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영화를 꽤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관객이라면 심영섭의 이름이 그리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김기덕 감독의 저격수라는 별칭이 붙은 영화 ''섬''의 리뷰나 모 신문 지상을 통해 가진 ''친애하는 적''과의 1대1일 대담 등으로 김기덕 영화에 대한 실랄한 비판의 메스를 가했다.
한 영화지에서 개봉 예정영화에 매기는 20자평에 심영섭 만큼 강렬한 쾌도난마를 했던 이가 얼마나 있었을까? 3년여동안 그는 ''목을 베려면 단칼에 벨 것''이라는 원칙하에 전생에 아마도 망마니였을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임신중에도 태교에 별로 이롭지 않을 법한(?) ''나쁜 남자''를 다섯번 보고 ''올드보이''역시 세번을 내리본 열혈 영화광 심영섭이 ''대한민국에서 여성 평론가로 산다는 것''이라는 속살 훤히 비치는 수필을 내놓았다. 앞서 출간한 영화 관련 전문 서적 세권과는 달리 이번 책은 영화 평론가 이전에 현실속에서 고뇌하는 ''할리우드 키드''의 인간미가 물씬 배어난다.
노컷뉴스가 최근 종로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심영섭을 만났다. 벌써부터 다음 책은 ''김기덕 감독 연구서''라고 못박아 말했다. 그에게 어찌 됐던 간에 영화 평론가로서의 존재감을 준 감독이자, 심리학자로서 정신분석학적으로 김 감독은 연구하기 최적의 대상이라는 이유에서다.
''대한민국에서 여성평론가로 산다는 것''은 여전사가 되는 것
책이 참 부담없이 쉽다. 영화 평론가들의 리뷰처럼 난해한 철학 미학 심리학 종교학의 준거틀을 갖다댄 현학적인 비평 내용이 아니라 1998년 영화 주간지 ''씨네21''을 통해 평론가로 등단한 이후와 그 이전의 삶의 군내나는(?) 궤적이 생생히 담겨있다. 인간 심영섭을 엿볼수 있는 좋은 기회다.
"삶을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결산서 같은 심정으로 삶의 정직한 부분을 많이 담으려고 했다"는 심영섭은 "솔직히 내가 편하려고 쓴 부분도 많다. 절보고 영화 평론가에 교수도 하고 있으니 고생 안했으리라는 선입견을 갖고 계시는 분들도 많은데 그런 환상 같은 것을 없애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고 말했다.
심영섭은 이혼직후 애 업고 집에 돌아온 딸에게 ''잘왔다''는 한마디로 응원해준 어머니의 이야기나 혹시라도 들어올 작은 일거리를 기다리며 차마 휴대폰을 꺼놓을 수 없었던 심정, 재혼, 그리고 책 마지막에 지금의 남편과 주고받은 러브레터, ''어떤 멜로영화''까지 솔직담백한 이야기로 한숨에 책장을 넘기게 만든다.
심영섭은 여성평론가로 사는 것은 결국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성찰이 깃든 전복력과 새로움을 발견하는 열린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내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여주인공 엄정화는 바로 나자신
심영섭은 스크린속에 자신이 주인공이 돼 등장하는 장면을 목격한적이 있다.
지난해 성공한 영화 ''내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속의 메인 주인공 엄정화가 소화한 캐릭터는 이혼한 정신과 의사 허유정, 허유정은 ''영화와 폭력''이라는 주제의 TV 토론 프로그램에 나가 상대주인공인 형사 나두철(황정민 분)과 심한 언쟁을 벌인다. 시사회를 통해 이 장면을 보던 심영섭은 깜짝 놀랐다. 바로 자신의 이야기 아닌가? 영화 ''친구''의 폭력성에 대해 한때 TV토론을 벌였던 모습에서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는 캐릭터를 구체화했던 것이다.
민규동 감독을 몰랐던 사이고 어찌된 영문인지 몰랐던 심영섭은 나중에 작가가 실토하는 바람에 웃어 넘겼다고 했다. 영화속 자신의 모습은 허유정으로 업그레이드 돼 똑똑하고 당당하고 새침한 전문직 여성으로 변모돼 있었다.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으로 영화속 심영섭은 바뀌어 있었지만 현실의 심영섭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처럼 매일 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지루하고 권태로운 일상을 살고있었기에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던 그때의 경험을 털어놨다.
그렇다면 심영섭은 ''내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 대한 리뷰를 어떻게 썼을까? 정답은 "안썼다"다. ""영화평론가의 입장에서는 글을 쓸만한 강렬한 매력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덧붙였다.
Thank you for the Movie!
그렇다면 평론가 심영섭이 좋아하는 진심으로 좋아하는 영화는 무엇일까? 그는 장르적으로 ''로드무비''를 꼽는다. ''파리 텍사스''''델마와 루이스'', ''아이다 호'' ''길'' 같은 영화말이다. 국내 작품으로는 허진호 감독의 ''봄날''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영화를 꼽는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 같은 광기있는 배우가 좋다는 말도 덧붙였다.
심영섭은 책을 통해 ''영화는 내 인생에서 너무 일찍부터 거기에 있었고 그냥 나와 함께 해주었다''고 평론가가 된 이유를 밝혔듯 "영화는 앞으로도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또 한번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