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기분 좋은 상상 아닌가?
이런 목가적인 풍경을 가슴 한 켠에 담아두고, 목동들이 부르던 노래를 우리나라에 소개한 사람이 있다. 바로 한국 요들의 대부라 불리는 김홍철 씨.
라디오에서 우연히 들은 요들에 취해, 용감무쌍하게도 스위스 신문사에 편지를 보냈던 소년기, 요들의 본고장 스위스에서 직접 요들을 배워 와 본격적으로 요들 전파에 나섰던 청년기, 어느 날 갑자기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요들 부흥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중년기, 요들과 함께 한 김홍철 씨를 4월 23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다.
◇ 인터넷 동호회를 통한 요들송의 부활
=산도 좋아하고 여행도 좋아하고 걷는 것도 좋아합니다.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매일 걷습니다.
▶ ''''요들송 가수''''라고 하면 마치 ''''역전 앞''''이라고 하는 것과 같아서 이상해요. (웃음)
=일반적으로 요들을 부르는 남자를 ''''요들러''''라고 하고, 여자는 ''''요들러 린''''이라고 합니다.
▶ 70,80년대는 요들송의 인기가 대단했었죠?
=그때는 외국문화를 접할 기회가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따라 부르고 배우고 싶어 했죠.
▶ 요즈음은 그 인기가 좀 덜해진 것 같아요. 요들의 인기가 줄어든 것에는 캐나다 이민의 영향도 있는 것 같아요.
=노래 뿐만이 아니라 인터넷보급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많이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침체되었죠. 그러나 인터넷 동호회가 많아지면서 요즘은 다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 같아요.
▶ 다시 붐이 일어나서 다행인데 김홍철 씨도 동호회 모임을 가지고 계신가요?
=70년대 초반에 전국에 10개의 클럽을 만들었고 아직까지 절반 정도의 클럽이 유지를 하고 있어요. 대학생 클럽은 졸업 후에도 모임을 갖고 그중에는 칠순이 넘으신 분들도 있어요.
◇ 자연친화적인 요들송을 통한 인성의 개발
▶ 요들 보급에 앞장서고 계신데 ''''김홍철과 친구들''''은 뭔가요?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칠 수는 없으니까요. (웃음) 다양한 스위스 민속 악기를 같이하면서 선보이기 위해 70년대 말부터 결성을 했어요. 지금은 다섯 명인데 요들 클럽출신의 하이디 같이 생기신 여성도 한 분 있습니다. (웃음)
▶ 어린이 요들 팀도 있다고 들었어요.
=인천에 사는 방윤식 씨라는 분이 아이들을 중심으로 동두천을 비롯해 안동까지 내려가서 요들을 보급을 하고 있는데 스위스 대사관에서는 한국의 아이들이 예쁘게 요들송을 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고 있어요.
▶ 좋아하는 것을 하면 에너지도 넘칠 텐데 아이들에게 가르치면 뭔가 다른 것이 있나요?
=대학을 잘 들어가더라고요. (웃음) 악기도 잘하고 공부도 잘해서 요즘은 부모들이 더 적극적이세요. 요즘은 폭력이라든지 왕따라든지 많은 불협화음 속에 살고 있는데 요들송은 알프스의 푸른 초원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심어주잖아요. 정서적으로도 좋아서 어린이들이나 젊은이들에게 좋지 않나 싶어요.
▶ 요들송 하면 가장 자연하고 가까운 노래 같아요. 대부분 우리나라 아이들이 옛날에 비해 자연과 접할 기회가 전혀 없는 것 같아서 심성도 많이 변해가는 데 그런 아이들에게 자연이나 꽃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굉장히 좋은 것 같아요. 처음 요들과 인연을 맺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처음 요들을 알게 되면서 전문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국립도서관 등을 뒤졌는데 ''''알프스 목동들이 부르는 노래다.'''' 이것이 요들에 대한 정보의 전부였어요. 그래서 신문사 조사과에 가서 명단을 확인하고 영어 선생님께 부탁해서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신문사에 편지를 보냈죠. 기대도 못 했는데 편집장이 듣고 따라서 해보라는 답장과 함께 테이프와 악보를 보내주었어요. 교회와 학교에서 1년 정도 들으면서 아침마다 산에 가서 연습도 하고 노래도 했는데 1년 뒤에 목소리를 녹음해서 보내주면 전문가가 듣고 고쳐주겠다는 내용의 편지가 다시 왔어요. 기타를 치면서 요들을 부르고 교복 입은 사진을 보냈더니 한국의 학생이 요들을 배웠는데 자기 나라 방언을 섞어서 요들을 했다고 65년에 기사가 난 거예요. 그때는 스위스와 수교 전이라 우리나라에 대사관 영사관도 없고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르죠. 그런데 방송을 듣고 신문사로 전화, 편지가 많이 와서 초청을 해주었어요. 그때 제가 KBS 전속가수 8기로 들어갔는데 수속을 하는데 어렵더라고요. 결국 6개월 만에 여권이 나와서 갔죠.
