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D 가족기업센터의 연구결과는 한국의 재벌기업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가족기업, 신유럽 경제 블록 이끌고 있어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고, 세습되는 한국재벌들에게 슈워스 교수의 얘기는 복음일 수도 있고, 경고음일 수도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류한호 경영전략연구실장(경영학 박사)는 "EU(유럽연합) 국가의 기업들 가운데 가족이 소유하거나 경영하는 기업은 평균 85%라고 한다"며 "이탈리아의 경우는 99%, 스웨덴 90%, 스페인 80%, 영국 75%, 증권시장에 상장된 대기업의 경우도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기업은 36.9%인데 비해 소유와 경영이 집중된 기업은 44.3%에 이른다"고 말했다.
이런 가족 기업들이 유럽이라는 선진경제 블록을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가족기업, 특히 재벌기업들도 ''뭐가 문제냐, 잘 할 수 있다, 시비 걸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유럽과는 다르다. 한국은행이 최근 1069개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1/4분기 경영실적을 분석한 자료를 보면 조사대상기업의 전체 매출액 107조 4천억원 가운데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LG전자, 포스코, (주) SK 등 매출액 상위 5대 기업의 매출합계는 무려 32.7%에 달하고 있다. 특히 상위 5대 기업의 경상이익 합계액은 7조 1천억원으로 조사대상 제조업체들의 경상이익 합계액인 14조 4천억원의 49.4%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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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실정 때문에 한국경제의 현 상태를 나타내는 각종 통계지표가 착시현상을 빚고 있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실물경제, 체감경기는 모두들 어려운데도 일부 잘나가는 대기업의 성적 때문에 경제지표는 괜찮게 나오는 ''''양극화''''현상이 우려할만한 특징이 되가고 있는 현실을 오늘의 한국경제는 맞고 있다.
IMD가 처음 가족기업을 연구하기 시작한 때부터 참여한 IMD의 존 워드(John Ward) 교수는 이런 맥락에서 매우 함의가 풍부한 발언을 몇 마디 했다.
그는 "소수의 대기업이 국가경제를 좌우하는 경제체제에서 가족기업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제한된 전문성을 가진 가족, 특히 오너의 결정이 대기업의 침몰을 부를 수 있고 이는 곧바로 국가경제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기업의 편협된 시각이 국가경제 위기에 영향력 미칠 수 있어"
워드 교수는 반면 비(非) 가족 기업만으로 구성되는 경제도 가족기업의 장점이 기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으며, 다양한 기업형태가 공존하는 것이 좋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소유와 경영을 세습하는 한국 재벌기업들로선 워드 교수의 이런 얘기가 솔깃할 법하다.
그러나 소수 재벌로의 경제력 편중현상이 두드러진 한국 경제의 현실에서는 워드 교수의 첫 발언이 더욱 큰 울림을 가지고 있다.
따지고 보면 한국기업의 95%이상이 소기업이고, 대부분의 소기업은 아버지가 사장, 어머니가 경리겸 총무부장, 아들과 딸이 사원인 가족기업의 형태로 봐도 크게 무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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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의 기업 가운데 가족경영기업이 평균 85%라는 수치는 그래서 한국에 비해 매우 낮은 것이고, 오히려 가족기업이 99%에 달하는 이탈리아가 우리와 비슷한 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경우 가족기업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반면 한국의 경우 사회문제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바로 경제력 편중여부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탈리아야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여서 한 두 회사의 몰락이 국가의 명운을 좌지우지하지 못하지만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 기아와 한보의 부도에 이은 IMF사태를 돌이켜보면 이런 현실인식은 또렷해진다.
한 기업이 망해도 소유주는 대개 살아남지만, 일자리를 잃은 수 많은 노동자들은 삶의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게 된다. 열심히 살았는데도 어느 날 국가가 부도를 내고, 살인적 금리와 감봉, 심지어 해고까지 겪게 되는 전쟁 못지 않은 비극적 사태는 우리 인생과 역사에서 한 번이면 족하다고 국민들은 입을 모은다.
한국의 재벌, 특히 경제력이 편중된 상위 재벌들은 예외없이 세대교체를 하거나 할 준비를 하고 있다.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씨, 현대자동차는 정몽구회장의 아들 정일선 씨, SK는 최태원 회장 등이 차세대들이다.
"기업의 ''족벌체제'' 경계는 건강한 사회경제를 위한 것"
그들의 소유와 경영 승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것은 그들의 황제같은 삶을 질시해서도, 환경과 능력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해서도, 좌파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서도 아니다. 나와 내 가족의 생존이 위협받게되는 상황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재벌기업과 그 소유주들은 국민적 우려에 대해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일은 함께 걱정할 만한 가치가 있다.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기업은 본질적으로 사회조직이다. 내 가족이 아닌 다른 많은 가족들이 관련된다. 그래서 기업의 소유주, 경영자에게는 회사를 잘 운영해야할 책임이 지워지는 것이다. 부담이 크지만 보람도 클 수 있다. 실패를 피하고 ''''잘 살아남아'''' 진정한 존경을 받으려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혜를 구하고 권한을 나눠주는 것이 필요하다.
총기제조의 명가인 이탈리아 베레타(Baretta)사는 장자가 소유와 경영을 계승해서 수 대를 내려온 가족기업이지만, 장자가 경영에 적당치 않으면 입양을 했다고 한다. 세습을 하더라도 회사를 잘 경영하고 새로운 가치를 더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가족 바깥에서 전문가를 찾아서 일을 맡기는 게 모두에게 이로울 수 있을 것이다.
<취재 후기>
◈…요아킴 슈바스 교수는 한국의 가족기업도 연구한 적이 있느냐고 묻자 "해 본 적 없지만, 매우 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가족기업은 내부 정보를 얻기 어려워 연구에 어려움이 있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IMD 가족경영센터는 세계 유수의 가족기업이 예정한 계승자들에게 경영수업을 시키는 과정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엔 신데렐라나 온달장군을 꿈꾸는 미혼남녀가 결혼상대를 찾아 등록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한국 일일연속극적 공상을 기자는 잠시 했다.
◈…IMD의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는 10개월짜리 MBA 과정이다. 다른 국제경영대학원들의 MBA과정에 비해 짧은 기간, 집중적인 교육으로 양성되는 이 학교 출신 MBA들은 미국의 와튼 스쿨이나 MIT의 MBA등에 견줘 크게 뒤지지 않는 평가와 대우를 국내에서 받고 있다고 삼성경제연구소 류한호 박사는 말했다.
로잔(스위스)=CBS경제부 정병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