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식당에 갔는데 식당 아줌마가 쟁반 대신 씨네21에 라면을 담아왔고, 그 잡지에는 시나리오 공모 마감일 일주일 전이라는 광고가 나와있었다. 그때 쓴 시나리오가 바로 ''조용한 가족''. 이후 시나리오 당선소식을 어머니께 알렸더니, 어머니는 아주 슬픈 눈으로 "이젠 거짓말까지 하냐?"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조용한 가족''을 찍을 감독이 없어서 그참에 아예 영화감독이 됐다는 김지운 감독은 "중요한 것은 자기가 생각한 대로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김지운 감독의 영화와 삶 이야기를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들어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영화감독 김지운
- 서울 토박이시죠?
홍은동에서 자랐고, 본적은 삼각동으로 돼있어요. 지금의 종로와 을지로 사이에 삼각동이 있었어요. 일제 때 포목점이나 옷가게가 많았는데. 저희 할아버지가 거기서 양복점을 하셨대요. 나름대로 신흥 부르주아였던 것 같은데, 저희 아버지 대에서 다 말아드신거죠.(웃음) 제가 태어났을 땐 가세가 바닥까지 기운 상태라 일 년에 두 번씩 이사를 다녔어요. 게다가 식구들이 많아서 한방에 여섯 명의 형제들과 부모님이 함께 지냈어요. 마치 흥부전을 연상시키죠.
그런데 그때는 우리가 그렇게 못 사는지 잘 몰랐어요. 아버지가 동네유지셨고, 사법서사도 하셨어요. 당시엔 동네 분들이 글을 잘 모르시니까 이력서나 한자 쓸 일이 있으면 아버지께 맡기셨죠. 저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가 존경을 받고, 우리 집이 잘 산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경제적 지표로만 잘 산다고 얘기하는데, 당시엔 그런 게 잘 산다고 여겨졌던 것 같아요.
- 5살 무렵에 포스터를 붙이고, 아버지 몫의 영화 초대권을 받아서 극장에 간 게 영화와의 첫 인연이라고요?
사회성의 기초단위가 가정 다음에 학교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 전에 극장에서 세계를 배웠던 것 같아요. 변두리 동네의 삼류극장이라 작은 창구에 초대권과 100원을 같이 넣으면 그냥 들어갔는데요. 그때 성인물도 처음 봤어요. 반공영화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세미 포르노 영화였어요. 마지막에 반공영화로 끝나긴 해요. 90분 동안 애정표현이 과도하게 진행되다가 나머지 10분 동안 반공을 설명하는 영화였죠. 서울에 남파된 북한 간첩이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90분 동안 과도한 애정행각을 한 다음 나머지 10분 동안 개과천선하는 내용이었어요.
- 영화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매력적이었나요?
제가 서너 살 때부터 그림을 그렸는데요. 그림 그리면서 상상한 것들이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훨씬 완벽한 상태로 나오니까 재밌었어요. 또 저희 아버지가 한량들이 갖춰야 할 필수조건 중 하나인 영화 마니아였어요. ''명화극장''이나 ''주말의 명화'' 시간에 아버지가 영화를 보시면서 그 영화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많이 얘기해주셨어요. 예를 들어 제임스 딘이 말론 브란도에게 평생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거나, 셜리 템플이라는 아역배우가 유엔 대사였다는 얘기 등 모든 면에 박학다식하셨어요. 지식의 창고였죠.
- 보험설계사인 어머니를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면서 사람들을 구경했던 경험이 훗날 영화감독이 되는 데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하셨는데요. 사람들의 어떤 모습이 가장 인상 깊었나요?
측은지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그 감정이 뭔지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사람들을 보면서 뭔가 막연하게 슬픈 감정을 느꼈던 것 같아요. 게다가 거기가 버스종점이라 너무나 다양한 군상들을 보게 됐는데요. 제가 영화를 보면서 수없이 봐왔던 캐릭터들과 유사한 상황이나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게 재밌었어요. 시골에서 살았던 작가들의 자연에 대한 경외감 같은 게 오늘날 작가로서 많은 자양분을 제공하는 것처럼, 저에게는 도시 속의 번잡한 공간들이 영화감독으로서 창작의 자양분이 된 것 같아요.
- 그림을 잘 그렸는데, 아버지는 무척 반대하셨다고요?
당시 아버지들이 아들에게 바라는 로망은 법관이었죠. 법관이 돼야 하고, 또 환쟁이는 배고프니까 제가 그림 그리는 족족 찢으셨어요.