◇ 스위스 취리히에서 온 편지
▶ 경비는 어떻게 마련하셨어요?
=그 스위스 신문사와 관광성이 주축이 되어서 여비를 다 대주었어요. 유럽에서 제일 유명했던 500년 전통의 호텔에서 죠스미드 라는 밴드마스터의 공연도 보고 가는 곳마다 TV와 신문에 나와서 유명인사가 되었죠.제 노래를 동남아시아의 고양이 소리라고도 표현했는데 학생이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 하더라고요. 클럽을 다니면서 한국에도 좋은 노래와 클럽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 팬도 있었겠어요?
=지금의 스위스 대사가 자기가 당시 법대 공부를 하면서 TV에 나온 저를 봤었다고 하더라고요. 대부분 나이 드신 스위스 분들은 알아보세요. (웃음)
▶ 당시 21세였는데 여성 팬들도 많았겠어요?
=16살 된 스위스 아가씨가 자기 집에 오면 뽀뽀를 해준다고 해서 갔어요. 레스토랑을 하는 집이었는데 오빠가 계속 따라다녀서 뽀뽀할 기회를 안 주더라고요. (웃음) 스위스는 양쪽 볼에 뽀뽀하는 것이 인사였는데 갈 때 역 앞에서 살짝 입에 뽀뽀를 해주었어요. 그 뒤로 독일어로 편지가 오는데 사전 찾기도 어렵고 해서 연락은 끊겼지만 10년 후에 확인해 보니 시집가서 아이 낳고 잘살고 있더라고요. (웃음)
▶ 첫사랑인가요? (웃음)
=뽀뽀가 처음이라 하늘이 노랗기는 했지만 첫사랑이라고 하기에는... (웃음)
▶ 6개월 동안 스위스에 나가계셨는데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제가 십 남매의 여덟째라 돈 내고는 못 가죠. 그 당시는 해외에 나가면 못 돌아오는 줄 알던 시절이라 온 가족이 공항에 마중 나오고 그랬어요. 또, 그때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왔다고만 해도 신문에 날 정도라 한국에 돌아와 보니 제 기사도 났더라고요. TBC의 ''모닝쇼''를 비롯해서 방송국 출연요청도 많았어요.
▶ 어렵게 모셨는데 요들송 한 곡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요즘 날씨도 좋으니까 ''''여행'''' 들려드릴게요.(흥겨운 기타반주와 함께 스위스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요들송을 직접 불러 주셨습니다.)
◇ 가족과 함께 부르는 사랑의 세레나데
▶ 테이프만 듣고 독학을 하신 건가요?
=일단은 집에서는 이상한 노래한다고 하고 했지만 가족들이 음악을 다 좋아해서 큰 형님과 막내가 20년 터울이 지는데 큰형님이 음악선생님이거든요. 가족이 다 교회에 다니고 저녁이면 기타 들고 모여서 노래도 했는데 그런 것들이 많이 도움 되었던 것 같아요.
▶ 6남 4녀, 십 남매를 부모님이 어떻게 공부를 다 시키셨어요?
=그때는 낳아놓으면 다 자라지 않았어요? (웃음)
▶ 고향이 서울인데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아버님은 건축 청부업을 하셨는데 제가 초등학교 때 이화여대 교육관인가를 짓고, 누가 인감을 위조하는 바람에 사기를 당해서 완전히 망했어요. 가족 모두 군용텐트를 들고 응암동 산속에 들어가서 살았는데 쥐도 나오고 겨울에는 추워서 죽을 뻔도 했어요. 1년 동안을 형들이 아르바이트도 하고 가족들이 고생했는데 저는 어린 마음에 자연의 풀냄새가 좋았어요. 제가 결혼을 늦게 해서 어머님과는 시간을 많이 보냈는데 저를 무척 좋아하셨어요.
