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촌장'' 하덕규 "나의 방황은 신의 선물"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시인과 촌장''의 노래하는 음유시인 하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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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영혼을 지닌 사람, 늘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자신의 음악에 정직하려 노력하는 사람, 어린 시절 뛰놀던 드넓은 동해바다와 푸른 설악산을 가슴 한 켠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

노래에 인생을 걸었던 사람, 본명보다 ''''시인과 촌장''''으로 더 잘 알려진 사람… 바로 노래하는 음유 시인, 하덕규다.

그는 이 시대가 나은 시인이자 촌장이다. 이상을 꿈꾸는 시인과 현실 속을 살아가야 하는 촌장처럼 도시에서 살아가지만 고향을 그리워했고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살면서도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고집했다.

결국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에 방황하던 그는 술과 담배에 의지해 살아야 했고, 한때 마약에 빠졌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누구보다 건강한 정신으로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

노래하고, 곡을 만들고, 시를 쓰고,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하루를 1년처럼 바쁘게 살아가는 가수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를 2월 26일 CBS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다.

◇ 갈수록 학생들의 눈빛 대하기 어려워

▶ 개인적으로 하덕규씨 노래를 좋아해서 한번 만나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마주앉기는 처음이에요. 그런데 보니까 아직 젊으시네요.

- 올해 우리 나이로 오십이에요. 다른 분들은 50세가 되면서 힘들어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삶의 중압감 같은 것들을 가지시는 것 같은데 저는 그런대로 행복하고 괜찮은 것 같습니다.

▶ 아름답고, 무언가 새로운 것들을 시작하는 나이인 오십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웃음) 하덕규 씨 팬이 굉장히 많아요. ''''오빠'''' 하는 팬들은 아니더라도 정말 가슴 속으로 좋아하는 팬들이 많이 있는데 방송에서 하덕규 씨 목소리 듣기는 요즘 어려워요

- 몇 년 만에 처음인 것 같아요. CBS에서 DJ를 십 수 년 해서, 이 스튜디오도 굉장히 익숙해요. 손 숙 선생님 앉아계신 자리가 제 자리였거든요. 감회가 새롭고, 다시 보니 좋네요. 예전에는 직장 없이 프리랜서로 노래를 불렀는데 몇 년 전부터 백석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시간을 내기가 어렵고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일도 그 일 때문에 조금 소홀히 하게 됐죠.

▶ 아이들을 가르쳐 보시니까 어떠세요?

- 갈수록 힘들어요.(웃음) 제가 성숙해 간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갈수록 학생들의 눈빛을 대하기가 두렵다는 생각이 들고, 얼마 전에 노랫말로 쓰기도 했는데 결국에는 아이들에게 잘 살라고 하는 건데 과연 내가 잘살고 있는 건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돼요. 하지만 굉장히 재미있게 지냈고 즐거웠습니다.

▶ 하덕규 씨 노래 중에 주옥같은 곡들이 많은데 한계령, 가시나무, 사랑일기.. 정말 많은 곡들이 팬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는데 지금까지 나온 앨범이 몇 장이에요?

- 정규앨범은 10장 냈고요, 또 여럿이서 같이 만든 앨범이 몇 장 있습니다.

▶ 이제 준비하고 계신 것은 없나요?

- 늘 해야지 하면서 몇 년이 흘렀어요. 6년 동안 공백이었으니까 나올 때가 됐죠.

◇ 암울한 느낌의 단편소설 ''''시인과 촌장''''

▶ 올해는 새로운 곡 기대를 해 봐야겠네요. 저는 시인과 촌장이라는 이름이 너무 좋더라고요. 누가 지으셨어요?

- 원래는 저희가 지은 게 아니고 서영은 선생님의 단편소설 제목이에요. 제가 대학시절 때 창작과비평사의 책들을 구독했는데 그 속에 시인과 촌장이라는 아주 암울한 느낌이 드는 단편소설이 있었어요.

