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만에 돌아온 패션계의 대모, 디자이너 이신우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이신우

11월 1일 서울컬렉션이 열렸던 무대 뒤. 8년 만에 패션쇼를 앞둔 디자이너 이신우의 입술은 바싹 타들어가고 있었다. 매번 쇼를 할 때마다 찾아오는 긴장과 두려움이었지만 이번 무대는 남달랐다.

6,70년대 한국 디자이너 1세대로서 세계에 한국 패션을 알리는데 큰 공을 세웠던 디자이너 이신우. 탄탄대로를 걷던 그녀의 패션 인생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건 1998년 IMF 위기 때였다. 전부를 잃었던 그녀를 두고 절친한 친구인 탤런트 김혜자는 "신우야, 돌지 마. 신우야, 돌지 마"라는 말만 연신 되풀이했다고 한다.

사업 부도에 이어 사랑하는 남편마저 몸져눕게 됐지만 다시 옷을 만들겠다는 그녀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힘든 시기에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것은 딸이자 동료 디자이너인 박윤정. 악몽 같은 8년간의 좌절과 실패를 딛고 치른 패션쇼에서 눈물과 웃음이 교차했고, 큰 갈채박수를 받았다.

멀고 험난한 길을 돌아와 다시 옷을 만들고 있는 패션 디자이너 이신우의 이야기를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들어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패션 디자이너 이신우


-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행사를 잘 끝내서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 이번 서울컬렉션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저보다 더 긴장하고 힘들었던 사람은 총감독을 해준 제 딸 박윤정이었어요. 저도 힘들었지만 그동안 최선을 다했으니까 결과에 대해서는 담담하게 그냥 눈앞에 닥친 일만 열심히 했어요. 제가 한참 활동할 때 저의 옷을 좋아해주고, 개인적으로 저를 아껴주던 많은 분들이 쇼가 끝난 후 무대 뒤로 와주시는 걸 보고 최선을 다한 보람을 느꼈어요.

- 고향이 어디세요?

서울 숭의동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 어렸을 땐 어떤 아이였나요?

아버지가 피복 공장을 하셨고, 어머니는 공장 감독을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자연스럽게 거기서 놀면서 자랐죠. 특히 공장에서 일하는 아저씨들과 친했어요. 제가 노래도 부르고, 그림도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유명한 극을 보고 온 날은 구경꾼들이 모아놓고 흉내를 내기도 했고요. 그리고 저는 다락방에서 잘 놀았어요. 다락방엔 별 게 다 있었어요. 천 조가리들, 앨범들 등. 굉장히 좁고 지저분한 공간이었지만 거기가 참 좋았어요.

- 부모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아버지는 음악이나 미술, 춤 등 예술에 재능이 많은 분이셨어요. 그래서 젊었을 때 부모님 몰래 일본에 건너가서 큰 의류회사의 디자인실에서 일하셨대요. 그러다가 ''전일본 연미복 콘테스트''에서 1등을 하셔서 상으로 동남아 여행권을 받으셨대요. 그래서 여행을 하던 중 한국에 들어왔다가 부모님께 붙잡혀서 일본에 못 돌아가시고 결혼하셨대요.

- 탤런트 김혜자씨와는 언제 만나셨나요?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동창이에요. 근데 중고등학교 땐 그 친구나 저나 혼자 외톨이 같고, 우울한 표정을 짓던 학생이었어요. 사회에 나와서 친해졌죠.

- 사진첩 속 얼굴에 만년필로 성형수술을 해서 난생 처음 어머니로부터 종아리를 맞으셨다고요?(웃음)

네. 눈이 작은 사람은 다 눈을 크게 그려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화내신 게 당연해요. 그 사진들이 얼마나 소중했겠어요. 게다가 한두 장만 그런 게 아니라 사진첩 몇 권을 다 그랬으니까요.

- 1960년에 이대 서양학과에 입학하셨는데요. 당시의 패션 트렌드는 어땠나요?

60년대 패션이라는 레트로 스타일이었어요. 허리가 잘록하고 스커트를 많이 붙여 입고.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 스타일이 막 유행하기 시작하는 시점이었어요. 근데 그렇게 예쁜 실루엣을 별로 팔지 않아서 저는 스스로 페티코트를 만들어 입었어요. 머리도 맥주로 염색했고요. 노란 머리에 페티코트를 만들어 입었기 때문에 남다른 실루엣을 만들 수 있었죠.

