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은 ''낙서투성이''

[이서규의 영어와 맞짱뜨기]

영어
중국의 만리장성에서 가장 인상깊게 본 것은 산맥을 따라 굽이굽이 올라간 성벽이나 웅장한 산세가 아닌 장벽에 있는 벽돌에 빼곡하게 적힌 낙서들이었다.

하긴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에서도 박지원이 장벽에 시 한 수를 남긴 장면이 등장하니 만리장성의 낙서도 장벽만큼이나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 것 같다.


간혹 우리말 문장에서 자주 쓰이는 동사를 그대로 영어로 옮겨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말로 ''낙서를 쓰다, 낙서하다''를 ''to write something on the wall''이라고 옮기면 아주 어색한 문장이 된다.

돌이나 벽돌에 분필을 이용해 글을 쓰기도 하지만 유명한 유적지에 가면 한결같이 못이나 기타 예리한 도구로 돌과 벽돌에 자기 이름, ''누가 왔다 간다'' 등 유치한 글귀를 새겨 넣는다.

이런 행동은 문화재 파괴행위이며 글을 쓴다기보다는 조각하는 것이다. 또 글뿐 아니라 그림을 그리기도 하니 ''write''가 아니라 ''scribble''이라는 말을 사용해 ''to scribble on the wall''이라고 말해야 정확하다.

베이징 지하철의 화장실은 우리의 60년대 시골학교 화장실을 연상시키는데 낙서내용이 재미있다.

세계 곳곳의 화장실은 전부 성에 관련된 낙서가 많은 것이 공통점인데 우리나라는 여기에 하나 더 ''장기매매 연락바람''이라는 내용의 낙서가 많다.

건강하게 살기 위해 불법으로 매매한 남의 장기라도 원하는 것을 보면 한국인의 꿈은 건강(health)과 장수(longevity)라면 중국화장실에는 ''용모단정한 남성이 당신을 기다립니다''라며 동성애 파트너를 찾는 낙서가 많다.

이런 낙서를 보면 그 나라 서민들이 자주 사용하는 속어가 등장해 아주 재미있는데 필자는 화장실에도 사전을 들고 다니는 버릇이 있다.

그런데 사전에서 어떤 단어의 뜻을 찾을 때 우리말로 ''찾다''를 사용하면 역시 된장냄새 풀풀 나는 Konglish가 된다. 일단 우리가 찾는 것은 모르는 단어가 아니라 단어의 뜻이 설명된 사전의 한 부분이다. 영어식으로 말하면 단어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사전을 살펴본다(to look up the dictionary)''가 더 어울린다.

초등학교시절에 학교에 가기 전에 반드시 한 일 가운데 연필을 깎는 일이 포함돼 있었다. 우리 말로는 깎는다는 말이 조각을 새길 때를 의미하는 ''carve''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영어에서는 무뎌진 연필 끝을 다듬는 ''sharpen''이 더 어울린다.

이처럼 낙서 하나, 연필 한 자루, 사전 한 권을 사용해도 영어와 우리말이 다르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마치 각 나라의 낙서내용처럼 말이다.

※필자는 영어, 독일어, 에스파냐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등 5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한국 토박이로, ''교과서를 덮으면 외국어가 춤춘다''의저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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