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미스러운 교통사고로 생전 처음 미국경찰의 조사를 받을 때 들은 첫마디다. 우리말로는 분명히 ''''비워진, 텅 빈''''으로 번역되는 ''''empty''''라는 단어가 ''''~을 비우다''''라는 동사로 쓰이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영어는 이제 품사구별이라는 것이 무의미해져 가고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영어나 기타 외국어의 단어는 여러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 때에 따라서는 한 단어가 전혀 상반된 의미를 전달하기도 하는데 그 한 예가 ''''compromise''''다. 이 단어는 영어를 어느 정도 구사하는 사람도 그저 ''''타협하다''''정도로만 알고 있는데 사실 ''''~를 험담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물론 영국에서는 이런 말보다는 ''''backbiting''''이라고 해서 누구를 등뒤에서 씹는다는 말을 더 많이 쓰기는 하지만 말이다.
외국어를 잘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도 막상 외국인을 만나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불만을 호소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처음부터 외국어를 잘못 익혔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 같다. 외국어 단어는 단어의 뜻이 수시로 바뀌고 한 단어가 여러 가지 뜻을 가진다는 말은 앞에서 했다. 그렇다면 그 다양한 뜻이 꼭 한가지 품사만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나?
더구나 이런 탈품사현상은 마치 물을 막던 댐이 무너지는 것처럼 미국 영어에서는 아주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한 철학교수는 ''''일상대화에서 너무나 한가지 단어가 여러 품사로 겹쳐 쓰이는 일이 많다 보니 논문에서도 이런 문구가 보인다''''며 ''''내가 보기에는 가장 좋은 사전은 Webster사전 1934년 판이니 이것만 참조해 논문작성을 하라''''고 말한 적도 있다.
품사가 무너지는 예를 더 들어보자. 누군가 세상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 때 흔히 듣는 말이 ''''Do not blame the darkness. Just light a little candle''''(어두움을 비난하지 말고 작은 촛불을 켜세요) 이 문장에서 명사 light는 불을 켜다라는 동사로 쓰이고 있다.
한국에서 명문대학을 나오고도 미국에 유학와 초등학생보다 영어구사력이 떨어지는 것도 바로 새로운 언어를 받아들이면서 이 단어의 뜻은 우리말로는 ''''빛이니 명사다''''라는 식으로 분류해서 외우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범람한 강물처럼 밀려드는 정보와 인간관계 속에서 적극적으로 대인관계를 가지고 다양한 대화를 통해 정보를 얻는 사람보다는 혼자 사색을 즐기는 사람에게서 심하게 나타난다.
평생을 일본인으로 자신을 속이며 살다간 유명작가 다치하라 세이슈(立原正秋.1926~1980)의 예를 보자.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김윤규(金胤奎)라는 한국이름까지 가졌고 11살때까지 한국에서 성장한 다치하라는 처음 배운 말은 우리말이었다. 하지만, 결국 일본 최고 문학상 가운데 하나인 나오키(直木)상까지 수상해 일본인보다 고전일본어를 더 잘한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 인물의 학적부를 보면 ''''뭔가 조리있게 말을 할 때는 항상 말을 더듬거리는데 아마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운 티가 아직 남은 것 같다''''는 평가가 나온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일본어를 배워 문학작품을 쓴 것은 대단하지만 다치하라는 머리 속으로 이것 저것을 따지는 소심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일본어의 한계를 느꼈다고 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프로레슬링의 대가 역도산은 한국에서는 학교를 다니지 못한 일자무식(一字無識)이지만 나중에는 미국 프로모터들과의 계약도 혼자 할 정도로 영어를 익혔다. 스스로도 ''''읽고 쓰는 영어는 할 수 없다''''고 고백할 정도였고 처음 영어를 가르친 미국인에게 ''''Fuck you''''라고 인사했다가 망신을 당한 적도 있다.
하지만 유창함에 있어서는 다치하라는 역도산을 따라갈 수 없었다.
흔히 국내에서 평생 외국어를 하는 것보다는 외국에 한달이라도 나가는 것이 낫다는 말을 하는데 아무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이 현상을 이렇게 본다.
영어의 홍수에 빠지면 품사구별을 하면서 스스로 외국어의 담을 쌓고 배울 겨를이 없기 때문에 유창해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한가지 단어가 10가지 뜻, 10가지 품사로 변한다면 이 10가지를 인간의 두뇌로 계산해 외울 생각은 버려라. 그보다는 변화하는 뜻과 품사를 보고 ''''아 이게 명사로만 쓰지 않고 동사로도 가능하구나''''하며 품사의 벽을 허물면 된다.
※ 이서규 통신원은 영어, 독일어, 에스파냐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등 5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한국 토박이로, <교과서를 덮으면 외국어가 춤춘다>의 저자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