것을 종합해서 엮은 일종의 ''''잡론''''이죠. (웃음)
◇ 구멍을 통한 원형적인 세상읽기
▶ 제목을 보니까 흙, 구멍, 공, 비아그라, 기, 하늘... 죽 나오는데 언제부터 준비를 하신 겁니까?
15대 때 잠깐 국회의원을 하면서 어떻게 낙천이 됐어요. 제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없고 해서 울컥하더라고요. 기자회견을 열어서 항의를 할까도 생각했었지만 그것보다는 이제까지의 경험과 정치상황하에서 느낀 것들을 종합해서 책을 하나 쓰는 것이 어떨까 해서 급히 화를 삼키는 겸해서 쓴 것이 처음에 쓴 ''''구멍론''''이라는 책이에요.
2000년 3월부터 5월 사이에 썼는데 재미있는 사건은 2002년 1월에 워싱턴 중앙교회에서 초청을 받고 가서 축하메시지를 했는데 한영 성경책을 주시더라고요. 100명이 넘는 목사님들이 전부 서명을 해줘서 귀한 가보로 생각하고 꼭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없어서 못 읽다가 2003년 4월 말에 한국에 와서 여러 번 읽게 되었어요. 그런데 번역 상에 문제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구절들을 모아서 이 책 뒤에 붙여놓았어요.
▶ 자서전 겸, 수필 겸... 해서 쓰셨는데 ''''사람은 구멍에서 나서 구멍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이 있는데 인생론인가요?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많이 쓰잖아요.
그 얘깁니다. 그래서 첫 제목이 흙입니다. 인간에게는 정신적인 공백도 있고 육체적인 공허도 있고 종교적인 공백도 있어요. 이런 것을 메우는 것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창작이라든지 창조, 창건... 이런 것인데 또 그것을 파괴적으로 하면 색광이 될 수도 있고 범죄행위를 할 수도 있다는 뭐 그런 얘기죠.
▶ 이런 제목으로 책을 만든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어떠셨어요?
1999년 말에 가족이 모여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아들이 저보고 돌았느냐고 그러더라고요. (웃음)
▶ 출판하실 때 힘드신 것은 없으셨어요?
여러 곳에서 거절을 당했습니다. 덕분에 시간이 가면서 내용을 더 보충할 수 있었어요.
▶ 고향이 전남 곡성이세요?
곡성에서 태어나 초등학교까지 다니고 남원으로 나왔어요. 15살 위의 큰 형님이 남원 농고 교사셨거든요.
▶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저희가 오 남매인데 할아버님이 지주여서 아버님이 그 그늘 밑에 너무 오래계셨어요. 아버님은 한량에 육자배기 노래도 잘하고 술도 좋아하셨어요. 아버님과 형님들은 술을 많이 드셨는데 저는 술과 담배를 안 했어요. 어머님은 아버님 때문에 맘고생을 하셨지만 정말 좋은 분이셨어요. 여장부 같으셨고요.가슴 아픈 기억이 제가 공부를 못해서 편입을 통해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는데 운동도 그렇고 공부도 잘 못했어요. (웃음) 그런데 집을 떠나서는 좀 나아졌죠.
◇ 가난한 고향을 위해 이룬 40년 만의 열정
▶ 자녀분들도 아세요? (웃음)
저는 자녀들에게 엄했고 저는 항상 공부 잘했다고 큰소리쳤는데 미국에서 교수시절에 지하실 서재에서 제 대학 성적표가 나왔어요. 항상 A+이었다고 했는데 F도 있고, C도 있고 D도 있고, 그걸 들켜버렸어요. 아이들 앞에서 상당히 곤란을 겪고 그 이후에 신뢰를 잃었죠. 아이가 막 따지길래, 어떡하냐, 부모가 도둑질 한다고 너도 도둑질해라 말하지 못하지 않느냐.. 나는 공부못했지만 너희는 공부 잘해라 그런 뜻이다 이렇게 해명을 했죠. (웃음)
▶ 결혼은 미국에 가시기 전에 하신 건가요?
미국에 가서 했어요. 집사람은 할아버지가 1904년에 함경도에서 사탕수수밭 노역자로 하와이로 간 이민 3세대에요. 집사람은 하와이 대학에서 한국학을 전공해서 한국말을 잘했죠. 원래는 한국에 바로 들어오려고 했는데 이스턴 켄터키 대학에서 한 학과에서 분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11명이 집단 사표를 냈어요. 그래서 제가 다급한 데로 주저앉게 되었죠. 인생이라는 것이 그런 기로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한국에 바로 나오지 않고 70년부터 86년까지 미국에 대학교수로 있었어요.
▶ 오랫동안 미국에서 자리를 잘 잡으셨는데 국회의원이 되시겠다는 생각은 왜 하신 건가요?
1986년에 서울대학교 초빙교수로 왔고 경희대학교 평화복지 대학원에 교수 제의를 받으면서 완전히 한국에 주저앉게 되었어요. 경희대학교 평화복지 대학원이 광릉에 있었는데 학생 수는 적어도 굉장히 우수했어요. 그곳에서 훌륭한 박사님과 대사님 밑에서 10년간 배우면서 그분들은 활동을 다 하시고 오셨는데 저는 그곳에서 멈추기에는 약간 열정도 식은 것 같고 가난한 고향에 도움을 주고 싶어서 출마를 하게 되었어요. 1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작은 아버님이 나오셨다가 낙선을 하시고, 2대는 옆집에 대부이셨던 분이 나오셨다가 낙선되고, 3대는 재당숙이 나오셨다가 낙선되셨어요. 그렇게 1,2,3대 다 떨어지고 40년 후에 제가 당선되었죠. 어렸을 때부터 선거하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정치학과를 가게 된 것 같기도 해요. (웃음)
▶ 앞으로도 혹시 기회가 되시면 정치 쪽으로 가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책을 보세요. 제가 하겠는가... (웃음) 이제는 여행도 하고 집필도 하면서 그냥 놀랍니다.
◇ 그리움, 아쉬움 속에 움트는 즐거움
▶ 주미대사로 가시면서 가장 힘드셨던 것이나 실수담은?
정치학을 하고 국회외교통상위에도 있었지만 실제 자리에 있다 보면 하도 급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여유가 없어요. 고농축 우라늄 문제도 그렇고 실상을 제 스스로 파악하기가 힘들어요. 우방국 정보에 의존하게 되지요. 지나보면 과장됐다든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자리라는 것이 모든 것을 처음 하는 것이라 시행착오도 있고 후회도 생기게 되지요.
▶ 외교라는 것도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다 보니 관계가 중요할 텐데 미국정부에 친한 분들은 많나요?
친구라고는 할 수 없지만 친지들은 많이 있지요. 미국의 스승과 제자, 동료관계는 한국과는 좀 다릅니다. 하와이에서 굉장히 도움을 많이 준 평생 은인으로 잊을 수없는 동료 교수가 있는데 작년에도 부부가 한국을 일주일간 다녀가셨어요.
▶ 일생을 돌아보며 가장 후회가 되거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으세요?
후회스러운 것은 별로 없고 아쉬운 것은 저희 부모님이 너무 늦은 나이에 저를 낳으셔서 제가 좋은 학교 가는 것도 못 보시고 좋은 자리에서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아무것도 못 보셨어요. 그래서 부모님이 살아계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죠. 그러고 보니 그것도 ''''움''''이네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