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부터 서로가 맘에 들었던 두 사람은 곧바로 의기투합,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한 사람은 노래를 만들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노래를 근사하게 불렀다.
그렇게 만든 두 사람의 첫 앨범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대박이었던 150만장의 판매를 기록한다. 대한민국 가요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이영훈 · 이문세 콤비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1980년대 세미 트로트와 포커송이 대세였던 시절, 서정적인 가사와 고급스러운 멜로디로 주목받은 이영훈표 발라드는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가슴에 묻었던 인생의 희로애락을 자신은 그저 노래로 만들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이영훈은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시인으로 남고 싶다고 말하는데…….
시인의 꿈을 꾸는 작곡가 이영훈의 음악인생을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들어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작곡가 이영훈
- 고향은 어디신가요?
서울이고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곳은 우이동입니다.
- 가족 중에 음악을 하는 분이 있었나요?
아니오. 제가 유일하게 음악을 하고 있습니다. 형님과 누님은 공부벌레였고요. 저는 나이차가 나는 막내였는데 어머니가 취미생활을 시켜주시겠다고 피아노를 한 대 사주셨어요.
- 피아노를 처음 보던 날의 기억은?
학교 강당에만 있던 피아노가 우리 집에 들어오니까 신기했죠. 피아노 울림 때문에 옆집에서도 쫓아오기도 했어요.(웃음)
- 당시 피아노 종류는 무엇이었나요?
신앙촌 피아노였어요. 할부가 되는 피아노가 그것밖에 없었거든요.(웃음)
- 어릴 때부터 음악에 재능이 있었나요?
전혀 없었어요. 어머니가 보시기에 형님과 누님이 너무 공부만 하니까 피아노도 가르칠 겸, 또 막내는 다른 쪽으로 시켜보고 싶으셨나봐요. 어머니는 제가 데뷔하던 85년에 돌아가셨어요.
- 어머니를 생각하며 만든 노래가 있나요?
한 곡 있는데 발표는 안했어요.
- 스스로 음악적 재능이나 타고난 감성이 있다고 느낀 때는?
어렸을 때 기초적인 피아노 레슨을 받으면서 저도 모르게 작곡을 시작했어요. 바이엘이랑 체르니 연습하면서 이런 곡들과 비슷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쳐보니까 쉽게 되더라고요. 서너 곡정도 만들었어요. 어렸을 땐 악보 그리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대충대충 그렸는데, 지금 연주해도 최근에 쓴 곡만큼 짜임새가 있더라고요.
- 그때부터 음악의 길을 가겠다고 마음먹었나요?
아니요. 단지 음악이 좋아서 피아노 명곡들을 많이 연습했고, 습작은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했어요. 글을 좋아해서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가사를 붙인 곡을 써봤어요. 포크나 블루스 등 여러 가지 장르를 써봤는데요. 그 당시에 썼던 곡 중에 발표된 곡도 있어요. ''소녀''는 고등학교 때 초고로 잡아놨던 곡이었죠.
- 이영훈 씨 노래의 가사들이 언어 감각이 굉장히 탁월한데요. 어렸을 때 책을 많이 읽으셨나요?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근데 읽다보니까 한계도 느끼고, 뭘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책을 읽고 나면 머리도 맑아지고 성숙해지는 걸 느끼겠는데 도대체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몰랐어요. 그러다가 두꺼운 장편을 며칠에 걸쳐 읽고나면 ''아, 이건 너무 무거웠다, 과중한 짐을 진 것 같다''는 생각도 하고. 그런 식으로 책을 많이 읽었어요.
- 대학 때 전공은?
그림을 전공했어요. 군대 제대 후 연극과 영화 음악에 관심이 있어서 좋은 작품들을 많이 봤어요. 당시엔 그런 쪽에 대해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기관이 없었어요. 음대에서 가르치는 고전음악은 이미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이었고요. 오케스트레이션 빼고 화성법이나 대위법은 이미 숙지가 되어있었거든요.
제가 녹음하던 킹레코드라는 녹음실에 놀러왔었어요. 그 당시엔 그곳이 메카였어요. 조용필 선배님, 나훈아 선배님, 김추자 선배님 등이 다 그쪽 출신이신데, 이문세 씨가 놀러 오셨더라고요. 당시 저는 아르바이트로 선배님 밴드의 피아노 반주를 하고 있었는데, 신촌블루스의 엄인호 선배님께서 이문세 씨와 저를 소개시켜주셨어요.
- 이문세 씨를 처음 봤을 때 느낌은 어땠나요?
