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 당시 여자 의용군 예술대에 자원입대한 ''''용감한 여군''. 정치권 한복판에서 제 목소리를 내었던 ''''대한민국 국민''''. 항암 투병 중에도 방송과 강의를 쉬어 본 적 없는 ''''억척스런 전문가''''.
극작가로서 우리말을 바로 잡고 말의 세계를 넓혀온 ''''꿈꾸는 글쟁이''''. 고희의 나이에도 후배 양성에 힘을 쏟는 ''''열정적인 스승''''....
이 많은 표현 중, 그래도 그의 삶을 가장 잘 드러낸 말은 엄앵란, 윤정희, 김지미 같은 당대 내로라하는 여배우들의 목소리를도 맡아 연기한 ''''천의 목소리''''라는 것!
지금도 여전히 아름다운 목소리로 드라마처럼 굴곡 많던 자신의 지난 인생을 생생하게 재연하고 있는 성우 고은정을 7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났다.
(인터뷰 전문)
▶ 고은정 선생님 앞에서 방송을 하려니까, 이 발음이 맞나 하는 생각에 벌써 떨립니다. 평소에는 종종 뵙는 분이지만 이렇게 스튜디오에 모시니까 새롭네요.
- 제가 더 떨립니다. (웃음)... 사실, 새벽에 위경련이 일어나서 죽다 살아났습니다. 아이 낳는 것보다 더 아프더군요. 그런데도 제일 걱정이 되는 것은 역시 방송이었어요. 작년에 어머니 돌아가실 때도 그 이튿날 나갈 방송이 없어서 그냥 방송을 했거든요. 돌아보니 방송을 최우선으로 놓고 평생을 살았네요.
▶ 참 방송이라는 것이 그래요. 대중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늘 개인의 삶은 뒤에 놓아야 하는 것 같아요. 선생님은 우리에게 늘 다정한 선배, 그냥 말없이 지켜봐 주시는 선배님이셨는데 사실 고은정 선생님 하면 한 시절에 지금의 스타들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인기를 누리셨잖아요.
- 글쎄 누렸는지는 몰라도 즐기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밤낮 앞으로만 가느라고 허덕거렸지...
▶ 근데 목소리는 안 늙나 봐요? 특별히 목소리 관리를 하십니까?
- 사람의 인체 중에서 목소리가 제일 안 늙는다고 그러더라고요. 특별히 관리를 하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아침에 일어나면 물을 마시는 습관이 있어요. 그리고 누가 가르쳐주지는 않았지만 늘 목에 스카프를 감고 다니지요. 잘 때도 하고 자고.
▶ 목소리도 타고나는 것인데 부모님 중에 누굴 닮으셨는지 궁금해요.
- 글쎄요, 너무들 일찍 돌아가셔서... 친어머니는 여덟 살에 돌아가시고 키워주신 어머니는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이 제가 초등학교 독창회 때 ''''엄마 있다가 와''''하고 아침에 등교했는데 집에 오니까 이미 돌아가셨더라고요. 엄마는 저를 무릎에 놓고 밀레의 그림을 설명해주고,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설명해주셨지요. 지금도 그때가 유년의 향수로 남아 있어요.
▶ 그 시절에 밀레와 차이콥스키라... 흔하지 않은 정서인데요.
- 어머님과 아버님은 두 분 다 경기고와 연세대를 나오셨어요. 특히 어머님은 일본에서 나고 자라셨지요. 아버지는 상과공부를 하시고 우리나라 최초의 유통업인 동아부인상회의 지사장으로 계시다가 나중에는 독립을 하셨고 6.25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그 이후에는 우리 다섯 남매를 새어머니가 혼자서 다 키워주셨어요. 새어머니는 어머니가 막냇동생을 낳으실 때 조산원을 하셨고, 직접 막냇동생을 받아주셨지요.
▶ 그런 아픈 사연이 있는지는 정말 몰랐어요. 늘 목소리가 고우시니까 누굴 닮으셨는지 궁금했어요.
- 아버지 돌아가실 때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어요. 그때 부산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떠나실 줄 알고 동생들 돌봐야겠다는 생각에 각오를 하고 올라왔어요. 그때는 서울에 있던 학교가 다 부산에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자식은 서울로 보내라''''고 하지 않느냐고 우겨서 다섯 남매 중에 유일하게 혼자 내려가 있었죠. 새어머니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 남매를 다 시집 장가보내셨어요. 평생을 우리 다섯 남매를 위해 사셨죠.
