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상 최초로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던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의 한국 대표선수들. 반 세기가 지난 지금 생존해 있는 당시 선수들은 박재승, 강창기, 이종갑 옹 등 세 명 뿐이다.
이 가운데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사는 박재승옹(84)과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사는 강창기옹(80)에게 당시 이야기를 들었다.
노환으로 외부 접촉을 삼가고 있는 박재승옹은 다행히 집 근처에서 만날 수 있었으나 강창기옹은 4년째 전립선암으로 투병 중이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박재승 옹은 1954년 스위스에서 찍은 흑백 사진 속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기골이 장대했던 축구선수도 세월을 피하지는 못하는 법. 박재승옹은 여느 노인처럼 백발이 성성하고 거동도 쉽지 않았다.
다음은 당시 스위스 월드컵 대표선수들이 들려주는 ''대한민국 월드컵 첫 출전기''이다.
비행기 표가 없어 월드컵에 출전 못한 뻔
한국전쟁 이후 열악한 국내 상황은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에 출전하는 선수들이라고 봐주지는 않았다. 선수들도 월드컵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었다.
전송하는 응원단 한 명 없는 1954년 6월 여의도 공항. 출발 직전 베스트 11에 뽑힌 스위스 월드컵 한국대표선수들은 대한국민항공사(KNA) 소속 민항을 타고 일본 하꼬네에서 도착했다.
하지만 월드컵 경기 일자는 점점 다가오는데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 외국 여행 경험이 없었던 터라 공항에 가면 버스나 전차처럼 돈만 내면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줄 알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현지에 도착해서야 관계자들은 20여일 전에는 예약을 해야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때문에 선수단은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
선수단은 비행기를 타고 떠나기 직전까지 표를 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한 장 한 장 모았다. 이렇게 10장을 모았고 2장이 남은 상황.
한국 선수들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이름을 알 수 없는 잉글랜드 출신 신혼부부가 자신들의 표 2장을 양보해 선수단은 겨우 스위스로 출발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스위스 현지에 도착했지만 헝가리와의 첫 경기 시작 시각은 불과 10여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첫 경기 헝가리전, 대표선수 11명 중 4명 다리에 쥐 나 몰수패 위기
1954년 6월 17일 한국의 월드컵 본선 첫 경기인 한국과 헝가리 전. 정보가 전혀 없었다는 세간의 말과는 달리 한국선수들은 헝가리가 강한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선수들은 "어릴 적부터 축구만 한 인생인데 헝가리 선수들에게 밀릴 것이 있겠냐"는 생각을 가져 전혀 위축되지도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 9대0 참패. 선수들은 그 때 수비 위주로만 갔어도 그렇게 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되돌릴 수 없는 결과였다.
사실 이날 경기를 뛰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46시간 쉬지 않고 비행기를 타고 온 선수들의 컨디션은 엉망이었고 요즘 전지훈련 격인 단체 훈련도 당시에는 일주일 밖에 없었다.
박재승옹은 여기에 조금 다른 이야기를 덧붙였다. 헝가리의 두 번 째 골이 터진 전반 18분까지는 잘 싸웠고 헝가리 관중들도 일어서서 관전을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골을 먹으면서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것. 한국은 두 번째 골 5분 뒤에 또 골을 먹는 등 전반전에만 5실점을 했다. 선수들은 경기장을 나오면서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박재승 옹은 전했다.
강창기 옹은 선수들 중 4명이 다리에 쥐가 나서 실제 경기에는 7명이 뛴 셈이었다며 몰수패를 당할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대패는 당연한 결과였다는 뜻이었다.
헝가리전 다음에 벌어진 터키전. 당시 선수단을 이끌었던 고 김용식 감독은 헝가리 전에서 선수들의 체력이 떨어졌다고 느껴 다른 선수들을 대거 투입했으나 7대0으로 패했다.