- 이대 재학 중에 결혼을, 서울대 공대 출신의 ''미팅 응원단장'' 박주천 전 의원을 만나 결혼하셨는데요.

네. 그땐 결혼하면 학교를 다닐 수 없었어요. 그래서 중퇴를 했어요.

- 근데 ''미팅 응원단장''이란 게 뭔가요?

남편 말로는 당시엔 미팅이란 게 없어서 남학생과 여학생이 만날 기회가 없었대요. 근데 어느 날 우연히 YMCA에서 주최한 큰 쌍쌍파티에 가게 됐대요. 가보니까 문 밖으로 여학생 한 줄, 남학생 한 줄씩 쭉 서서 손을 잡고 입장을 했다가 입장과 동시에 손을 놓고 헤어지더래요. 그걸 보고는 이렇게 대규모 단위로 해선 되는 일이 없겠다 싶어서 착안한 게 과대과 미팅이었대요. 그래서 첫 번째로 서울대 화공과와 이대 불문과 미팅을 시도했대요. 학생대표 4명이 무조건 이대로 찾아갔는데, 경비실에서 못 들어가게 막더래요. 그래서 남편 혼자 무작정 어느 교실로 들어갔는데, 거기에 불문과 학생들이 있었나봐요. 곧바로 단 위에 올라서서 미팅 제안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 남편이 구본광산에 취직하면서 충청도 청양군으로 가게 되셨는데요.

아주 시골이었어요. 거기서 2년 동안 살았죠. 근데 저는 광산에 갈 때도 기타 들고, 잡지책 끼고, 애기를 업고 갔어요. 낭만적인 생활을 시작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나도 이런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자부심도 느꼈고요. 근데 부모님은 제가 굉장히 고생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잠깐 친정집에 다니러 왔다가 돌아가는데, 제 등 뒤로 아버지 눈에 눈물이 고인 걸 봤어요.

- 이후 ''오리지날 리''라는 이름으로 의상실을 시작하셨는데요.

결혼하고서는 돈이 없었어요. 아무것도 없는 사람과 결혼했으니까요. 그렇다고 손 벌릴 수도 없어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요. 멋 부리는 사람이 멋을 안 부리면 미칠 것 같아서 내 옷을 직접 만들어 입으려고 국제복장학원을 다녔어요. 그리고 이걸로 생활비도 벌면 좋겠다 싶어서 의상실을 시작하게 됐죠. 아버지가 집 한쪽을 개조해주시고, 재봉틀도 갖다 주셨어요.

- 어떻게 ''오리지날 리''라는 이름을 붙이게 됐나요?

저는 남의 걸 흉내 내는 게 너무 싫었어요. 사람들은 카피를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저한테는 그런 게 가치가 없어보였어요. 오리지널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하다가 이 단어가 발음하기도 쉬워서 그런 이름을 짓게 됐어요.


- 1977년 봄에 한국 최초로 파리에서 열린 쁘레따뽀르떼에 참가하셨는데요. 당시 얘기 좀 해주세요.

그때는 옷을 만들어서 설치하는 순간까지도 저의 옷이 최고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굉장히 자랑스러웠죠. 그리고 남들이 이거보다 잘 했으면 얼마나 잘 했겠나 싶었어요. 맘속으로는 그렇게 교만한 생각을 갖고 있었죠.

제 옷을 다 디스플레이해놓고 다른 나라의 전시장을 구경했어요. 맨 위층부터 밑으로 내려가면서 구경을 하는데, 점점 맘속에서 소용돌이가 치고, 우울해지고, 북받치다가 결국 2층에 와서는 계단에서 울어버렸어요. 그렇게 감동과 충격을 받았던 게 저에게는 굉장히 감사한 일이었어요.

- 90년 이후 도쿄 컬렉션에 참가해서 91년에 마이니치 패션대상을 수상하셨는데요. 이 상을 안고 아버지 무덤 앞에서 흐느끼셨다고요?

상을 받으러 가야 할 시점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개인적으로 갈등도 많이 했지만 어머니가 다녀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상을 받고 돌아와서 곧바로 아버지 산소에 갔어요.

