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영 "''객주'' 쓰다가 수없이 울었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소설가 김주영

<홍어>, <객주> 등 장편소설에서 발휘되는 김주영 작가의 힘은 참는 데 이골이 날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어린 시절에서 비롯되었다.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서 학교가 파하면 버스 정류장을 서성거리며 저녁을 맞았던 소년은 고향의 산자락을 더듬으며 시를 쓰고 이야기를 상상했다. 그리고 한번 좌절했던 작가의 꿈은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 만개하기 시작한다.

길 위의 인생에 대한 애착과 연민을 가슴에 품고, 인생과 사랑에 대한 깊고 조용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사람. 마지막 문장을 쓰는 그 날까지 이야기꾼이라고 불리고 싶다는 작가 김주영의 이야기를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들어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소설가 김주영


- 문단의 3대 미남답게 여전히 멋지시네요.

저는 문단의 하나뿐인 미남인데, 두 사람이 더 있다니 섭섭하네요. (웃음)

-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소설 쓰지 않은 기간이 4~5년 정도 됐는데요. 다음에 쓸 소설을 생각하고, 여행 다니고, 술 마시면서 시간을 채우고 있습니다.

- 여행은 어디 다니셨나요?

아주 주저하다가 시작된 여행이 일본 답사예요. 그동안 일본을 한 번도 안 가봤는데, 마음을 다잡고 일본에 다녀오고, 인도네시아 오지도 다녀왔어요.

- 일본은 왜 다녀오셨나요?

일본에 대한 인식이 너무 굳어져 있었어요. 36년 동안 그들의 지배를 받았고, 아직도 적대관계의 감정이 해소되지 않은 나라에 가기 싫었죠. 하지만 그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일본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 일본에 대한 생각이 좀 바뀌셨나요?

아직 다닌지 얼마 안 됐는데요. 감명 받은 것 중 하나는 일본 젊은이들이 몇 백 년 전 자기들의 선조가 부르던 노래를 아직도 외워서 부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 점이 일본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축이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 고향이 경북 청송군 진보면인데요. 어떤 곳인가요?

강이 없고, 고개가 많은 오지라 외부와의 교류가 굉장히 늦었습니다. 지금도 영양 청송 쪽 장터에서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을 채집해보면 옛날 말이 굉장히 많습니다. 교통이 불편하니까 외부와의 소통이 전부 막혀있어서 옛날의 풍속이 그대로 지켜진 경우가 많아요. 지금도 영양 청송엔 기차가 안 들어갑니다.

- 진보장 얘기 좀 해주세요.

어릴 땐 5일장 서는 날은 학교 가기 싫었어요. 전 호기심이 많았어요. 지리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죠. 베네통이라는 회사의 사장이 어느 인터뷰에서 ''베네통은 끝없는 호기심 때문에 발전한 회사''라는 얘기하던데, 저도 그 경우와 비슷합니다. 아주 산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호기심이 많았어요. 저는 낯선 것에 오히려 익숙했어요. 모르는 사람, 처음 보는 물건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장터 구경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교과서 내용보다 훨씬 충동적이었고, 호기심을 충족시켜줬어요.

대낮에 뙤약볕 아래서 땀을 흘리면서, 멱살도 쥐고, 호객행위하고, 막걸리 냄새가 나던 모든 것들이 저녁거미가 내림과 동시에 흡사 무슨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사라져버리면 허무가 남죠. 참새 떼들이 곡식전에 내려와서 떨어진 곡식을 주워 먹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는 광경이 너무 황량하고 허무했어요. 보통 사귀던 여인과 헤어지면 정신 못 차리고 허무한 세월을 보내곤 하잖아요. 저는 어릴 때 연애 대신 그 장터에서 장구들이 다 사라진 모습을 보며 그런 허전함을 느꼈어요.

