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0년대 최고의 인기가수였고 독특한 음색과 장발로, 조금은 술에 취한 듯 몽환적인 분위기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를 때면 정말 ''''오빠'''' 라는 환호 소리가 장내를 휩쓸었다.
작곡에도 아주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 동생 윤복희 씨와 더불어 가요계를 휩쓸었고 별이 빛나는 밤에, 장밋빛 스카프, 나는 어떡하라구 등 숱한 히트곡의 제조기였다.
절정을 맞은 것은 바로 1979년 서울국제가요제 대상을 수상한 ''''여러분''''... 윤항기 씨가 작사 작곡을 했고, 동생 윤복희 씨가 부른 명곡 중의 명곡이다.
그런데 돌연 80년대 말 윤항기 씨는 스크린에서 사라졌고 지금은 우리 곁에 목회자로 돌아왔다. 음악목사 배출을 위해서 음악대학도 설립하고 그 학교의 원장을 맡고 있는 윤항기 목사님을3월 26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다.
◇ 음악 선교를 통한 평화의 메시지
▶ 정말 오랜만에 뵙는데 예전에 제가 알던 목사님은 예술가적인 기질이 넘치시는 그런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풍채도 좋아지시고 정말 목사님 같으세요.
=팬들도 못 알아보시더라고요. 어떨 땐 조금 섭섭해요. (웃음)
▶ 요즘의 근황이 궁금합니다.
=너무 많은 일에 감사하면서 분주히 보내고 있어요. 주로 학교 일과 학교 안에 교회가 있어서 목회도 하고, 전도 집회에도 많이 초청받아서 가고, 교단 일도 있고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했는데 주님의 일을 하다 보니 무엇이든 해야지요.
▶ 예음음악신학교는 어떤 학교인가요?
=국내에 목회자 양성하는 많은 신학교가 있는데 우리 학교는 국내 유일의 음악목사를 양성하는 신학교입니다. 교파에 상관없이 음악목사, 음악선교사를 양성해서 미개발 지역, 아프리카나 중동 지역에도 내놓고, 선교를 할 수 없는 곳에도 음악학원식으로 진출해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지요. 음악이라 영어와 중국어는 기본적으로 가르치고, 각 교회에서 찬양인도자가 꼭 필요한데 양성하는 역할도 하고 있어요.
▶ 목사님도 음악목사 이신가요?
=저도 음악목사죠. 우리나라에서 제가 공부할 때만 해도 교단에 없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공부하고, 목사 안수까지 받고 한국으로 나왔죠.
▶ 학교를 설립한 지 얼마나 되셨나요?
=거의 17년 정도 됐어요. 학교에서 배출된 제자들이 꽤 많습니다. 국내보다는 해외선교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 학생은 많나요?
=소수정예라 학부에 120명, 원부에 40명, 모두 160명입니다.
▶ 학교의 입학조건이 까다롭나요?
=영성을 가장 중요하게 봅니다. 시험을 볼 때도 면접은 제가 직접 하죠. 음악, 성경 다 시험을 봅니다.
▶ 1986년 아시안게임 때 ''''웰컴 투 코리아'''' 하시고 안 보이셨어요.
=그때부터 신학을 시작했어요.
▶ 갑자기 신학을 하신 이유가 뭔가요?
=제가 뒤늦게 주님을 영접하고 짧은 기간 동안 신앙체험을 하고 꼭 신학을 해야겠다는 결심한 것은 친구가 전도사로 있는 작은 개척교회에 성가대 지휘를 해달라고 해서 생전 처음 하면서였어요. 삼사십 명 되는 교인 중에 성가대 대여섯 명을 놓고 지휘를 하는데 수백 명 놓고 오케스트라지휘도 하는 것보다 더 떨리더라고요.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훈련 없이 하면 안 되겠다 생각하고 교회 음악을 고민하다가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지요.
50년대 제가 했던 음악은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고 했지만 교회 음악은 클래식에 가깝고 제가 해왔던 음악이 아니었어요. 전도사였던 그 친구가 학교를 추천해줘서 교회 음악을 배우게 됐는데 찬송가 304장(어머니의 넓은 사랑)과 304장(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을 작곡한 구두회 박사님에게 교회 음악을 처음 배우기 시작했지요. 처음부터 신학을 하려고 해서 한 것이 아니라 교회 음악을 하기 위해서 공부하게 된 것이지요.
▶ 20대도 아니고 인기 좋은 가수여서 수입도 괜찮았는데, 느닷없는 결심에 가족들의 반응은 어떠셨나요?