- 누나가 연극배우이신 김지숙 씨죠? 형제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6남매고요. 지숙이 누나 위에 형과 누나가 계시고, 복싱 IBF 챔피언이었던 김지원 형, 그리고 누님이 한분 더 계시고, 제가 막내예요. 저 같은 경우 성격은 아버지의 한량적인 모습이나 로맨티스트의 모습, 그리고 어머니의 현실적이고 냉정한 쿨함을 같이 물려받은 것 같아요.
-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나요?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마당에 핀 장미를 쳐다보시면서 "저 장미가 나의 유일한 친구"라는 표현을 한 적이 있었어요. 하루 종일 저 장미에게 얘기를 하고, 장미의 얘기를 듣는다고. 가끔 저에게도 그런 감성들이 보일 때 아버지의 낭만적인 부분을 타고나지 않았나 싶어요. 아버지께 물려받은 재산은 책장과 책밖에 없었어요. 이사 갈 때마다 책짐이 제일 많았어요. 그때부터 제가 짐을 잘 쌌어요. 특히 책 싸는 건 출판사의 사원 못지않죠.
- 서울예대 연극과에 다니다가 군대에 갔다 온 후에 제적당한 걸 알게 됐다고요?
제가 다른 수업은 잘 들어갔는데 군사훈련 교련시간을 안 들어갔어요. 마지막만 들어오면 점수를 주겠다고 했는데, 마침 마지막 수업시간에 제가 좋아하던 LG 프로야구 경기가 있었어요. 그거 보느라고 마지막 수업을 못 들어서 학적변동이 되는 바람에 제적당했어요.
- "학교 자퇴 후 10년 가까이 사회생활에서도 자퇴였다"고 하셨는데요.
어머니가 퇴근해서 집에 오시면 제가 세수도 안 한 얼굴로 문을 열어드렸죠.(웃음) 그 모습을 저희 어머니가 매일 보셨으니 얼마나 답답하셨겠어요. 제가 부지런했으면 어머니 들어오시기 전에 나가야 하는데, 그 타이밍도 잘 못 맞추겠더라고요. 게으름의 극단을 가고 있을 때였죠. 그러다보니 어머니가 시나리오 당선 소식을 믿지 않으신 것도 당연하죠.
- 용돈은 어떻게 해결했나요?
간간히 막노동을 했어요.
- "백수생활도 리듬을 잘 타면 부드러워지고 유연해진다."고 하셨는데요.
성공하려면 성취욕이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남이랑 부딪혀야 하고, 때로는 남을 밟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백수는 목적이 없으니까 현실의 투쟁심이나 공격본능이 많이 약화되고, 그래서 부드러워지는 것 같아요.
- 백수로 지내면서 불안하지 않았어요?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런데 그러면서도 백수로 평생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불편하지도 않았고요. 그리고 이상한 긴장감이 내 안에 있었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언젠간 무엇을 할 것이기 때문에 지금 잘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죠. 그러면서 책도 많이 읽고, 생각도 많이 했어요.
사람이 좋은 의지를 갖고 있으면 그 의지가 실현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한 번도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았어요. 그게 저에게 좋은 힘으로 작용했던 것 같아요.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면 남을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정말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언젠가는 무언가를 할 거란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게 중요할까를 많이 고민했고요. 내가 지금 어떤 포지션에 있느냐에 따라 내 10년 후가 결정된다고 생각이 매번 선택의 기로에서 좋은 선택을 하게 해준 것 같아요.
- "어느 날 식당 아줌마가 쟁반 대신 씨네21에 라면을 담아온 게 시나리오를 쓴 계기가 됐다"고요?
대학로에 있는 작은 라면집에 갔는데요. 아줌마가 쟁반 대신 시네21에 라면을 올려놓으셨어요. 라면 국물을 다 마시고 보니까 거기 씨네21이 있었고, 그 안에 공모전 소식이 있더라고요. 당시 저는 2년 정도 사귄 여자친구랑 헤어졌기 때문에 가뜩이나 시간 많은 백수가 더 시간이 많아진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최초로 생산적이 일을 해보자 싶어서 시나리오를 썼어요. 그때 처음 쓴 시나리오가 ''좋은 시절''이라고, 80년대 신군부가 정권을 찬탈하는 과정을 고등학교 폭력서클 간의 암투과정으로 옮겨놓은 내용이었고요. 그 다음에 쓴 게 ''조용한 가족''이었어요. 그 두 작품이 몇 달 사이로 연거푸 당선됐어요. 그런데 당시엔 우리나라에 하이브리드 장르가 없어서 ''조용한 가족''의 감독을 찾기 여의치 않았어요. 그래서 명필름에서 "네가 썼으니 네가 연출해보라"고 해서 제가 감독을 하게 된 거죠.