- "탯줄을 끊고 난 순간부터 굶주림에 시달렸다"고 하셨는데요. 선생님 문학의 가장 중요한 테마인 ''가난''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우리 소설은 언제부턴가 주제에 너무 매달리는 측면이 있어요. 물론 역사적 상황 자체가 좌우대립이 있었고 그로 인해 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전쟁이나 이념을 소재로 거기서 파생되는 갈등이나 조정에 매달리는 작가들이 많아요. 저는 가난도 이념이나 전쟁과 같은 선상에 두고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난은 인간을 굉장히 비굴하게 만들어요. 사람이 줏대를 못 가지게 해요. 가난 속에서 줏대 있는 자기 인생을 지켜나간다는 건 굉장히 어렵죠. 배고픈 것보다 더 서러운 게 없다는 옛말이 있잖아요. 가난이 너무 깊으면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죠.

제가 태어났을 땐 아버지가 안 계셨어요. 그때가 일제 말기였는데요. 하루에 한 끼 먹으면 다행이었어요. 어머니 혼자 저를 키워야 하니까 가난은 불 보듯 뻔하죠. 10년 전에 어느 신문사의 여성 문화부장님과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요. 그분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여자는 점심을 안 먹는 줄 알았대요. 가난의 깊이가 그만큼 뻗어있다는 거죠. 저 역시 학창시절엔 점심을 못 먹고, 물로 배를 채웠어요. 하도 물을 먹어서 위하수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가난이 나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대해서는 얼음 속 보듯 훤히 알고 있죠. 그래서 제가 제일 목표로 삼았던 것이 ''이 가난 속에서도 비굴해서는 안 된다''는 거였어요.

- 대학 등록금은 어떻게 내셨나요?

장학생이라 등록금은 내지 않았어요.

- 문학에 처음 눈을 뜬 건 언제였나요?

어릴 땐 문학 공부를 할 수 있는 책을 사볼 엄두를 못 냈습니다. 교과서도 없어서 이웃집에서 빌려서 공부했던 형편이었거든요. 하지만 그런 생활을 해오면서도 가슴에 흥건히 고여 있는 이상한 빛깔의 회한 같은 게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런 게 나도 모르게 자꾸 쌓였던 것 같아요. 그걸 고등학교 때 느꼈어요. 내 가슴 속에 있는 무언가를 글로 써보자. 그래서 고등학교 때 신문의 학생문단에 자꾸 투고를 했죠. 당시엔 시를 많이 썼어요.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 안동 여변초 생산조합에 취직했을 무렵 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슬픔으로 굉장히 방황하셨다고요?

25살 때였는데요. 술을 엄청나게 먹었습니다. 장 파열이 올 정도였어요. 그런데도 병원에 안 갔어요. 자기 학대가 심했죠.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상태가 굉장히 오래 지속됐어요. 그렇게 사는데도 불구하고 주변에 조언해줄만한 선배라든가 가족들이 없었습니다. 저는 친척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무슨 일이든 저 혼자 해결했어요.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나를 일으켜 세우지 않으면 이 세상엔 나를 거둬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내가 정신 차려야 한다. 새로운 방향 설정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그래서 과감히 회사에 사직서를 냈어요. 당시 그 회사는 부정부패가 심했는데, 제가 경리 책임자였어요. 부정이 오가는 걸 목격하고, 내가 중간 정거장이 되기도 하니까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요. 회사에 취직할 땐 먹고 살기 위해서 다른 방도가 없었지만 더 이상 참고 견디기 어려워서 사표를 내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죠.

- 1980년 서울신문에 <객주>가 연재되면서 작가 김주영의 이름이 알려졌는데요. 객주 구상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긴 소설을 쓰기 위해 5~6년 동안 자료 수집을 하고 있었어요. 녹음기를 들고 전국 장터를 다 찾아다녔어요.

- 안정적인 수입이 들어왔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밤에 자리끼를 떠놓으면 꽝꽝 어는 집에서 살았거든요. 그래서 꽝꽝 얼지 않는 집으로 옮겼어요.(웃음)

- 그 후로 굉장히 활발하게 창작하셨는데요.

너무 많이 쓴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제가 대학 때는 장학생이라 돈도 안 내고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공부를 안 했어요. 그러다보니 배운 게 없어서 그런 소설 쓰는데 엄청 애먹었습니다. 저희 집이 잠실에 있는데요. 겨울밤에 저 멀리 안개가 뽀얗게 낀 가로등 밑으로 지나는 차를 보면서 혼자 서럽게 울었던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소설 쓰는 일이 너무 어려워서요. 내가 너무 분수에 넘치는 주제를 잡았다고 생각했어요.