그런데 음반을 내고 가수가 되면서 처음에는 다른 이름이었는데 그 이름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팀 이름으로 정하고 활동할 때 사용했어요. 서영은 선생님의 소설이 주는 뉘앙스 자체가 우리 시대에 주는 이미지가 있었어요. 그런 것들을 젊은 시절에 공감하면서 표현하고 싶은 마음으로 팀 이름을 삼았는데 나중에 서영은 선생님을 뵀는데 도용한 것을 기꺼이 허락해 주셨어요.

▶ 소설이 사람한테 주는 인상이 굉장히 강한 것 같은데 저는 예전에 박경리 선생님의 책을 읽다가 ''''가화''''라는 여자의 이름이 나왔어요. 그때 딸을 낳으면 가화라고 지어야지 그랬던 적이 있었는데 시인과 촌장이라는 이름이 그래서 나온 거군요.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하덕규 씨 노래를 들으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베어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고향이 어디세요?

- 태어난 곳은 강원도 홍천이고요, 아주 어렸을 때 두 살인가 세 살 때에 속초 근방으로 이사를 가서 거기서 열 살까지 자라다가 서울로 이사를 왔어요. 부모님의 고향은 이북이셨고 피난 내려오셔서 정착을 하셨죠. 속초에 가면 이북에서 오신 함경도 분들이 많으신데요, 저희 부모님은 평안도 분들이세요.

▶ 몇 남매세요?

- 9남매였어요. 아버님이 이북에서 형님들 세 명을 데리고 오셨고 여기서 저희 어머니랑 재혼하셔서 6남매가 태어났어요. 9남매 중에 제가 일곱째입니다.

▶ 부모님이 9남매 학교 보내고 먹이시려면 굉장히 힘드셨을 것 같아요.

- 그 당시에는 형제들이 많아도 어떻게든 건강하게 잘 컸던 것 같아요.

▶ 그런데 10살 때 왜 서울로 올라오셨어요?

- 아버님이 양조장을 하셔서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어요. 아이들이 조금씩 자라면 서울로 유학을 보내셨는데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저 혼자 왔어요. 누나들은 이미 와 있었고요. 전학을 와서 누나들과 같이 살았는데 저는 유달리 고향을 그리워했어요. 그래서 서울이 너무 싫었고 제가 자랐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들이 많이 쌓여서 그런지 대학을 미대에 다니면서 그림을 그릴 때도, 그 이후에 음악으로 전환을 해서 노래를 할 때도 계속해서 작품에 나타나는 것들은 잃어버린 고향의 이미지들이죠.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던 것 같아요.

◇ 소년.. 낯선 곳에서 길을 헤매다

▶ 초등학교 3학년 때 그 어린 나이에 전학을 오면 대도시의 이질감과 스트레스 같은 것도 있었을 것 같아요.

- 서울의 학교 이미지가 참 싫었어요. 제가 사립학교에 다녔는데 분위기가 적응이 잘 안됐고 아이들이 병약해 보이고 왠지 가식적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아무튼 서울이 그런 느낌으로 와 닿았어요. 고향에는 방학 때마다 가서 지내다 왔죠.

▶ 고향 하면 주로 어떤 이미지를 떠 올리셨어요? 속초 쪽은 떠올릴 이미지가 많잖아요.

- 제가 사는 곳은 속초에서 20리 올라간 곳에 있는 어촌인데요, 아주 가난한 마을이었어요. 앞에는 바닷가고 뒤에는 설악산의 줄기가 굉장히 아름다웠죠. 아버지 따라 꿩 사냥도 하고 또 바다에 나가서 물오리 사냥도 하고 고기도 잡아서 먹고 했던 기억들이 많죠.

▶ 그런 소년을 서울에 데려다 놨으니... 혹시 환경 때문에 성격은 안 변하셨어요?

- 제가 열한두 살쯤에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그때부터 감수성이 예민하고 내성적인 사람이 됐어요. 형님들은 이미 장성하고 결혼하신 분들이셨고 우리들은 어렸는데 누나가 소녀가장이었어요. 누나가 그 당시 고등학생이었고, 그때부터 도시생활을 어렵게 했는데 그래서 아마도 시골에서 행복했던 때를 잃어 벼렸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것 같고 폐쇄적으로 성격도 변한 것 같아요.