저 때부터는 영화감독이 되는 루트가 다양해진 것 같아요. 감독은 보통 오랫동안 현장생활을 통해 인정을 받은 현장파와 해외유학파, 시나리오 당선파, 그리고 단편영화를 통해서 장편영화를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요. 저는 시네마테크파라고 할 수 있어요. 프랑스 문화원이라든가 영화관을 통해 영화를 보면서 혼자 독학한 경우죠.
- 첫 영화를 만들 때의 느낌은?
영화 한 편 잘못하면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니까 관객 반응이 오기 전까지는 불안했죠. 그리고 당시 나의 조감독이었던, 저보다 현장 경험이 훨씬 많은 친구가 제 영화를 보더니 "이 정도면 신인감독치곤 괜찮은데요. 망하진 않겠어요."라고 말해서 또 상처받았어요. 조감독이 감독의 작품을 갖고 그런 말을 하니까요.
- 혼자서 모든 걸 하는 습성이 영화를 만드는 데 핸디캡을 작용하진 않았나요?
힘들었어요. 제가 적극적으로 말을 건네는 편이 못 되는데, 감독은 모든 걸 장악하고 계속 리드해가야 하잖아요. 그래서 사람을 만나서 무언가를 설명하는 게 힘들었어요. 지금도 그런 게 힘들어요.
- ''조용한 가족'' 캐스팅은 어떻게 이뤄졌나요?
당시 송강호 씨는 ''넘버3''로 한창 뜰 때였는데요. 송강호 씨도 그렇고, 최민식 씨도 그렇고 시나리오를 재밌게 보셨대요. 그리고 두 분 다 훈련된 배우이고, 무대 공연을 통해 수많은 희곡이나 작품이 습득된 상태여서 새로운 형태의 시나리오도 쉽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 송강호 씨는 어떤 분인가요?
굉장히 내성적이고,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이에요. 모든 관심은 영화에만 있고, 다른 건 잘 몰라요. 오로지 영화 얘기만 하고, 영화만 생각해요.
- ''장화, 홍련''에서는 염정아씨가 특히 인상적이었는데요.
당시 염정아 씨는 미스코리아 출신으로 세련된 직종의 여성 역할을 많이 했는데요. 실제로 만나보니 굉장히 털털한 분이었어요. 그런데 이상한 지점에 극도로 과민 반응하는 보습을 봤어요. 예를 들면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했죠. 그런 모습을 계모 캐릭터로 옮겨놓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털털하면서도 한쪽으로는 예민하고 집착적인 부분이요. 그런 걸 영화 안으로 옮겨놨는데, 염정아 씨가 훌륭하게 연기해줬어요.
- ''달콤한 인생''을 찍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요.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돌아가실 땐 군에 있었고, 어머니 돌아가실 땐 촬영장에 있었어요. 당시엔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싶었어요. 지금도 어머니가 계신 것 같고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집에서 우연히 전화기 녹음 재생 버튼을 눌렀는데, 어머니 목소리가 녹음돼있는 거예요. 어머니가 전화기 안내응답 멘트를 그대로 따라서 녹음하셨더라고요. 그거 들으면서 엄청 울었어요.
- 요즘 근황은?
다음 작품의 시나리오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어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가제)라는 영화인데, 세 명의 캐릭터가 나오고, 장르는 마주를 배경으로 한 웨스턴이에요. 우리나라 60년대에 만주를 배경으로 하는 만주액션 장르가 있었는데, 그에 대한 약간의 오마주 같은 성격도 있어요.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 있는 조선의 마적단들 얘기인데, 세 명의 캐릭터 중 ''이상한 놈'' 역에 송강호 씨가 캐스팅돼있어요. 제일 궁금증을 유발시킬 수 있는 캐릭터죠.
- 김지운 감독님께 영화는 무엇인가요?
술꾼들은 현재의 무의미한 시간을 견딜 수 없어서 술을 마신다고 하잖아요.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성공을 하든, 경제적 부를 쌓든, 그런 건 저의 행복과는 상관이 없고요. 그런 것들을 충만한 시간으로 돌리고 싶어서 영화 작업을 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내가 태어나서 어떤 아름다운 것들을 봤기 때문에 나도 누군가에게 그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