=제 아내가 반대는 안 했어요. 저를 전도한 것도 아내였거든요. (웃음)당시 가수의 수입에 가장 큰 부분은 야간업소 출연이었는데 교회 음악을 지휘 하면서 야간업소에 가는 것이 너무 싫었어요. 술 취하고 소위 방방 뜨는 밤의 정서와 공연무대 자체가 싫어서 일부러 유흥업소의 계약이 끝나면 재계약을 안 했어요. 그러면서 나중은 어떻게 됐든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공부를 해보자는 결심을 했지요. 또, 우리 남매는 학교에서 정규교육을 못 받았어요. 그런 환경의 아픔이 항상 마음에 깊은 상처였는데 이번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면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더 굳혔지요.
▶ 미국에 가셔서는 어떤 공부를 하셨어요?
=중서부 쪽에서는 큰 신학교인 미드웨스트 신학대학에서 음악 목회과정과 대학원과정을 마치고 90년도에 음악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에 나왔어요.
▶ 말씀은 너무 쉽게 하시지만 과정이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생활은 어떻게 하셨나요?
=가족은 한국에 있고 제가 왔다 갔다 하면서 공부했어요. 한국에 나오면 방송을 했는데 신학공부를 하고 있다고는 공개하지 않았죠.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어요. 제가 아이가 다섯이거든요. 딸이 넷에 아들이 하나인데 윤 씨가 손이 귀해서요. 지금 같으면 국가로부터 표창도 받았을 거예요. (웃음) 그때는 아내에게 무조건 맡겼죠. 그래도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고 아주 헌신적이었어요. 아내의 많은 기도와 알뜰한 생활로 아이들 공부시키고 제 학비도 해결이 되었지요.
◇ 오페레타의 히로인과 유랑극단 남매
▶ 1943년생이면 환갑이 훨씬 지났죠?
=한국 나이로 65세입니다.
▶ 고향이 어디세요?
=저나 세 살 아래인 동생 윤복희나 다 서울 태생입니다.
▶ 형제는 그렇게 남매세요?
=이복형님과 누님이 있는데 형님이 목사이고 누님이 전도사세요. 형님과 누님이 기도를 많이 해주셨지요.
▶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버님이신 윤부길 선생님과 어머님 고향선 선생님을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소개를 좀 부탁드릴게요.
=일찍 돌아가셨지만 한국현대예술사에 큰 획을 그으신 훌륭한 분들이세요. 아버님은 서울대 음대의 전신인 경성음악전문학교에서 작곡과 성악을 전공하시고 일본에 유학 가서 한일 콩쿨대회에서 테너로 일등을 하실 정도의 실력가셨어요. 어머님은 무용가로 일제강점기에 유학 가서 최승희 선생님 밑에서 배우셨어요. 두 분이 결혼하셔서 한국 최초의 오페레타인 ''''견우와 직녀'''', ''''콩쥐 팥쥐''''를 초연하셨고 악극을 처음으로 하셨어요. ''''부길부길쇼''''라고 그 당시에는 굉장히 유명했었죠. 그런데 너무 일찍 단명을 하셨어요. 제 나이 10살 때, 어머니 나이 서른에 돌아가셨어요. 강원도 묵호에서 지방공연하시다가 무대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3, 4년 후에 돌아가셨지요.
▶ 얘기를 들어보면 부모님이 예술가로서는 뛰어나셨는데 부모님으로는 좀...
=시대가 너무 암울했었지만 선친께서 예술에 대한 열정은 엄청나셨어요. 그렇지만 가장으로서의 역할은 잘 못하셨어요. 갑자기 돌아가셔서 모아둔 재산도 없고 형님과 누님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천애 고아가 되었죠. 그리고 문제는 그 당시에 부모님이 유랑극단에서 공연을 다니셨어요. 그때는 저희만 그런 것이 아니라 트럭 타고 포장에 천막치고 가족들이 다 따라다녔어요. 학교도 못 갔고요.
▶ 남매 둘이서만 사셨나요?
=부모님 돌아가신 이후로는 저희 남매가 따로따로 헤어졌어요. 그전부터 동생은 아버지가 항상 데리고 다니셔서 6살 때 중앙극장 무대가 윤복희의 첫 무대였어요. 저는 극장 근처도 못 가게 하셨어요. 아들에게 전수하고 싶지 않으신 마음에 그러셨는데 지금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때는 편애한다는 생각에 아버지가 미웠죠. 저도 무대에 서고 싶었거든요. 동생을 데리고 아버님이 공연 다니고 저는 후배나 친구 집에 맡겨놓고 공부를 하라고 하는데 공부가 됩니까? 하숙비를 안 보내주니까 구박도 받고 도망과 배회를 하면서 어려서 본의 아니게 할 짓, 못할 짓 많이 했어요.