당시 이문세 씨는 가수보다는 진행자로서 유명했어요. 워낙 명랑하고 쾌활해서 개그맨 친구들이 많았고, 데뷔는 했지만 아직 성공하지 못한 가수였어요. 어리고, 자기 창법도 없었죠. 그래서 어떤 곡은 송창식 선배님처럼 부르고, 또 어떤 곡은 나훈아 선배님처럼 부르고. ''파랑새''도 하남석 선배님의 곡을 리메이크했던 거였는데, 이문세 씨가 잘 못 불러서 곡을 버려놨어요.(웃음) 그래서 제가 만든 곡들을 들려주고 같이 연습하기 시작했어요.
- 왜 이문세 씨에게 곡을 주셨나요?
저도 신인이었고, 이문세 씨도 마침 자기 곡이 없는 무명가수였던 거죠. 이문세 씨는 목소리가 시원시원했어요. 그 친구가 술 담배를 안 하거든요. 반면 저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도 술 담배를 열심히 했죠.(웃음)
- 이문세 씨와 처음 작업한 곡은?
''소녀'', ''휘파람'', ''빗속에서'', ''할 말을 하지 못했죠'' 등을 연습한 뒤에 그 다음해에 판을 냈어요. 근데 제 곡은 당시로서는 흔한 장르가 아니었어요. ''소녀''나 ''휘파람'' 같은 곡은 없었던 장르였어요. 그래서 처음엔 타이틀곡이 없었어요. 곡이 다 어렵다고요. 그래서 나중에 만든 곡이 ''난 아직 모르잖아요''였어요. 트로트 같으면서도 세련된, 정확히 말하면 로카발라드라는 장르인데, 그걸로 타이틀을 했죠.
- ''난 아직 모르잖아요''를 만들게 된 배경은?
제가 25살이었는데 그해 녹음하는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오랫동안 사귀던 여자친구와의 헤어짐도 있었고요. 그런 감상이 가사로 들어갔던 곡이에요.
-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은 어떤 배경에서 만드셨나요?
예전에 대학로에 작업실이 있었는데요. 제가 대학로를 참 좋아했었어요. 80년대 초반엔 지금처럼 번잡하지 않았어요. 밤을 세고 아침에 동숭동 길을 산책하던 버릇이 있었는데, 그 당시의 감상을 적은 곡이에요.
- 새 노래가 나올 때마다 사모님이 가슴아파하셨다고요?
결혼하고 10년쯤 후에 그 말을 하더라고요. 제 곡은 제가 직접 가사를 쓰는데 테마가 늘 사랑이잖아요. 그러니까 친구들이 놀렸나봐요. 친구들에게 새 앨범을 선물로 주면 ''또 사랑 노래 아니냐''고 하고. 그래서 어느 날 저한테 부탁을 하더라고요. 돈 안 벌어도 좋으니까 가요 작곡 안했으면 좋겠다고. 그 이후로 제가 곡을 안 썼어요.
- 이문세 씨 13집의 ''마이 와이프''라는 곡은 사모님을 위한 곡인가요?
네. 그 곡을 선물로 줬는데, 너무 늦게 선물해서 그런지 거들떠보지도 않더라고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죠.(웃음)
- 이문세 씨와 7집까지 함께 작업하신 뒤에 음악적으로 헤어진 이유는?
제가 음악적인 한계를 느꼈어요. 음악엔 여러 장르가 있는데, 이문세라는 한 가수를 통해서만 표현하는 데 한계를 느꼈어요. 그래서 그 이후로 제가 하고 싶었던 연주곡을 녹음해서 앨범을 냈어요.
- 이문세 씨가 서운해 하지 않던가요?
아니오. 약간 씁쓸한 정도였죠.
- 그 이후 한동안 곡 의뢰가 없었다고요?
네.
- 가수와 작곡가가 한번 콤비가 되면 다른 사람들은 넘볼 수 없는 울타리가 생기는 건가요?
그런 면이 있겠죠. 후배들이 보기엔 어려울 테고.
- 대중가요를 작곡하면 수입은 어느 정도 되나요?
제 또래의 대기업 직장인 정도는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요즘 젊은 작곡가들은 굉장히 어려울 거예요. 작곡비가 따로 없고, 인세 제도가 취약해서 자기가 직접 제작을 하지 않는 한 작곡 수입만으로 계속 음악 생활을 하기가 힘들 거예요.
- 앨범 제작도 하셨죠?
이문세 씨 7집부터 제작을 같이 했는데요. 직접 제작하니까 잘 안 팔리더라고요.
- 제작을 하면 어떤 점이 달라지나요?
