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녀 - 손진책 ''두 독신주의자의 결혼 이야기''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배우 김성녀

김성녀
멋쟁이지만 바람기 다분한 아버지, 재능은 많지만 평생 아버지만 보며 눈물로 시간을 보낸 어머니 사이에서 김성녀는 독신을 결심한다. 하지만 연출가 손진책과의 만남은 새로운 인간관계를 예고하는데…….

시어머니와 시댁 생활, 마당극과 연극 사이에서의 갈등 등 김성녀의 연기와 인생 이야기를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들어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배우 김성녀


- 연출가였던 아버지와 국극배우였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셨는데요. 어린 시절 극장에 대한 추억이 있으신가요?

그 시절엔 특별한 홍보 수단이 없잖아요. 그래서 유랑극단처럼 큰 트럭을 빌려서 의상이나 소품을 다 집어넣고 배우들도 함께 타고 지역을 돌았어요. 배우들이 의상을 입고 악기를 불면서 마을을 도는 게 선전하는 거였죠. 집시처럼 지역을 돌면서 3~4개월 동안 전국을 순회하는 게 당시 공연 문화였어요.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극장을 놀이터로 삼고 살았어요. 온 가족이 같이 공연을 하면서 돌아다녔으니까요. 5살 때부터 무대에 서기 시작했는데, 무대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게 소꿉놀이였어요. 극장에서 놀고, 데뷔하고, 결혼까지 했으니 저에게 극장이란 떼려야 뗄 수 없는 고향이에요. 그러다가 ''김삿갓''이라는 영화에 아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혼자 떨어져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죠.

-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나요?

아버지 고향이 함경도라 이북에 본처가 있으셨는데요. 전쟁 터지기 전에 남한으로 내려오셨다가 저희 어머니와 만나서 다시 결혼하셨어요. 아버지는 이북에서 연극하고 글 쓰던 분이었는데요. 당시 윤인자 씨라는 배우와 같이 내려오셨어요. 아마 두 분이 사랑의 도피를 하신 것 같아요. 그 후에 황해 씨, 장동휘 씨 등 연극계 동기들과 활동하시다가 여성 창극을 하던 어머니를 만나셨죠. 그때부터 아버지가 여성 국극 쪽에 눈 뜨시면서 어머니 쪽 세계로 완전히 전향하셨어요.

아버지는 굉장히 멋쟁이였어요. 아코디언, 피아노, 기타 등 못 하시는 게 없었고, 소위 말하는 그 시대의 신남성이라 여자들이 많이 따랐죠. 반면 어머니는 지고지순하고 한국적인 현모양처 스타일이었어요. 아버지는 어머니의 그런 순수한 면에 매력을 느끼셨대요. 그래서 제가 극과 극의 성격을 가진 부모를 갖게 됐죠. 아마도 저의 끼는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성실하게 가정을 꾸려간다거나 노래를 잘 부르는 건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아요.

- ''나는 배우로 타고났다''는 확신이 들었던 순간은?

무대에 들어서면 먼지 냄새가 있어요. 극장에 들어가서 그런 매캐한 것들을 접하면 아, 여기가 내 물이구나, 싶죠.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신기가 올라오는 듯, 전율이 일고 흥분 되요. 텅 빈 객석을 보고 있으면 투지가 생기고, 극장 안에만 들어가면 자신감이 용솟음쳐요. 어떤 배우가 와도 무대에서 붙어보자는 투지가 생겨요. 지금 공연 중인 ''벽 속의 요정''에서도 1인 30역을 하는데요. 남들은 어렵지 않냐고 하지만 저는 전혀 어렵지 않아요. 그리고 그동안 다양한 역할을 많이 해왔는데 마당놀이라는 큰 타이틀에 가려져서 저의 진면목은 숨겨져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지난날의 작업들이 이번에 집약되어 보이는 것 같아요.

- 1976년 극단 ''민예''에 입단하기 전까지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엄마가 국극을 하시면서 고생을 많이 하셔서 늑막염, 결핵 등에 걸려 쓰러지셨어요. 그러면서 저와 동생은 대학 진학을 못하게 됐죠. 그래서 제 동생과 함께 ''비둘기 자매''를 결성해서 까투리 사냥 음반을 냈어요. 허영심 때문이 아니라 집안을 끌어가기 위해서 엄마가 잘 불렀던 민요를 뽑아서 음반을 냈던 거죠. 최초의 민요 듀엣으로 가계를 이끌었죠.