▶ 낯선 서울의 환경과 아픈 가족사 때문에 많이 힘이 드셨겠어요.

- 사실 지금은 부모님을 이해하죠. 이미 아버님은 십 수 년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님은 미국에 계신 데, 어머니의 소녀 시절 얘기, 어머니가 어떻게 아버지와 살게 되셨는지 얘기도 듣고 어머니하고 얘기를 참 많이 해요. 어머니가 초등학교 선생님도 하셨고 굉장히 똑똑한 여성이셨어요. 원래는 어머니께 약혼자가 있었는데 인민군으로 나가서 전사했던 것 같아요. 어머니도 나라가 분단되는 바람에 포로수용소에 있는 오빠를 찾으러 내려왔다가 못 가게 된 거죠. 그래서 유력한 사람을 찾아가서 오빠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던 사람이 바로 우리 아버지였어요. 아버지 집에서 머물면서 찾을 때까지 기다려 봐라 했던 것이 불가피하게 가정이 만들어진 거죠. 이렇게 만들어진 가정이 굉장히 많아요. 그 가운데서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거죠.

▶ 어머님은 미국에 가시고 6남매는 나중에 어떻게 되셨어요?

- 다들 생활력이 강하고 어렸을 때 고생을 해서 지금은 다 잘 살아요. 다시 가정이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따로 살면서 나중에 어머님을 미국으로 모셔가서 지금 거기서 살고 계시죠. 아버님은 형님 댁에서 사셨어요. 저는 그런 과정들을 보면서 우리 민족사의 아픔이 여전히 우리 가정을 관통하고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신앙을 갖게 되면서 치유되는 과정들을 경험했어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들을 편하게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 전쟁으로 빚어진 가족사

▶ 어머니는 미국에서 재혼은 안 하셨나요?

- 재혼은 안 하셨어요. 어머니를 뵐 때마다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사셨구나 하는 마음이 들죠. 사춘기 때 상처를 많이 받았을 때는 반항도 많이 하고 가출해서 설악산을 많이 갔어요. 그림도 그리고 앉아 있다가 오기도 하고 여러 번 그랬어요.

▶ 가족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마치 소설 같기도 하고 드라마 같기도 하고, 전쟁이라는 것이 당사자들만 힘든 게 아니고 자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 우리 가족사는 전쟁으로 빚어진 가족사잖아요. 그런 아픔의 거대한 강줄기라고 할까요, 거대하게 구성원들에게 흐르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아요. 한이라는 정서로 대변할 수 있을 것도 같고, 경험하면서 젊은 날들을 보냈죠.

▶ 하덕규 씨 노래에는 늘 한이 서려 있는 것 같아요. 유명해 지시고 돈도 좀 버셨고 생활도 안정적이셨을 텐데 왜 그렇게 방황을 하셨어요?

- 그때는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내 안에 상처와 상실감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한때는 약물도 했지만 깨고 나면 너무 허무했어요. 신앙을 갖게 된 서른 이전까지 방황이 계속 됐던 것 같아요. 요즘의 연예계에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는데 너무 안타까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이 갈수록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윤리 같은 것들이 점점 약해지고 사라져 가고, 가치가 상대화되다 보니까 무엇이 절대적으로 중요한지 잃어버리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생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힘들면 버리게 되고, 그냥 소중하고, 중요하고, 나에게는 둘도 없는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 요즘에는 술, 담배는 안 하세요?

- 벌써 이십 년이 넘었지요.

▶ 고향이 사람의 상처를 보듬어 주죠. 사람들은 행복할 때 고향 생각 안하는 것 같아요.

- 그래서 가면 더 좋았지만 또 돌아올 때 허전한 것도 있어요.

◇ 고향에 대한 그리움, 약물에 의존하기도

▶ 하덕규 씨의 그림이나 음악에 고향의 영향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세요?