강창기 옹은 두번째 경기에서도 패색이 짙어지자 한 골이라도 넣으려고 급한 마음에 뛰는 바람에 큰 점수차로 지게 되었다고 말했다.
1950년대 한국 축구선수들은 등번호도 없는 축구복 입고 월드컵 출전?
그 때를 돌아보며 풀어놓은 에피소드.
스위스 월드컵 한국과 헝가리전에서 관중들은 신기한 장면을 봤다. 파란색 선수복을 입은 한국 대표 선수들의 등에 등번호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현지에는 한국이 축구할 때 등번호도 없이 축구를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전쟁 직후 물자와 기술이 부족한 한국이 등번호를 새기지 못했다는 소문도 곁들여졌다.
이에 대해 생존 대표선수들은 "사소한 실수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박장대소를 했다. 박재승 옹은 "글쎄 그걸 확인했어야 하는데"라며 말을 꺼냈다.
사실은 선수복 제작업소가 제작할 때 등번호를 깜박한 것이었다. 선수단도 월드컵을 며칠 앞두고 급하게 선수복을 주문했기 때문에 출발 직전 공항에서 선수복을 받아 미처 확인할 시간이 없었던 것.
경기 시간에 촉박하게 맞춰 현지에 도착하고서도 확인을 안하고 있었는데 막상 경기를 하려고 선수복을 꺼내니 등 번호가 빠져있었던 것이다.
이를 알게된 한국 선수단은 난감해 했고, 대회 관계자들은 부랴부랴 천으로 된 숫자들을 구해 핀으로 등에 고정을 시킨 뒤 헝가리 전을 뛰게 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는 박재승 옹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축구하면서 등번호 안 달았겠느냐"며 "하지만 그때 월드컵에 참가한 국가와 관중들은 한국은 등번호도 없이 축구하는 줄 알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버스 빌릴 돈 없어 다른 팀 경기 못 본 것이 가장 아쉬워
당시 스위스 월드컵 대표팀이 가장 아쉬웠던 것은 무엇일까.
박재승 옹은 주저없이 다른 나라의 경기를 못 본 것이 가장 아쉬웠다고 말했다. 헝가리와 터키에 연달아 패하고 나서 선수들은 현지에서 축구 선진국 대표팀의 경기를 관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스위스 월드컵 대표팀 20명이 해외원정경기를 가면서 갖고 간 경비는 모두 200달러였다. 물가를 감안하더라도 빠듯한 돈이었다.
그래서 선수들은 경기장에 갈 버스를 빌릴 수가 없어 남은 경기를 못 봤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대신 경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한국 대표팀은 경기 후 이탈리아로 이동했다. 몇 년전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토리노의 축구팀과 경기를 하고 300달러를 받아 로마로 이동한 뒤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내 생전 소원은 한국의 월드컵 우승 소식"
2006 독일 월드컵을 보는 재미에 흠뻑 빠져있다는 박재승 옹은 아직도 축구경기를 보면 몸이 들썩인다고 한다.
특히 과거에 비해 요즘 축구 수준도 많이 높아졌고 시민들의 열렬한 응원도 전무후무하다며 부러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박재승옹은 이어 "24일 스위스전 이겨야죠"라고 운을 뗀 뒤 팔십 평생을 축구에 바쳐왔다는 원로로서 2006 독일 월드컵 대표선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박재승 옹은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16강에 목표를 두고 있는 것 같은데 욕심인지 모르지만 축구는 오직 우승"이라며 "우리나라도 발전한 만큼 이제 목표를 우승에 갖다놓고 이야기를 하면 좋을 것 같다"고 강조했다.
또 "사실 내 생전에 월드컵 한 번 우승하는 것을 보는 것이 절대 희망인데 후배들이 잘해서 월드컵 우승을 천당에 안고 가는 선물로 받았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두 시간 가까운 인터뷰를 마치고 빗속에서 뒤돌아서 가는 박재승옹의 모습에서는 최선을 다해 뛰었으나 어찌할 수 없었던 50여년 전의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겹치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