근데 그게 제 정서엔 너무 안 맞았어요. 방송국에 가면 인사하고 다녀야 하는데, 전 그게 싫어서 화장실에 숨어있고 동생을 대신 시켰어요. 그리고 가수라고 하면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그런 것들이 너무 싫었어요. 돈을 못 벌어도 좋으니 사람대접을 받으며 내가 좋아하는 일을 떳떳하게 하자고 마음을 먹게 됐죠. 그래서 가수 생활을 조금 하다가 가야금 명창 인간문화재였던 박귀희 선생을 찾아갔어요. 근데 그분이 갑자기 ''네 엄마 재능을 보면 너는 말할 것도 없다''면서 곧바로 저를 전수생으로 시키셨어요. 그

- 극단 ''민예''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된 건가요?

국악을 막 시작할 즈음 저의 선배 중 한 사람이 ''가장 한국적인 음악극에 사람이 필요한데 네가 가서 오디션을 보라''고 권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처음 허규 선생님과 손진책 씨를 만났어요. 당시 허규 선생님이 이끌던 민예 극단의 젊은 연출가가 손진책 씨였거든요. 근데 가봤더니 허규 선생님은 손톱을 깎으시면서 소주 한 잔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빈촌의 농사꾼 같은 모습이었죠. 게다가 손진책 씨는 대뜸 저에게 ''한네의 승천'' 대본을 주면서 바로 주인공을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혹시 이게 사이비 극단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 사람들에게 물어봤더니 국내에서 알아주는 극단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한네의 승천''의 주인공 역할을 통해 아역 때 이후로 다시 데뷔를 하게 됐죠.

- 김성녀 씨도 어머니처럼 연출가인 손진책 씨와 결혼하셨는데요?

아버지는 여자들에게 워낙 인기가 많았고, 본인도 여자를 좋아하셨어요. 저보다 나이가 조금 많은 애인도 있었죠. 그리고 엄마는 아버지에게 속상한 걸 맏딸인 저에게 다 털어놓으셨어요. 그런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전문적인 직업을 얻어서 혼자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독신주의자였죠. 근데 손진책 씨도 연극하고 결혼했으니 가족을 고생시키면 안 된다고 하면서 독신주의를 선언했어요. 그래서 두 독신주의자가 맘 놓고 같이 다니다가 결혼을 하게 됐어요.(웃음)

- 결혼을 결심하게 된 순간은 언제였나요?

손진책 씨는 여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전화도 안 걸고, 늘 작품 얘기만 하는 진지한 청년이었어요. 저는 잘 웃고 까부는 스타일이었고요. 연극이 끝나고 술자리에 가면 저는 항상 크게 웃어요. 그러면 손진책 씨가 성냥개비를 잘라서 던지는 거예요. 웃지 말라고, 너무 넘친다면서 저를 자제시켰던 거죠. 그러다가 ''한네의 승천''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 술을 마셨는데 감정이 격해지면서 그렇게 눈물이 났어요. 술이 취해서 통곡하는데, 그 다음 날 손진책 씨가 전화로 ''3일 동안 근신해!''라고 하더라고요. 자기가 뭔데 그러나 싶었는데, 그 후로 미술관이나 음악회에 같이 가면서 만남을 가졌어요.

근데 저희는 데이트 하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손진책 씨는 늘 예술에 대해서 얘기했고, 좋은 배우 만들기 프로젝트로 들어간 것처럼 저를 대했어요. 늘 아주 작은 소줏집 같은 데만 데려가고, 통행금지 걸릴까봐 뛰고, 돈이 없으니 택시를 태워 보낸 적도 없고, 매너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어요. 이게 연애인가 싶었죠. 그러다가 어느 날 사고가 생겼어요. 저녁에 술을 마셨는데 통행금지 시간을 넘긴 거예요. 그날 저희 큰 아이가 생겼죠.(웃음) 독신주의자 둘이 만나서 아이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결혼했어요.

- 8남매 집안의 장남과 결혼했는데, 힘들진 않으셨나요?

결혼할 땐 둘 다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순수한 마음으로 가난한 연극쟁이에다가 8남매의 장남인 사람에게 겁도 없이 시집을 갔죠. 저는 순수한 걸 좋아하는데요. 손진책 씨가 참 순수하고 계산을 몰랐어요. 돈을 모르고, 하늘의 별을 따는 사람 같은 연극인들의 삶 자체가 저에겐 감동적이었어요. 그래서 고생하더라도 같이 해보자는 마음에 결혼을 했어요.