- 제가 크리스천이 되기 전까지는 자연과 고향이 제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해 줬던 것 같아요. 그리고 노래하는 의미도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내용이 주된 내용이었고요. 사람들에게 음악을 통해서 자연을 펼쳐보여서 위안을 얻고 우리가 생각해야 할 본질적인 순수의 회귀 같은 것들을 노래를 통해서 말하려고 했기 때문에 저에게는 너무나 삶의 중요한 화두였고 대 주제였어요.

▶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하셨어요?

- 그건 아니고 그림을 잘 그렸어요.

▶ 이상하게 노래 잘 하시는 분들 보면 그림도 잘 그리시더라고요. 그런 쪽으로 재주들을 타고 나신 것 같아요. 그럼 화가가 되실 생각을 하셨어요?

- 초등학교 때부터 오로지 그 꿈을 갖고 있었는데 대학을 들어가면서 제 안의 끼를 발견했다고 할까요? 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하다가 우연히 아마추어 콘테스트 노래자랑에 나갔다가 이종환 선생님의 셀부르에서 시작을 하게 됐어요. 그룹을 만들어서 같이 나갔죠. 처음에는 팝송이 아니라 제가 직접 만든 곡을 불렀어요.


▶ 어떤 노래였는지 생각나시나요?

- 가물가물해요. 경연대회에 나가서 1등을 했는데 그때부터 노래를 시작했어요. 아마추어 무대에 서기 시작하다가 유명했던 가수 한 분이 갑자기 방송을 펑크 내는 바람에 FM 라디오에서 대타가 필요했는데 마침 우리밖에 없어서 방송국에 가서 노래를 불렀어요. 제가 만든 노래를 불렀는데 그때 거기 계신 PD 한 분이 눈여겨보다가 레코드 회사를 소개했어요. 그때 방송에서 팀 이름을 물어보는데 얼떨결에 시인과 촌장이라고 대답을 했어요. 계획한 게 아니었고 다만 마음에 두고 있다가 셋이서 하다가 둘이 하게 됐는데 팀 이름을 못 정하고 있었던 거죠. 같이 노래했던 친구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는데 지금은 노래를 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고 있어요.

▶ 그럼 미대에 다니면서 노래를 하신 거예요?

- 사실 미대를 다니면서 평론과 작품보다는 이론 쪽에 관심이 많아서 미학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미국유학을 가고 싶어서 음반 한 장 내서 돈 벌면 가리라 했는데 첫 음반이 소위 히트가 안 되는 바람에 못 갔어요. 그때부터 고민을 참 많이 했어요. 그림을 다시 그려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몇 년 지나면서 결국은 예술이라는 것이 자기표현이고 자기 안의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건데 재료의 차이일 뿐이지, 어떻게 보면 음악이 확산력이 강하고 좀 더 대중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음악 하는 게 재미있고 고생은 되었지만 그 길을 가기로 결심했죠. 지금도 아내하고 은퇴하면 그림 그리러 시골로 가자고 해요.(웃음)

◇ 노래와 시로 스케치한 하얀 도화지

▶ 그 노래 중에서 한계령은 고향의 얘기잖아요. 그런데 자신이 한계령의 원작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왜 그렇게 주장을 하는 거죠?

- 제가 만났어요. 아직도 미스터리한 부분이긴 한데, 자기가 시 낭송회를 열었는데 그때 제가 그곳에 갔고 노랫말을 가져갔다는 거예요. 그 부분은 제가 기억나지 않아요. 물론 가끔 노래들을 쓸 때 모티브를 얻어올 수는 있어도 남의 것을 베껴다가 자기 것으로 하는 것은 안 되는 거죠. 곡을 쓰다 보면 단 한 줄이라도 모티브를 얻어올 수 있는데, 제 노래 중에 그런 노래들이 있어요. ''''누구도 외딴 섬이 아니라''''든지 이런 것들은 영국 시인의 제목을 따 온 것이기도 하고 이런 것들은 토를 달아주기도 하는데 그게 24~5년 된 너무 오랜 일이라서 혹시 제가 기억에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분이 원작자라면 너무 큰 실례를 범하는 거잖아요.