- 1998년 IMF와 함께 부도를 맞게 되셨는데요.

잘못되려고 사업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더구나 저는 어릴 때부터 뜨거운 가슴과 머리로 디자인 작업을 했고,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이런 것을 자원화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는데요. 세계적인 이름이 되려는 순간을 눈앞에 놓고 IMF를 맞으면서 그렇게 돼버렸어요.

하지만 제가 만든 브랜드들이 떠난 건 그냥 현실적인 문제들이었고요. 이 시점에서 모든 것을 잃어야 하고, 다시는 접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이 더 컸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나는 이 일을 좋아하고, 지금도 마음속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으니까 만드는 일은 죽을 때까지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 2004년에 남편인 박주천 전 의원이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면서 더욱 어려운 시간을 보내게 되셨는데요. 잘 데가 없어서 딸의 작업실에서 쪽잠을 자고, 남편의 병실에서 밤을 새우기도 하고. 그런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던 끈은 무엇이었나요?

성경책이었어요. 무조건 성경책을 붙잡고 읽기 시작했어요. 제가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낸 2년 동안 성경책을 2번 통독했어요.

- 재기를 가장 많이 도와준 사람이 딸이자 동료 디자이너인 박윤정 씨라고요?

네. 딸이 외국에서 공부하고 오자마자 디자인실 실장을 맡으면서 좋은 시스템을 많이 도입했어요. 그러다가 어려운 시기를 맞아서 하루아침에 다 잃어버린 상황에서 곧바로 제일모직에 취직했어요. 주위에선 제 딸이 얼마 못 버티고 나올 거라고 했지만 2년 동안 일을 아주 잘 했어요.

퇴직하면서 그동안 저축해놓은 것과 퇴직금으로 자기 회사를 조그맣게 차렸어요. 그리고 영화 의상이나 뮤지컬 의상도 많이 했어요. ''은행나무 침대'', ''구미호'' 등. 그리고 이번에 ''태왕사신기'' 디자인을 맡게 됐는데, 그 계약을 하면서 "다음엔 엄마 쇼를 할 거"라고 말했어요. 저는 그냥 지나는 말로 들었는데, 그걸 실천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 ''시누(CINU)''라는 새 브랜드로 쇼를 하게 됐어요.

- 이번 패션쇼를 앞두고 남편의 건강이 나빠지셨다고요?

저희가 쇼를 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제일 좋아한 사람이 남편이었어요. 본인의 상황보다는 제 사업체가 그렇게 된 걸 제일 마음 아파했거든요. 근데 쇼를 한참 준비할 때 중환자실에 들어가게 됐어요. 잠깐 깨어났을 때 면회를 했는데, 말을 못 하니까 허공에 대고 글을 ''일''이라고 쓰더라고요. 자기 걱정하지 말고 일을 열심히 하라고요. 그러고 나서 또 의식이 없어졌어요. 쇼가 끝나고 잠깐 일반병실로 옮겼을 때 "잘 끝났다"고 말해주니까 쉰 목소리로 "이제부터 불같이 일어날 거"라고 한마디를 하고 또 의식이 없어졌어요. 지금은 중환자실과 일반 환자실을 왔다 갔다 하고 있어요.

- 평소에 책을 많이 읽으신다고요?

옷으로 대변되는 범위가 굉장히 넓잖아요. 예를 들면 피라미드와 같아요. 피라미드의 아랫부분은 가장 대중적이고 필수품으로서의 옷이고, 위로 올라가면서 숫자가 점점 적어지고, 맨 위에는 소위 무풍지대라 일컫는 세계적 디자이너들의 작품 시장이 있죠. 제가 항상 타깃으로 하는 시장이 중간보다 조금 위였는데요. 트렌드라는 건 시대를 조금 앞서간다는 의미잖아요. 그래서 디자이너는 본능적으로 앞서는 걸 추구하게 돼있어요. 그래서 저는 책을 많이 읽으면서 나와 다른 세대의 의식 흐름을 자세히 따라가 보곤 해요.

- 앞으로의 계획은?

계획이란 건 모든 여건이 충족될 때 만들어질 수 있는데, 지금은 아주 조촐하게 시작한 상태라 꿈과 희망만 있어요. 시누라는 브랜드와 박윤정이라는 여성복 브랜드가 잘 성장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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