근데 그렇게 힘들 줄 몰랐어요. 경제적 어려움도 어려움이었지만 8남매의 맏며느리로서 사람들과 거미줄처럼 얽힌 게 정말 힘들었어요. 남편은 영주 안동 쪽이라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제사가 1년에 12번이 넘었어요. 그리고 제가 하는 연극을 딴따라라고 생각하는 집안이라 무시도 당했어요. 쇠가 용광로에 몇 번 들어갔다 나오면 강철이 되잖아요. 결혼 생활 10년 하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결혼 생활 10년 하고 나서는 사막에 갖다놔도 살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제가 어린 나이에 결혼했으면 이혼을 생각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 그 시절엔 일하는 여자도 별로 없었잖아요. 일과 가사를 병행하는 게 정말 힘들었을 것 같아요.

한계점까지 일하다가 뛰어가곤 했죠. 일하고 오면 밤에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를 해야 했어요. 그리고 시댁 식구들과 같이 살았는데 제가 늦잠을 자면 어머니가 딸들 이름을 그렇게 부르셨어요. 저더러 일어나라는 거죠. 제가 일어나면 조용해지셨어요. 그리고 시누이들이 제 옷을 맘대로 입고 다니는 거예요. 그런 사소한 것에서 화가 났어요. 그런 걸 남편한테 말했더니 가족들과 함께 얘기하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가족회의에서 얘기를 했는데요. 어떻게 저런 얘기를 할 수 있냐면서 어머님과 시누이들이 다 나가버리셨어요. 그 시절엔 그런 게 안 먹혔던 거죠. 그 후로 제가 입을 다물었어요. 근데 저에게도 잘못이 있었어요. 말하는 방법론에서 틀렸던 거죠. 자존심 상하는 얘기를 대놓고 하면 안 되잖아요. 살짝 불러서 얘기하든가 해야지.

손진책 씨는 ''우리 엄마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분''라고 말했는데요. 아들한테는 모든 엄마가 법 없이 살 수 있죠. 근데 며느리한테는 법이 있어요.(웃음) 그래도 좋은 어머님이긴 하셨어요. 내가 좀 더 지혜로웠다면 어머님을 제 쪽으로 잘 끌어들일 수 있는 노하우를 찾았을 텐데, 그때만 해도 억울한 생각만 머리에 가득 찼어요. 그러니까 퉁명스럽게 대하고, 말도 잘 안 하고. 어머님도 고달프셨겠죠. 어머님 입장에서는 ''내가 8남매를 키웠는데 며느리까지 키워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드셨을 거고, 또 둘이 나가서 일하는데 벌어오는 것도 별로 없고.


그러다가 10년 만에 어머니하고 단독으로 붙었어요. 제가 불평불만을 다 털어놓았더니 어머니가 ''미안하다, 너에게 잘못했다, 그래도 난 딸들보다 너한테 용돈 받는 게 제일 좋다, 앞으로도 너한테 용돈 달라고 하겠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두 사람 마음이 탁 통했어요. 그러고 나서 몇 년 후에 돌아가셨어요.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다 해야 해요. 처음에 좀 상처를 받더라도 그게 단련되면 서로 이해하는 공통적인 부분이 생겨야 해요. 전 처음에 참고 말을 안 하다가 10년이 흐른 거예요.

- 따님도 배우인데, 혹시 그렇게 살까봐 걱정되진 않으세요?

우리 딸은 잘 할 거예요. 저와는 다르거든요. 딸은 시부모님 모시고 대가족으로 살고 싶대요. 손님들 오면 좋아서 눈썹을 휘날리면서 다니고, 음식 해주는 거 좋아하는 아이에요. 시댁 식구들한테는 사랑받으면서 살 거예요.

- 극단 ''미추''가 20주년이 됐는데요. 미추의 역사에 대해 알려주세요.

손진책 씨가 결혼한 지 10년 만에 극단 민예에서 손진책 연출연구소로 독립해서 나왔어요. 허규 선생님한테 배운 연극관에 자기 색깔을 입혀서, 마당놀이라는 가장 새롭고 한국적인 뮤지컬을 만들기 위해 나왔던 거예요. 그게 미추가 됐죠. 올해가 결혼 30주년이자 극단 미추의 20주년인데요. 손진책 씨는 ''벽 속의 요정''이 결혼 30주년 기념 선물이라고 하더라고요.