▶ 돈은 많이 버셨나요?
=빛 좋은 개살구라고 TV에는 잘 나왔지만 요들송을 들고 야간업소를 다니겠어요? (웃음) 악기를 좋아하니까 개인적으로 기타를 가르쳐주면서 72년에 일본에서 처음 들여온 크로마 하프를 보급도 시켰어요. 그리고 83년에 스위스 친구 세 명과 독일사람, 오스트리아 사람과 함께 이태원에서 ''''샬레 스위스''''라는 레스토랑을 동업했죠. 월급과 배당을 받으면서 운영은 제가하고 자금은 그 사람들이 냈는데 돈을 벌기보다는 음악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원했어요. 스위스 주방장을 모셔 와서 제대로 했는데 치즈 퐁듀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보급하기도 했죠. 오픈 당시에는 거의 대부분이 외국인이었어요. 그런데 외국인이 점점 한국친구를 데려오기 시작하면서 6개월 후에는 밥도 못 먹을 정도로 바빠졌어요. 얼마나 바쁘던지 한 달 새 8㎏이 빠지더라고요.
▶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35세를 3일 남겨 놓고 했어요.
▶ 굉장히 늦으셨네요. 부인은 어떤 분이신가요?
=그 당시에는 연예인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서 결혼하기 힘들었어요. 집사람은 ''''보라 트리오''''라는 노래 선교단 출신인데 LP 판 낼 때 제가 코러스를 해준 것이 인연이 돼서 요들송도 가르쳐주면서 좋아하게 되었죠. 7남매중 막내인데 아홉 살 차이가 나서 사람들이 저더러 도둑놈이라고 그랬어요. (웃음) 집안 반대가 심해서 집사람이 장인어른께 매도 맞고 그랬어요.
▶ 캐나다에는 왜 가신 건가요?
=가기 힘든 스위스에 나가보니 국제적인 감각도 익히고 좋았는데 여권을 쉽게 내주지 않는 우리나라 현실이 이해가 안 갔어요. 우리 아이들에게는 국제적인 감각과 언어능력은 키워주고 싶었죠. 스위스는 너무 비싸서 엄두가 안 났고, 캐나다 이민을 신청했는데 다행히 받아주더라고요.
▶ 식당은 정리를 하셨나요?
=그 당시 동업했던 친구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정리를 했죠. 그냥 놔둘 걸 괜히 정리한 것 같아요. (웃음) 그 후 20대의 똑똑한 청년과 무역업을 했는데 그 청년이 시름시름 앓다가 29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을 했어요. 그래서 투자한 것을 다 날리고 말았죠. 다행스러운 것은 집사람이 스트레스를 전혀 주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요들송을 들으니까 눈물이 나면서 음악이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 그곳에서는 음악활동을 안 하셨나요?
=캐나다 현지 TV에 한번 나갔어요. 목장에서 스위스의 세인트 버나드 견(犬)과 함께 하루 종일 찍었는데 상당히 잘 나와서 1년에 한 번씩 방송에 나오는데 거긴 초상권도 없나 봐요. (웃음) 그리고 다국적 채널인 멀티채널의 독일어권 방송에는 몇 번 출연을 했고, 공연요청을 하는 ''''베를린 클럽''''이라는 곳의 무대에 서기도 했어요.
▶ 가족은 지금 캐나다에 있나요?
=25살 큰아이는 불어를 전공하고 스위스 호텔학교에 간지 1년 정도 됐고, 23살의 작은 아이는 국제관계와 일어를 복수전공해서 올해 졸업하면 일본의 관공서에 근무할 예정에 있어요. 집사람은 조용해서 그곳이 더 좋다고 하는데 어느 시점에서 가면 함께 살아야죠..
▶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나요?
=민속 문화협회를 만들어서 요들송뿐만이 아니라 알프스 지방의 악기들도 체계적으로 보급을 하고 싶어요. 보급이 많이 되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좋을 것 같아요. 지금 새삼스럽게 돈 욕심을 내거나 방향을 바꾸겠어요? (웃음) 평생 해오던 음악을 하면서 지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