▶ 의용군에도 입대를 하셨던데 언제 입대를 하신 건가요?
- 6.25전쟁이 나고 9.28수복을 하면서 평양과 신의주를 비롯하여 제가 다니던 서울의 작은 중학교까지 뭔가를 하겠다고 다들 의지를 불태웠어요. 그땐 사회분위기가 막 가슴을 뛰게 했어요. 이젠 통일된다고... 여자도 뭔가를 해야겠다고 한참 결의에 차 있을 때 여자의용군에서 예술대를 모집한다고 학교로 통문이 왔다고 해요. 한성여고의 밴드도 오고 동덕여고의 무용부도 왔지만 우리 학교는 공식적으로 합창부를 보내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끼리 자원해서 갔죠.
▶ 그때가 열 여섯이셨는데 가니까 더 어린 학생도 있고 그랬나요? 또, 합창단으로 가셨는데 군대생활 이야기가 궁금해요.
- 우리가 제일 어렸어요. 예술대가 일반 병과의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가 적었지요. 그래도 훈련받을 것 다 받고 새벽이면 남산도 뛰면서 여군하고 똑같이 훈련했어요. 다른 것은 그 사람들이 병과에서 총기공부를 할 때 우리는 뭐 무용연습, 조선 춤, 합창연습, 발성 등의 연습을 했죠. 부대에 가서 위문공연을 하려는 것이었는데 중공군들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부산으로 밀려갔지요. 처음 부산에 도착해서 배에서 내리는데 산은 코앞에 닿을 것 같고 춥기는 엄청나게 춥고 생전 처음 집을 떠난 거라 낯설고....
영도의 어느 교사에 갔는데 유리창이 깨지고 흙이 버적버적 하는데 두세 명이 한 장씩 가지고 온 담요를 쌓아 놓고 오버를 걸치고 그 위에서 자는 거예요. 얼마나 어린 마음에 찹찹해요. 밤중에 집 생각이 나서 잠을 설치고 있는데 밖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들려오는 거예요. 잠 못 이루고 창가에 서니 아주 커다란 달이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볼멘소리로 ''''어둠에 묻힌 밤...'''' 하는데 더는 할 수가 없더라고요. 얼마나 부둥켜안고 울었는지 몰라요.
▶ 그럼 집에는 언제 오신 건가요?
- 그 다음 해에 발이 다쳐서 의무실에 있는데 저를 예뻐하시던 목사님이 일부러 찾아오셨어요. 그러면서 막 타락한 여자를 보듯이 화를 내시는 거예요. 난 너무 억울했죠. 나라를 위해서 의용군 갔는데... 그래도 그때 목사님이 2만 원 용돈을 주시고 가셨어요. 지금 생각해도 신통한 것은 제가 그걸 가지고 나가서 도넛츠 하나를 안 사먹고 보들레르, 쉘리, 바이런등 2만 원어치 시집과 책을 샀어요. 그걸로 막사 한 귀퉁이에 서가를 만들어서 같이 보자고 했지요. 그러다가 휴가를 가라기에 그만두었어요. 공부도 해야 하고... 그래서 난 공연도 못 했어요.
▶ 그때부터 문학소녀셨군요. 제가 오랫동안 선생님을 잘 알았는데 군대 얘기는 처음 알았어요. 진짜 용감하셨어요. 열여섯이면 어린 나이인데... 그럼 지금도 군번이나 이런 것이 남아있나요?
- 그럼요. 남아있죠. 군번도 있고 육군제대처리가 되어서 참전용사로 정부에서 돈도 나와요. 근데 그게 생활이 될 만큼 받으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웃음)
▶ 상상 못할 어린 시절을 보내셨는데 성우는 어떻게 되셨어요?
- 난 참 신기한 것이 피난시절인데도 연극이니 음악이니 할 건 다했어요. 우리나라가 대학 무대경연대회를 그 전쟁 통에도 했으니.... 고등학교 내내 연극을 하고 대학교에 갔더니 우리 학교가 연극경연대회 2회에 출연을 한다고 해요. 그래서 지원을 해서 남자단역으로부터 시작해서 활동을 했죠. 그러다 선배 하나가 ''''방송극회원모집''''을 한다며 시험을 보자고 해서 아르바이트로는 최고일 것 같아 시험을 봤죠. 우리 학교에서 4명이 봤는데 나까지 두 명이 붙었고 그나마도 한 명은 몇 년 하다가 죽고 저만 남았어요.