- 마당놀이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연극계에서는 연극이 아니라고 하고, 국악계에선 국악이 아니라고 하고. 마치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수십 년 동안 혼자 자생한 게 마당놀이예요. 어떤 장르든 새로 시작하면 인정을 못 받고, 자기들이 할 수 없는 걸 하면 더욱 인정을 안 해요. 외국인들은 가장 한국적인 연극을 마당놀이라고 칭하는데 우리 자신은 마당놀이를 평가절하 하죠. 제가 정극을 하면 ''어떻게 마당놀이 배우가 정통연극을 잘 하냐''는 얘기를 해요. 기절할 노릇이죠.

-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최승희''를 꼽으셨는데요?

최승희의 삶은 이데올로기에 희생됐고, 예술가로서 자기 뜻을 못 펼치고 전성기를 구가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그 흔적을 더듬어가다 보니 예술적으로 표현하기엔 제가 너무 부족했어요. 근데 삶 쪽으로 가다보니 비슷한 게 참 많은 거예요. 외로운 삶에서 무대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걸 버려야 했는지. 삶에서 얻어지는 공통적 분모가 너무 많았어요. 저도 연습 나간다고 하면서 애들에게 따뜻한 밥 한 번 못해줬거든요. 그런 부분들이 ''이 엄마는 아직도 할 일이 남았다''라는 식의 대사와 연결됐어요. 모든 대사에서 저의 한이 표출되는 것 같아서 마치 분신처럼 연기했어요.

- 딸 손지원 씨는 영국에서 ''미스 사이공''에 출연 중이라고요?

네. 영국으로 유학 가서 학교를 다니다가 뮤지컬의 대표극단인 매킨토시에 오디션을 봐서 들어갔어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매킨토시에서 활약하고 있어요. 지금은 ''미스 사이공''에서 지지 역할을 하고 있는데요. 8월에 계약이 만료되는데 그쪽에선 더 하자고 하지만 본인은 한국에서 활동하고 싶어 해서 올 8월에 들어옵니다.

- 배우로서 딸을 평가한다면?

우리나라는 외모로 배우를 평가하지만 외국에선 실력으로 평가해요. 우리 딸이 바디 컨디션은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개성과 실력이 있어요. 국내에서는 외모로 뽑히긴 힘들 것 같아서 자신감을 못 찾았어요. 그러다가 영국에 가서 자신감을 찾았어요. 딸은 재능과 감각이 뛰어나요. 그래서 배우로서보다는 배우와 제작, 기획, 연출까지 다 할 수 있는 큰 연극인이 되길 바라요. 근데 이런 말을 하면 딸은 굉장히 자존심 상해해요. 자기가 배우로서 부족하냐면서 따져요.(웃음)

- 지금 공연 중이시죠?

''벽 속의 요정''이라는 모노드라마를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올리고 있어요. 그동안 무대에서 30년 인생을 살았는데, 제 이름을 걸고 혼자 2시간을 하는 모노드라마는 처음이에요. 여배우들은 보통 모노드라마로 진가를 발휘하는데요. 저는 극단 민예와 미추의 배우이자 손진책 씨의 아내이다 보니 그동안 제 작품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작년에 송승환 씨가 6명의 여성배우들을 모아서 여배우 시리즈를 기획했어요. 거기서 하게 된 ''벽 속의 요정''이 올해의 예술상, 비평가상, 동아연극상 여우주연상까지 3개 부문의 큰 상을 휩쓸었어요. 이번에 그 기념으로 방학을 맞아 재공연을 하게 됐어요.

- ''벽 속의 요정''은 어떤 내용인가요?

스페인 내전 때 사상 문제로 숨어 다니다가 벽 속에서 40년 간 숨어서 살았던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실화입니다. 지금 그 딸은 아직도 스페인에 살아있다고 해요. 그 이야기를 일본 작가가 뮤지컬로 썼어요. 그 뮤지컬 원작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에요.

- 앞으로의 계획은?

''벽 속의 요정''을 제 레퍼토리화해서 계속 올리고 싶어요. 그리고 힘 떨어지기 전에 여러 작품에서 배우로서의 모습을 많이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가 중앙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요. 한국적인 음악극에 대한 교재가 전무해요. 그래서 제가 상반기에 책을 두 권 썼는데요. 앞으로도 실기인을 위한 교재를 계속 만들고 싶어요. 최종적으로는 건강해서 눈을 감기 전까지 무대에 섰다가 생을 마감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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