◇ 해병대 탈영범의 런어웨이
=깡통 차고 거지 노릇도 해보고 고아원에 들어가기도 했죠. 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공부할 수도 없고 방황만 하면서 원망도 많이 했지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19살에 동생을 만났는데 동생은 16살로 해외공연을 떠나게 되니까 있을 때가 없어서 호구지책으로 해병대에 자원해서 들어갔어요. 육군은 나이제한에서 걸리고 해군과 공군은 중졸이상이라 학벌에서 안 되고 그때는 유일하게 해병대만 학력에 제한이 없어서 입대를 했죠. 군대 가서 너무 행복했어요. 옷 주죠, 담배에 건빵 주죠, 작지만 용돈도 주죠.
▶ 그런데 탈영은 왜 하셨어요?
=훈련을 마치고 동생이 한국에 잠깐 나왔어요. 보고 싶어서 2박3일 특별외박을 나왔는데 동생의 힘든 모습에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동생은 다시 가야하고 저는 계속 그 날짜에 못 들어가고 날짜를 넘기니까 본대에서 하사관들이 찾으러 오고 난리가 난 거예요. 어리니까 도망을 다녔죠. 하루, 이틀이 한 달, 두 달이 되어서 6개월을 도망 다녔어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여자 친구를 사귀어서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 그러다 5.16혁명이 나고 이후의 자숙기간에 자수를 하면 많이 감안이 된다고 해서 자수를 했지요. 그래서 동기들보다 반년 늦게 제대했어요.
▶ 노래는 언제부터 하셨어요?
=17살에 작곡가 김희갑 선배님이 미8군 쇼에서 밴드마스터로 있을 때 밑에서 연구생으로 노래를 배우겠다고 쫒아 다니면서 배웠어요.
▶ 너무 오랜만에 모셨는데 노래 한곡을 듣고 싶습니다. 공연이 곧 있는데 직접 작사, 작곡하신 ''''여러분''''을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네가 만약 외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 줄게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친구야나는 너의 형제야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야나는,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네가 만약 외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 줄게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친구야나는 너의 형제야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야나는,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 윤복희 씨의 노래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네요. 더 가슴 아프고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요. 이 곡을 만든 배경이 궁금합니다.
=이 곡을 만들기 직전에 폐결핵 말기로 병원에서 1년 이상 살 수 없다는 사형선고를 받고 좌절과 고통을 겪었어요. 아내와 동생이 금식기도 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렸고 저는 제가 살아온 뒤안길을 돌아보면서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많은 아픔을 주었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저도 저의 죄를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지요. 그것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계기가 되었고 국제가요제에서 우리 남매를 초청한다는 소식에 기도하면서 곡을 만들었어요. 이사야 41장 10절의 기도응답을 받아서 만든 곡인데 대상을 받은 것도 이렇게 쓰시려고 하신 것 같아요. (웃음)
◇ 바늘과 실의 30년만의 재회
▶ 이 노래 제목으로 정말 오랜만에 남매가 무대에 함께 서시지요?
=30년 만이죠. 77년에 대한극장에서 처음으로 남매가 공연을 하고는 처음이에요. 더군다나 주님 안에서는 처음 같이 하는 공연이죠. 4월17일(화) 오후 8시 서울 세종문화회관대극장에서 하는데 하루 공연이에요.
▶ 가수 윤항기 씨의 노래를 다 들을 수 있나요?
=물론이죠.
▶ 공연내용은 어떻게 되나요?
=부제가 부활절음악회이고 저희 남매로서는 의미 있는 합동공연인데 부활절의 기쁨과 행복을 믿음의 유무를 떠나서 많은 분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 동생 윤복희 씨는 목사님의 삶에서 어떤 의미인가요?
=우리 남매는 바늘과 실입니다. 항기와 복희는 사실 어느 한 쪽만 있었어도 됐지만 항상 어디를 가도 그 이름이 따라와요. 제 삶의 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지요.
▶ 가끔 무대에서고 싶지는 않으세요?
=작년겨울에 오랜만에 7080 콘서트를 했었어요. 열린 음악회도 해봤는데 많이 좋아해 주시더라고요. 이제는 기회가 되면 팬들과 만나야겠다는 생각도 해요. 복음을 전하는데 더 도움이 되는 것도 같고요. (웃음) 너무 귀한 시간을 통해 인사드릴 수 있어서 감사하고, 모든 분들에게 2007년이 건강한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