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김진애 "서울시장 해보고 싶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인사동과 산본의 설계자, 김진애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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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애는 서울공대의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어려서부터 만들기를 좋아하고 에너지 넘치던 그녀가 인사동과 산본을 설계하고, 대통령 자문 건설기술건축문화 선진화 위원회 위원장이 된 이야기를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들어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건축가 김진애


- "걷고 싶은 도시가 정말 좋은 도시"라고 말씀하셨죠?

도시란 일종의 사교장이에요. 모르는 사람끼리 사교하는 거에요. 사람 구경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고, 또 무대에 나가서 남들이 봐주는 것도 근사하잖아요. 그런 큰 사교장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교장이 된다는 건 도시에 공공성이 살아있는 거거든요.

- 고향인 경기도 군포에서 언제 서울로 오셨나요?

3살 때 왔어요. 근데 서울로 오기 전의 기억이 남아있어요. 제가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물이 흐르고 바위 위에 하얀 게 널려있는 이미지가 머릿속에 있었어요. 근데 나중에 친척댁에 놀러갔다가 어디서 본듯한 기억이 있길래 엄마에게 여쭤봤더니 제가 거기서 살았다는 거에요. 그 기억을 커서도 갖고 있었던 거죠. 그리고 서울에 처음 왔을 때도 하늘 끝으로 한도 없이 올라가던 기억이 있어요. 알고 보니 서울에 와서 처음 살았던 곳이 창신동 달동네였대요.

- 7남매 중 셋째딸이라고요?

맨 위로 오빠가 있고요. 원래는 10남매였어요. 요새 같으면 훈장 받아야죠.

- 스스로를 ''김진애너지''라고 표현하신다던데요?

동료 건축가가 붙여준 별명인데 굉장히 근사하더라고요. 근데 엄마는 열 명을 낳았고, 전 둘만 낳았잖아요. 에너지로 보면 엄마가 더 강하시죠. 애 키우는 것만큼 에너지 많이 드는 게 어딨겠어요. 저는 그 에너지를 다른 방법으로 쓰는 거고요.

- 어린시절엔 어떻게 자라셨나요?

어렸을 때 아버지 하시는 말 중에 "있는 건 딸밖에 없습니다"란 말이 듣기 싫었어요. 그래서 항상 오빠를 못마땅하게 보면서 살았죠. 저희 언니가 결혼을 일찍 했는데요. 계란을 맘껏 먹고 싶어서 일찍 결혼했다고 하더라고요. 딸은 계란 하나도 맘대로 먹지 못하는 분위기에서 자란 거에요. 저도 어렸을 때 한을 품고 살았죠.(웃음) 한번은 제 생일에 엄마가 밤 늦게 절 부르시더라고요. 그래서 부엌에 가보니 큰 왕새우를 담아주시는 거에요. 지금까지도 생각이 날 정도로 감격스러웠죠.

- 부모님의 교육열이 높으셨나요?

농사짓다가 나중에서 상인으로 변신한 전형적인 중산층이죠. 교육열은 그 시대라면 마찬가지고요. 조금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대학은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물론 20여년에 걸쳐서 애들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 나눠서 할 수는 있었겠죠.(웃음) 그렇게 교육열이 높았다고 할 수 없지만 우리 형제 중에는 제가 공부를 잘 하는 편에 속해서 살아남았죠.

- 학창시절엔 어떤 성격이었나요

제가 활동적이고 적극적이다보니 예전부터 한가닥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어렸을 때 친구들 만나면 ''네가 그 김진애였니?''라는 얘기를 많이 할 정도로 다들 놀래요. 그 정도로 부끄럼 많고, 수줍고, 자기 책상에서 1m도 벗어나지 않은 아이였어요. 그리고 제가 어렸을 때 호기심이 많아서 질문을 많이 했나봐요. 그래서 주변에서 ''너 참 이상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전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 이후로 입을 다물어버렸어요. 그런 채로 고등학교 때까지 지냈죠. 속으로만 칼을 갈면서 책을 많이 봤어요. 그래서 중고교 시절엔 혼자 노는 스타일이었어요. 밖에선 모범생인 척 했지만 소설도 많이 읽고, 영화도 많이 봤죠. 어렸을 때 소설을 많이 읽으면 좋은 점이 모든 인간에겐 약한 점이 있다는 걸 미리 알게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세상이 안 무서워요. 그리고 대학 때부터 남자들 세계에서 있다보니까 남자들이 속으로 얼마나 약한지도 많이 봐왔어요.

- 서울공대에 입학한다는 게 당시로서는 흔한 일이 아니었죠?

네. 어려웠죠. 건축과 간다고 말하면 주저앉히니까 2년 동안 비밀로 품고 있었고, 지원서 넣을 때 아버지는 원서를 던져버리셨어요. 근데 엄마는 믿어줬어요. 그리고 떨어지면 떨어지지라는 마음으로 서울공대에 지원했어요. 떨어지면 다른 대학에 가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어쨌든 우연히 붙었어요. 우연이 운명이 된 거죠.