▶ 보통 스타가 되는 사람들은 다 그냥 쫓아갔다가 되고, 열심히 간 사람은 떨어지고 그러더라고요. 들어가서는 어떠셨어요?
- 어느 분야건 고난이 없으면 열매가 없는 것 같아요. 맨 처음 가서 석 달을 연수받고, 3월 1일에 애국시 낭송을 하라고 그래요. 50년대의 특집은 다 시낭송이었는데 어제 연수 끝나고 오늘 바로 뽑혔으니 얼마나 가슴이 벅찼겠어요. 그때는 살기도 어려웠고 라디오도 몇 대 없었는데 온 세상이 내 목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설레었어요. 삼천만이 내 목소리를 듣는다고 흥분해서 스튜디오에서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때 당시 최고로 높은 분이 막 들여 다 보시는 거예요. 저는 제가 잘해서 그러는 줄 알았죠.
끝나고 사우나 한 것처럼 후련하게 딱 문을 열고 나왔는데 그분이 소리를 지르시는 거예요. 연습 때 뭐 들었느냐고. 너무 마이크 앞에서 강하게 하는 바람에 마이크 속에 납이 진동해서 들어가는 핀 하나가 붙어버렸던 거예요. 생방송이라서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엔지니어는 발만 동동 구르고..
그 다음부터는 안 뽑히더라고요.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시험을 봐서 정식 아나운서가 됐는데 이건 또 너무 재미가 없는 거예요. 매일 시간을 고지하는 방송과 ''''역사의 향기. 박진자, 김기대 연출.. 버드나무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이러고 딱딱한 멘트만 하는데 우리 동기들은 ''''아씨~ 호호호! 마님~ 하하하!'''' 울고 웃으면서 드라마 녹음을 하는 거예요. 저게 진짜지..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진짜지 나는 이게 뭔가 하는 생각에 너무 속이 상해서 후회했어요. 마이크에서 ''''지금까지 나오신 분 누구에 누구..'''' 하려니까 숨이 탁 막히는 거예요. 재미가 없으니까 잘 못하게 되더라고요. 게다가 예뻐해 주시던 계장님마저 미국에 간 사이에 차장님이 그렇게 핀잔을 주시는데 ''''미스 고! 케이비에스지 게이비에스가 뭐야! 그리고 에취엘케이가 뭐야! 에이취엘케이지.''''
▶ 그래서 다시 성우로 전향하셨나요?
- 프리랜서로 다시 일했죠. 그때부터 ''''청실홍실''''을 필두로 라디오 드라마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어요.
▶ ''''청실홍실''''은 56년 당시에 저도 들었어요. ''''산 넘어 바다 건너 조남사 작作 이보라 연출..'''' 그때당시 저희 집에는 라디오가 없었고 셋방 사시는 아주머니가 라디오가 있었는데 그 라디오방송 드라마를 들으려고 툇마루에서 한 시간씩을 앉아서 기다리던 기억이 나네요. 고은정 선생님, 주상현 선생님, 고민 선생님, 김소원 선생님..... 정말 저에게는 꿈의 스타였거든요.
- 59년에 ''''장희빈'''' 할 때는 이미 밥 먹을 시간도 잠잘 시간도 없었어요. 한번은 ''''장희빈'''' 방송이 나갈 때 목욕탕에 갔는데 여자들이 수건을 가리고 우르르 나와요. 카운터에서 ''''장희빈''''을 듣겠다고 벗은 채로 다 나와서 있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어머나 여우~''''하면서 전부 다 욕을 하고 저는 태연스럽게 목욕을 하고 나왔죠.
▶ 선생님 얼굴을 못 알아봐서 생기는 일화도 많았을 것 같아요.
- 많았죠. 상상보다 아름다운 건 없으니까요. 사실은 제가 그렇게까지 못나지 않았건만 라디오를 들으면 너무 최고로 해놓으니까 어떻게 저렇게 넙대대하냐면서 놀래요. 반대로 엄앵란 씨는 영화에서는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 가는 소린데 실제 목소리는 아니라고 사람들이 놀라니까 아예 밖에 나오면 말을 하지 않았어요.
