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 일지를 쓰면서 자신이 권력의 정점에 있던 시절, 그리고 나락에 떨어졌던 시절을 다 기록하고, 그중 일부를 회고록으로 쓰기도 했던 그에게 지금 남은 건 무엇일까.
박철언 전 장관의 이야기를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들어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박철언 전 장관
- 1942년 경북 성주 출생이시죠?
네. 하지만 성주에서 태어났지만 3살 때 대구로 나왔어요. 고향을 위해 이렇다 할 일을 못해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학창시절엔 어떤 학생이었나요?
우리 집안이 남자만 6형제인데요. 아버지가 굉장히 엄격하셨습니다. 우리를 새벽같이 깨워서 운동도 시키셨고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공부하다보니 성적이 좋았어요. 고등학교 땐 청맥이라는 문학 동아리를 만들어서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 서울대 법대를 수석 졸업하셨죠?
요즘 말로 범생이었기 때문에 수업을 착실히 듣다보니 성적은 괜찮았습니다.
- 대학시절 6.3시위 때 선언문도 쓰셨다고요?
6.3사태라고 하죠. 당시 한일수교협상에 반대하는 대규모 학생시위가 있었습니다. 마침 서울대 총학생회장이 현재 울산대학 총장으로 있는 정정길 씨였는데요. 경북 고등학교 친구이다 보니 제가 문학 동아리 활동을 해서 문장력이 있다고 생각했나봐요. 그래서 초안을 써달라고 요청하기에 몇 차례 시위 선언문 초안을 만들기도 했죠.
그리고 그때 법대생들이 강의실에서 200시간 단식농성을 했어요. 대강의실에서 가마니를 깔고, 책상을 치우고, 200여명이 200시간 단식농성을 한 뒤 거리에 나섰다가 경찰서에 끌려가서 고초를 겪기도 했죠. 그러나 당시 저는 20대 젊은이로서 암울한 현실에 분격해서 순수하게 폭발한 현장에 함께 있었던 거지, 정치 지망 학생 운동가는 아니었어요.
- 한일수교협상에 대해 아주 반대하셨던 건 아니었나요?
당시 협상이 너무 비밀스럽고 굴욕적인 자세로 진행됐고, 일본에 대한 우리 감정이 워낙 좋지 않았던 데서 나온 울분이었고요. 사실 세세하게 진행되는 상황은 알지 못한 채 암울한 현실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킨 거죠.
- 이후 어떻게 공안검사가 되셨나요?
검사는 법무장관 명에 따라서 부임지가 바뀌고, 소속부서는 검사장 지시로 배정됩니다. 저는 처음에 부산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때는 일반 형사부에 있었죠. 거기서 2~3년 열심히 하다 보니 잘 한다고 평이 났는지 법무부 검찰과 검사로 발령이 났습니다. 법무부 검찰과 검사는 검찰의 꽃이라고 불리는 엘리트 코스죠. 그 후 미 국무성 초청으로 1년간 워싱턴D.C.에 있는 조지워싱턴대학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뒤 1977년 8월에 서울지검 공안부로 발령 났습니다.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는 최고의 엘리트 검사로 구성되어 있어서 공안사건 뿐 아니라 사회 이목을 집중시키는 중요사건도 맡았습니다.
검찰의 엘리트 코스라고 하면 검찰총장이 되는 길을 얘기하는데요. 보통 수사에서 인정을 받거나 서울지검 공안부와 법무부 검찰과 검사, 그리고 선진국 유학 코스를 거치는데, 어쩌다보니 저는 그 코스를 다 거치게 돼서 굉장히 뿌듯했죠.
간혹 제가 가혹했다고 하는데 좀 헷갈리거나 혼동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 분위기는 정말 엘리트 분위기였습니다. 국가 안보의 최후보루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또한 시국사범이 배당되면 그들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논리적으로 설득하니까 막시즘이나 공산주의 이론에 대해서도 공부해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강압수사나 고문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 당시 수사 시스템에 가혹 행위가 있었다는 걸 정말 모르셨나요?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실의 가혹 행위가 있었다는 얘기는 들은 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이재오 의원이 문제 제기를 한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도 치안본부 경찰에서 다 수사해서 검찰로 넘어온 사건입니다. 경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접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대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사안입니다.