전 아티스트니까 돈이 얼마 나가는지 모르고 그냥 제작을 하거든요. 그래서 제작비를 두 배 더 쓰게 되더라고요. 음악적으로 욕심을 부리다보니 좋은 편곡과 좋은 연주가를 쓰게 되고, 조금만 맘에 안 들어도 다시 녹음을 하고. 다른 제작자들이 얼마에 맞추자고 하면 남의 돈이니까 미안해서 못 쓰는데 제 돈으로 하니까 더 쓰게 되더라고요.
7집 앨범을 제작하고 난 뒤에 저는 모스크바에 가서 볼쇼이 오케스트라랑 제 소품집 연주곡을 녹음했고, 93년에 프랑스에서 열린 음악 박람회에 출품을 하는 등 제가 하고 싶은 걸 했어요. 좀 사치를 부렸죠. 제가 만들었던 연주곡 40곡 정도를 음반으로 출시했어요. 그 사이에 이문세 씨는 다른 후배 작곡가들과 같이 작업했고, 그 후에 이문세 씨 9집에서 다시 같이 작업했어요. 9집의 타이틀곡이 ''영원한 사랑''이었는데,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이승철 씨가 그 노래를 다시 부르기도 했죠. 아무튼 그걸 하고 또 제가 쉬었어요. 영화음악만 조금 하고요. 저랑 술친구인 이민용 감독님 작품은 제가 꼭 영화음악을 해드렸죠.
- 작사를 직접 하시는 이유는?
처음엔 제 멜로디에 제가 가사를 붙이는 게 편해서 한 건데요. 나중엔 다른 작사가들에게 부탁을 해도 좀 어려워하면서 잘 안 써주더라고요.
- 작사와 작곡 중 뭘 먼저 하시나요?
노래에 따라서 달라요. ''난 아직 모르잖아요'' 같은 경우 멜로디 한 줄 쓰고, 가사 한 줄 쓰면서 만들었어요.
- ''그녀의 웃음소리뿐''의 후렴구에 ''너는 무슨 말을 했던가''가 반복되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뭔가 느끼긴 했는데 기억이 안 났나봐요. 좋지 않은 말이었나 보죠.(웃음)
- 어떤 인터뷰에서 "이문세 이후로 진정한 발라드 가수의 명맥이 끊어졌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이문세 씨 이후로도 변진섭 씨나 신승훈 씨 등 훌륭한 가수들이 많이 있죠. 다만 작곡가나 가수가 직접 주도하는 앨범이 아니라 제작자들이 상업적으로 기획해서 나온 앨범이 많기 때문에 가수들의 성향을 배제된 상업적인 앨범이 많이 제작되고 있죠. 요즘 힙합이나 댄스 하는 후배들을 보면 목소리가 그쪽이 아닌데도 굳이 그쪽으로 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장르에 안 맞는데 제작자들이 억지춘향식으로 만든 것 같다는 생각에서 그런 말을 한 것 같아요.
- 이문세 씨 12집, 13집에서 다시 같이 작업하셨는데요. 다시 만난 느낌이 어떠셨나요?
편안하게 했죠. 서로 늙어서 만나니까 기운도 없고, 맘에 안 들어도 서로 양보하고, 어차피 판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웃음)
- 지금 거주하시는 곳은?
호주 시드니에 있습니다. 이민을 간 건 아니고요.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해서 2003년에 갔습니다.
- 외국 생활이 창작에 도움이 되나요?
시드니는 늘 하늘이 파랗고 맑은 곳이라서 멜로디도 밝고 높고, 아무 상념 없는 곡들이 나와요. 예를 들어 저녁식사 시간에 술을 한 잔 하면서 제가 예전에 만든 노래를 틀면 그 분위기와는 안 어울려요. 정서적으로 차이가 나죠.
- 요즘 만든 곡은?
다 연주곡인데요. 대체로 맑고 밝아서 제 곡 같지 않은 곡도 있어요.
- 최근 음악인생 20주년을 맞이해서 <옛사랑>이라는 앨범을 만드셨는데요. 어떤 분들이 참여하셨나요?
후배들 중에는 임재범 씨, 이승철 씨, 윤도현 씨, 김동욱 씨가 참여했고요. 선배님들 중 정훈희 선배님, 전인권 선배님을 특별히 모셨어요.
- 앞으로의 계획은?
뮤지컬을 준비하고 있어요. 제 곡 중에서 제 음악 인생의 큰 획이 된 곡을 뽑으면 ''옛사랑''과 ''광화문 연가''인데요. 3년 전부터 ''광화문 연가''라는 제목으로 뮤지컬을 기획, 준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