▶ 영화에서 후기녹음이 한창 전성기일 때는 하루에도 몇 편씩 하시고 그러셨나요?
- 그걸 어떻게 하루에 몇 편을 해요. 최고 기록이 18시간인데 요새도 남아있는 ''''맨발의 청춘''''이 정말 앉을 시간 없이 서서 밥 먹으며 한 영화예요. 그 한 시간 반짜리 영화의 완성을 위해 밤낮을 대사를 맞추고... 회상해 보면 난방도 냉방도 안 되는 방에서 얼음물 드럼통에다 수건을 넣었다가 목에다가 메고 더우니까 땀이 발등으로 뚝뚝 떨어지는데... 남자들은 피곤하니까 담배들을 피워대고.. 또, 겨울에는 부츠신고 목도리 두르고 있는데 엄앵란 씨가 찍어 온 하와이 바닷가 신에서 ''''아이 시원해요~~ ''''... 그 코미디는 말도 못해요. 그래도 즐겁게 한 일이니까 고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또, 그런 시절을 거쳐서 영화가 오늘날에 이른 것이고요.
▶ 정말 그 뒷얘기는 책으로 써야 할 것 같네요. 그런데 고은정 선생님 하면 보통 우리나라 최고의 성우라는 것은 모두가 알아요. 하지만 뛰어난 작가라는 사실은 많은 분이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작가는 언제 데뷔를 하셨는지 말씀해 주세요.
- 최선을 다 해 성우를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늘 풀리지 않는 것이 있었어요. 66년부터 이미 방송에서 ''''고운 정 미운 정''''이라는 십 분짜리 칼럼을 써왔고 청탁원고도 많이 썼지만 해마다 신춘문예에 대한 갈증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내게 맞는 분야인 MBC 라디오 공모전에 올케 이름으로 이민 얘기를 써서 응모를 했지요. 선입관 때문에 가명으로 냈는데 그게 당선이 되었어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관계자 한 분이 저더러 욕심쟁이라면서 ''''당신은 방송의 금자탑이야''''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금자탑은 서 있으면 되지만 나는 사람이니까 가야 해!''''
▶ 그 많은 방송활동과 집필활동과 인기... 세상 적으로 굉장히 부족함 없는 돈과 명예를 가지셨는데, 돈 때문에 고생을 하셨다는 말을 들었어요.
- 사업하는 육촌 동생에게 집문서를 맡겼다가 쫓겨날 위기에 처해서 아직도 이자를 물고 있지요. 별로 공개하고 싶지는 않은데 어쨌든 그걸 통해 신앙이 바로 서는 계기가 됐으니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나라 사업하는 사람들 반성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사기성을 가지고 사업하면 언제 사회가 맑아지겠어요.
▶ 유방암수술을 2000년에 하셨는데 지금은 괜찮으신 건가요?
- 방송위원 할 때 종합검진 받고 재검진 하라고 해서 받았다가 암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근데 정신없이 방송할 때라 입원하기 전날까지 일하고, 수술하는 날도 원고를 썼어요. 크리스마스에 나갈 특집방송이었는데 취재는 해 놓고 방송원고가 없어서 그 작업을 하느라 병원에 입원해서도 일을 했지요. 이틀 밤을 새우면서 원고를 써내려갔는데, 수술 받는 당일 날 아침까지 완성을 못 한 거예요. 첫 수술로 예정되어있었는데 결국은 원고 다 완성하고 세 번째로 수술을 받았어요.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간호사가 영양주사를 놓는데 이틀 밤을 못 잤으니까 그냥 자연스러운 마취가 되어버렸어요. 수술실에 어떻게 들어갔는지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고 깨어나니까 이미 병실이더라고요.
▶ 우리가 농담으로 바빠서 죽을 시간도 없다고 하는데 진짜 너무 하셨네요. 그래도 수술이 잘 끝나고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뵈어서 정말 좋습니다. 지금도 늘 바쁘게 일하고 계시는데 앞으로 하실 일들에 대한 계획들이 궁금해요.
- 제가 해야 할 일은 쓰는 일이에요. 앞으로 2월이면 개강을 하는 학교 두 곳과 KBS 아카데미 등을 해야지요. 그렇다고 일을 막 찾아서 하지는 않아요. 그냥 내 본분이라고 생각하지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저의 본분과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CBS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