▶ 그런데 그분이 그걸로 옛날에 발표를 한 적이 있나요?

- 아니요. 그리고 중간 단은 양희은 선배에게 곡을 드렸을 때 너무 허무주의로 흐르는 것 같아서 두 줄을 고쳤어요. 심의에 걸려서 양희은 선배가 고쳤는지, 양희은 선배가 심의에 걸릴까 봐 고쳐서 넣었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그분이 낸 시집을 보니까 고친 그대로 실어 넣은 거예요. 그러니까 노래가 나온 다음에 작년인가 재작년에 시집이 나온 거죠. 혹시나 그분의 시를 한 구절이라도 모티브를 얻었다면 그것은 인정해 드려야 하는 부분인데 그런 기억이 없어요. 곡을 썼던 기억, 멜로디를 붙이던 기억까지도 생생한데 그분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해 굉장히 노력을 했고 그분이 시집에 싣겠다고 할 때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그러나 계속 문제가 된다면 제 제작권과 관련해서 법적 분쟁까지도 생기니 주의를 해주고 아름다운 노래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얘기를 했죠.

▶ 이렇게 어렵게 모셨는데 가시나무 한 곡을 안 들어 볼 수가 없어요. 부탁드릴게요.

-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 (박수) 감사합니다. 언제 들어도 너무나 아름다운 곡입니다. 그런데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 89년에 해서 고등학교 1학년 딸과 중학교 2학년의 아들이 있어요. 지금은 가족이 다 미국에 있는데 정말 못 할 짓이에요.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것 자체가 아픔이고 외롭고 한 줄로 쓴다면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 제일 소중한 것이 가족이다''''라는 걸 알았어요.

혼자서 왔다갔다 해봤는데 너무 어려워서 학교에 휴직계를 내고 곧 떠나요. 신학공부를 하고 있는데 미국에서 2년 정도 공부를 하고 오려고요. 가족이 많이 좋아해요. 아이들이 아빠가 없는 공백이 있는데 역시 가족이 함께 있는 것이 최고의 공부인 것 같아요.

◇ 나의 방황은 신의 선물, 가족은 나의 힘

▶ 우리가 시골서 자라면서 느꼈던 정서를 아이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이 늘 가엽고 안타까웠는데 자녀와는 주로 무슨 대화를 나누세요?

- 솔직한 이야기 많이 하고 성상담도 해요. 솔직하게 대화하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요즘은 성이라는 것이 가정 밖의 범위로 너무 범람해서 학생들에게는 잘못된 가치관으로 자리 잡힌 것 같아요. 하나님이 가정 안에만 허락하신 선물인데 오용하고 있는 세상이잖아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많이 얘기를 합니다.

▶ 자녀들이 한국에서 나고 자랐는데 그곳에 적응을 잘 하고 있나요?

- 오히려 그곳에 더 맞아 해요. 한국에서는 공부 잘하고, 온순하고, 제도에 잘 적응하는 아이들이 모범생인데 딸아이는 그렇지 못했어요. 자기주장이 강해서 선생님들께 야단도 많이 맞고 적응을 못 했지요. 본인이 먼저 보내달라고 해서 보냈는데 너무 힘들어하니까 집사람도 가게 되고 가족이 다 가게 된 것이죠.

▶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하면 어떤 일을 하실 건가요?

- 저는 목사가 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은 아니고 신학과 선교학을 같이 공부해서 제가 지금 하고 있는 분야에서 일하고 싶어요. 기독교 실용음악이라는 분야는 제가 최초의 전공자인데 아직은 한국에 이론도 없고, 대학에서 가르칠 만한 교재도 완성되어있지 않거든요. 그런 기반을 가지고 이쪽 분야에 텍스트를 만들고 학생들 가르치고 나름대로 방향을 제시하고 싶은 소원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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