- 검사에서 정치인으로 입문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정치에 발을 딛게 된 건 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국가 운영에 직접 관여하게 된 건 검사 시절입니다. 미국 유학 후 서울지검 공안부에 있었는데 1979년에 10.26 사건이 일어났고, 80년 6월에 법무장관의 명령에 따라 검사로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파견근무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국보위 법사위원으로 헌법 개정작업에 참여한 뒤 검찰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1987년에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청와대 법률비서관으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검사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검사로서 청와대에서 파견근무를 하도록 해달라고 했습니다.
-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을 때의 광경을 얘기해주세요.
그분들과는 옛날부터 면이 많은 편입니다. 왜냐면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저의 외사촌 누이인 김옥숙 여사의 남편이거든요. 대학 시절, 방학 때 외가에 가면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씨 등 정규 육사 1기 출신들과 만나곤 했습니다. 당시 그분들은 중위, 대위였던 시절이죠.
당시엔 노태우 중위가 김옥숙 여사와 결혼하려고 잘 보이기 위해 많이 대시를 했습니다. 하지만 김옥숙 여사는 군인에 대한 거부 반응이 있었어요. 그래서 노태우 중위가 점수를 따기 위해 김옥숙 여사와 동생인 김정숙 여사, 그리고 저까지 끼워서 영어를 가르쳐줬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 전두환 중위가 같이 있어서 몇 번 본 기억이 있습니다.
- 공식적으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만났을 때의 느낌은?
처음 국보위에서 뵀을 땐 굉장히 결연한 표정이었습니다. 저는 국보위 법사위원으로 헌법 개정 작업의 초안을 만드는 데 참여하고, 검사로 돌아오려고 했죠.
-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신임을 받았던 이유는?
저에겐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남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하고 두 시간 늦게 퇴근할 정도로 열심히 한다. 둘째, 중요한 정책이나 문제를 다룰 때는 사심 없이 모든 의견을 종합해서 빨리 방향을 결정해 직언을 한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에게 여러 차례 야단을 맞기도 했습니다. 대통령 뜻과 반대되는 건의도 올리고, 한번 깨지더라도 다시 가서 얘기하고. 이렇게 서너 차례 얘기하면 윗분들이 처음엔 강하게 거절하다가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일례로 당시 건국대학의 집단사퇴가 났을 때 1000여명을 전부 구속해서 엄벌에 처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이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제가 처음으로 수석회의에서 그런 얘기를 했다가 엄청나게 야단맞았습니다. 다음날 장단점을 분석해서 다시 건의했다가 또 야단맞았죠. 그러나 결국 제 의지대로 최소한의 학생만 구속기소하고, 구속기소된 학생들도 대부분 관대하게 다뤄졌어요.
-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수차례 북한을 비공식적으로 방문하셨는데요. 왜 북한에 가셨나요?
1983년 10월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으로 남북이 전쟁의 긴장상황에 들어갔습니다. 외국 투자와 관광객이 줄고, 안보 부담과 경제 부담이 막중해져서 우리로서는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해야 했습니다. 평화공존 방향으로 가기 위해 서로 밀사를 교환해 대화를 하자는 뜻이 성사돼서 1985년 3월에 제가 안기부장 특보로 발령받았습니다. 그리고 4개월 후인 85년 7월 북한 수석대표인 한시해 씨와 첫 만남 이래 노태우 대통령 중후반기까지 6년 동안 남북회담 수석대표로 42차례 회담을 하게 됩니다. 남북 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는 차관급 비밀회담으로, 남북 정상의 정권을 위임받은 밀사들 간의 접촉이었죠. 이때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북측 지역에서 한번 만나면, 그 다음은 남측 지역에서 한번 만납니다. 제가 군사분계선을 넘어간 것만도 20차례 정도 됩니다.
- 육로로 가나요?