자료는 한자로 돼있는 게 많은데, 옥편 가지고는 그 뜻을 다 해석 못 해요. 조금이라도 잘못 써놓으면 독자들이 전화하고, 난리가 납니다. 그래서 한 문장을 쓰기 위해 밤을 꼬박 새우는 경우도 많았어요.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어떻든 내 나름대로 그걸 소화해서 다행이에요. 지금은 근력이 딸려서 그런 소설 못 쓸 것 같아요.

- 1989년에 절필선언을 하게 된 배경은?

한국일보에 <화척>이라는 소설을 쓸 때입니다. 소설의 무대가 송도(개성)라 일본까지 가서 자료를 수집해서 저 나름대로 송도의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근데 의심스러운 거예요. 개성 한번 다녀오지 않고 이런 긴 소설을 쓰는 게 철면피 같았어요. 그래서 당시 무역 관계 일을 하던 중국기관 상무원 쪽에 알아보니 마침 조선족 한분이 계시더라고요. 그분께 제 사정을 말하고 개성에 다녀올 수 있도록 주선해달라고 했어요. 안기부의 허가도 받았고요. 그래서 그분과 저, 그리고 출판사 사장이 함께 북경에 갔어요. 어느 식당에서 북한 대사관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로 했죠. 그런데 약속시간이 한참 지나도 안 오더라고요. 전화를 걸어봤더니 북한 대사관 사람들이 못 오겠다고 하는 거예요. 제가 "정치적인 건 전혀 없다. 오직 개성만 보고 싶다"고 얘기했지만 결국 못 만났어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들에게 금전적인 제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아무튼 그때 돌아와서 굉장한 좌절을 느꼈어요. 가까운 거리도 못 가는 분단의 현실에 대해서요. 그래서 당시 한국일보 문학담당 기자였던 김훈 선생을 만나서 못 쓰겠다고 말했어요. 그것 때문에 그 양반도 한국일보를 그만뒀어요. 자기도 뭔가 상처받은 거죠.

- 이후 다시 글을 쓰게 된 계기는?

1년 5개월 동안 기자 하나가 따라다녔어요. 그래서 동아일보에 <야적>이란 작품으로 다시 시작했죠.

- "나에게 소설은 재주가 아니라 뚝심이자 견디는 힘이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저는 절대로 울지 않습니다. 슬픈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자꾸 눈물이 흘러서 꺼버립니다. 슬픈 건 질색이에요. 울지 않는다는 건 자기 감성의 문을 닫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 소설에는 여성독자가 없습니다. 제 작품이 너무 사실적인 것, 마치 신문기사를 보는 듯한 것에 치우쳐 있는 게 사실입니다.

저는 적어도 소설가라면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사회 규범에 너무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돌아가신 이병주 선생이 저에게 "절대 도덕적인 것에 얽매여선 안 돼. 생활도 그래야 돼."라고 하셨어요. 저도 공감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다보니 자꾸 어떤 틀에 갇히게 됩니다. 그렇다면 마음속에 있는 감성을 자꾸 개발해요 해요. 시도 읽고, 영화도 보고, 연애도 해봐야 해요. 그런데 나이가 들고, 사회가 규범의 틀에서 벗어나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제 자신도 규범 안에 갇히게 되면서 자꾸 감성을 잃어가요. 이건 예술가에겐 굉장히 위태로운 거예요. 그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많이 고민해야 할 스스로의 과제라고 생각해요.

- 앞으로의 집필 계획은?

글 이외의 다른 걸로는 내 존재 가치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사회사업이나 가족을 돌보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앞서야 할 것이 소설 쓰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4~5년 동안 글을 쉬면서 여행을 다닌 코스가 있어요. 7번 도로 훨씬 바다 쪽에 치우쳐있는 구도로가 있는데, 그 동네엔 구들장 밑으로 파도가 들락날락하는 집도 있죠. 거기서 취재한 걸 가지고 소설을 쓰려고 합니다. 제목은 이미 <붉은 단추>라고 정해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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