네. 칠흑 같은 새벽에 적십자사 기를 달고 위장해서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가게 되죠. 평양에 갈 땐 개성에서 김일성 주석의 전용열차를 타기도 했고, 제가 백두산에 오르고 싶다고 하니까 전용기로 백두산 아래 김일성 주석 별장까지 가서 백두산 정상에 오른 뒤 삼지연에서 회담을 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상호주의를 철저히 지켰습니다. 북측에서는 보완 때문에 주로 자기 쪽에서 하자고 했지만, 저는 거절했습니다. 상호주의 원칙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북측 대표도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남쪽으로 20차례 정도 왔습니다. 그래서 판문점 남쪽 지역이라든가 워커힐, 신라호텔, 심지어 강남의 살롱 구경도 시켜줬고요. 제주도로 데려가서 헬리콥터를 타고 정상 부근에서도 회담을 했고, 동대문 시장이나 남대문 시장, 남산타워까지 전부 보여줬습니다. 왜냐면 북한도 남한의 실체를 알아야 하고, 남한도 북한의 실체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죠. 동질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신뢰를 증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뜻 깊은 접촉을 했습니다.
- 북한에서 누구를 만나셨나요?
김일성 주석을 비롯해 허담 대남 담당비서, 한시해 수석대표 등 북한의 대남관계 핵심요인들과 만나서 민족 문제나 당시의 현안을 논의했습니다.
핵에 대해서는, 사실 당시 남한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었고, 북한은 미사일을 가진 정도였죠.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우리가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으니까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너희들이 전쟁을 도발하면 한반도는 초토화되고, 결국 우리가 승리한다"는 암시를 자주 주면서 북을 압도하고 리드해나가는 역할을 했습니다. 예컨대 1985년 9월에 허담 특사와 한시해 대표가 방문했을 때 기흥에 있는 최원석 동아건설 회장의 별장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면담했는데요. 당시 전두환 대통령께서는 "한반도에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풀뿌리조차 자랄 수 없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남북 간에 전쟁이나 도발이 없어야 한다"는 경고성 발언도 하셨습니다. 우리가 압도해가는 분위기 속에서 상호주의를 관철하면서 남북관계를 진행해왔죠.
- 김일성 주석은 어떤 분이시던가요?
김일성 주석은 대단히 호방하고 가슴이 열려있는 말투였어요. 예를 들면 저에게도 "박철언 선생이 민족통일사업을 위해 대단히 노력하고 있는 걸 잘 알고 있다, 통일 사업은 박철언 동지 같은 젊은 분들이 이뤄내야 한다"면서 백두산 들쭉술을 가득 따라주시기도 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당시에도 건강이 좋지 않아서 대화할 때 약하게 마이크를 장치해두고 있었고, 우리가 술을 권하면 혹시 김일성 주석이 쓰러지지 않을까 하면서 경호원이 신경을 쓰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나 호방하고, 대인관계에서 아주 활달한 자세였죠.
- 북한에 처음 갔을 때의 느낌은?
당시 저는 북한 지역을 갈 때마다 유서를 썼어요. 지금은 다 오픈된 가운데 서로 왕래하지만 당시만 해도 남북은 전쟁 일보 직전의 초긴장 상태였습니다. 1983년 10월에 아웅산 사건이 일어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밀사로서 아무런 신분 보장 없이 갔기 때문에 유서를 쓰고 가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낯선 곳에서 잠을 잘 땐 창문이 닫혀있는지 시건장치를 확인하잖아요. 처음에 저도 모란봉 초대소에서 혼자 잠을 잘 때 창문의 시건장치를 확인하는데, 시건장치가 안 되어있더라고요. 그래서 경비원 책임자에게 "왜 자물쇠가 없냐?"고 물었더니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인민군대가 철통같이 지켜드리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더군요. 그 날 밤, 누가 들어와서 내 목을 따 가지는 않을까, 아니면 약물 주사를 놔서 내가 갖고 있는 국가 기밀정보를 뽑아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한숨도 못 잤어요. 왜냐면 밀사는 신분 보장 없이 가는 거니까 그쪽에서 안 보내주면 못 온다는 위기의식이 있었거든요. 박정희 대통령 때도 북에서 내려온 밀사 황태성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형까지 했잖아요. 하지만 여러 차례 다녀온 뒤엔 태연해졌습니다.
그렇게 6년간 남북 간에 여러 가지 문제가 다뤄져서 1985년에는 남북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 및 예술단 교환 사업도 하고, 그것이 모태가 돼서 1991년 말에는 남북총리 간에 비핵화선언 기본합의서가 이뤄졌습니다.
-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이후 슬롯머신 사건으로 투옥하게 되시는데요. 그땐 YS에게 불리한 일지를 공개하지 않으셨죠?
네. 당시엔 공개할까 말까 많이 망설였습니다. YS가 대통령 취임한 지 3개월도 안될 때였는데요. 그들은 박, 전, 노 시대의 세력들을 일벌백계를 한다면서 저를 죽이겠다고 칼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맞싸움을 해봤자 칼을 쥐고 있는 YS측에 대해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그리고 새 대통령을 뽑아 희망에 차 있던 국민들은 뭐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적지 않은 마음의 갈등은 있었지만 그냥 묻고, 언젠가 내가 정치를 그만뒀을 때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을 하겠다고 다짐해서 작년에 회고록을 펴내게 된 거죠.
- 당시 YS 비자금은 얼마 정도였나요?
당시만 해도 실명제가 되기 전이니까 전부 고액수표로 심부름을 했죠. 사실 이것도 굉장히 마음의 부담을 갖고 공개했습니다. 그 책에 함께 일한 1300명의 실명이 등장하는데, 그 일지를 공개한 거죠. 깨끗한 정치, 투명한 국가 운영이 되려면 여야 정치인들 간의 권력 운영이 투명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지나가면 그만''이 아니라 바른 사실을 증언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함께 일한 분들의 체면과 명예에 손상되는 일을 하게 돼서 인간적으로는 미안합니다.
YS는 야당으로서 정치 자금이 고갈된 상태에서 계보도 관리하고 언론도 뒷받침해야 하다 보니 자금이 필요했고, 노태우 대통령은 여소야대 상황에서 야당의 협조를 얻어야 하니까 야당에게 자금을 줘야 했습니다. 이른바 이상 정치를 표방하는 제가 그런 일을 하면 안 되는데, 그래도 국가를 운영하다보니 최고통치권자인 대통령의 심부름을 YS에게 여러 차례 하게 됐죠. 국민과 역사에 부끄러운 일입니다.
- 스스로를 "실패한 이상주의자"라고 표현하셨는데요.
제가 3당합당을 앞장서서 YS가 함께 하게 됐는데요. 저는 기본적으로 보수와 진보가 축이 돼서 나라가 운영돼야 정치가 바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의원내각제가 이뤄져야 권한과 책임을 나눠 가지기 때문에 지역감정도 해소되고, 민주정치와 책임정치가 실현된다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YS와의 3당합당 때 그걸 국회에 약속했는데, YS가 배신했죠.
민주투쟁 세력을 상징하는 DJ 호남세력, 근대화를 상징하는 JP 보수 세력, 근대화의 주역이었다는 TK 대구경북 세력, 이렇게 삼자를 연대해서 DJT를 한다면 굉장한 내각제도 되고 이 나라의 미래도 화합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그분들이 약속을 안 지켰기 때문에 저는 굉장한 좌절감을 느꼈죠.
- 권력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가요?
항간에서는 저더러 ''6공의 황태자''라든가 ''리틀 프린스''라는 얘기를 하지만 사실은 좀 억울합니다. 저는 북방정책이나 대북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수십 차례 목숨을 걸고 비밀출장을 가야했고, 국내에서는 여소야대 상황 속에서 문제를 풀기 위해 3당연합이나 DJP에 앞장서야 했습니다. 많은 일 속에서 고생했는데, 마치 무슨 세를 누리고 힘을 쓴 사람처럼 진실이 알려지지 않은 데 대해 굉장히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엉뚱한 사람이 챙긴다는 말처럼 그런 심정입니다. 당시 저는 힘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습니다. 항간에서는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세를 누렸다''고 하는데, 저는 일 속에 있다 보니 그런 걸 의식하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