- 공대의 남학생들 사이에서 혼자 있을 때의 기분은 어땠나요?

기분 좋았죠. 800명이 저만 보고 있는데 얼마나 신나요. 당시 유행했던 미니스커트도 입고 다니고. 그때 사진 찍은 거 보면 제가 봐도 괜찮더라고요. 저는 그런 점에서는 당당하고 뻔뻔한 면이 있어요. 누가 절 보고 운운하는 것에 대해 개의치 않았어요. 서울공대 다닐 때 여자 화장실이 없어서 남자들과 같이 화장실을 썼어요. 그런 면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았어요.

- 가방도 안 들고 다니셨겠어요?

요새 공대 남학생들은 우스개소리로 ''여학생 가방 들어주느라 학교 온다''고 하던데, 당시엔 그런 립서비스가 없었죠. 그래도 교수님께서 저를 레이디로 대접해줬던 건 기억나요. 항상 의자 찾아주시고, 닦아주시고.

- 그런데 왜 하필 건축이었나요?

전 문과에도 기질이 있었어요. 미대 가려는 생각도 했었죠. 근데 어릴 때부터 가장 큰 목표가 독립해서 살겠다는 거였어요. 내가 벌어서 내가 먹고 산다는 것.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이과가 나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과 중에 선택하다보니 결국 건축과가 아주 괜찮은 옵션으로 남은 거에요. 그래서 건축과를 택한 게 저에겐 행운이었죠.

- 첫 직장은 어디였나요?

설계사무소였는데요. 요새처럼 컴퓨터 있는 것도 아니고, 제도판 놓고 매일 야근했죠. 당시 오일쇼크가 왔을 때라 경제가 힘들었는데 그래도 첫 직장은 괜찮았어요. 요즘 여성 후배들 보면 많이 따지는데 처음엔 터프한 곳, 고생스럽고 막 부리는 곳에 들어가도 괜찮다고 봐요. 건축은 구조도나 설비도 등도 다 그려야 하는데, 그런 걸 다 배우니까 좋죠. 그런 걸 알고 일하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크니까요. 그리고 학교로만 전전하는 건 반대에요. 어쨌든 현장에 나가봐야 해요.

- 그러다가 2004년에 정치에 뛰어든 계기는?

건축은 과학과 예술의 조합임과 동시에 사회현실의 반영이에요. 특히 개발공약을 보면 그런데요. 전문가로서 일하면서 사실 굉장히 답답면이 많아요. 멋있게 설계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하는데, 그렇지 않거든요. 돈과의 싸움이고, 인허가와의 싸움이에요. 전문가들이 좋은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이 반영되지 않을 때의 답답함이 커요. 그런 답답함을 20~30년 동안 갖고 있었어요.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여자가 유명하면 정치계에서 귀찮게 굴잖아요. 저도 굉장히 많이 시달렸는데요. 쭉 아니라고 하다가 참여정부의 탄생에서 이제는 뭔가 해볼 수 있는 가능성을 본 측면도 있었어요. 그래서 참여하게 된 거죠. 근데 사실 지역선거까지 나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다들 비례대표로 전문가로서만 하라고 했는데요.

당시 제가 속한 정당이 워낙 힘들었어요. 근데 제 성격상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가만히 못 있어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나서달라고 하면 쓴잔을 피하지 않는 성격이라 출마했다가 떨어졌죠. 근데 떨어져서 좋은 점도 있었어요. 사람들은 저를 그냥 잘 나가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해요. 속은 안 그런데. 그런데 총선에서 실패하고 나서 남들에게 드러낼만한 확실한 실패가 생긴 거에요.(웃음) 사람들이 동정해주는 게 좋더라고요.

저도 알고보면 참 불쌍하고 힘든 사람인데 남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좀더 에너지를 발휘해달라고 하다가 그 에너지도 꺾을 때가 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 거죠. 그리고 총선 끝나고 보름 후에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선거에 실패하고는 울지 않았는데 엄마 돌아가시고 울었어요. 요샌 누구에게 기댈 곳이 없으니 아쉽죠. 엄마 앞에 가면 약해질 수 있잖아요.

- 앞으로 서울시장 같은 데 출마할 생각 있으신가요?

서울시장은 해볼 수 있는 일이라고 항상 생각해왔습니다.

-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가장 큰 선입견은?

언제나 강하다고 얘기하는데요. 그건 거짓이기도 하지만 사실이기도 해요. 제 스스로가 강하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리고 두번째는 제가 돈을 굉장히 많이 벌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전혀 아니에요. 항상 공익성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지 못해요.

- 산본을 설계하실 때 가장 주력을 둔 부분은?

전 스토리를 많이 안으려는 노력을 해요. 스토리가 많이 녹아나고 감성을 자극하는 단서를 만들어 놓는 게 저의 디자인의 소신이에요. 우리나라 도시들이 불친절하고 재미없는 이유는 스토리가 너무 단순하다는 거에요. 영화로 치면 블록버스터 한편 만들어놓는 식이다보니 그렇죠. 산본의 경우 다른 도시보다 규모가 작다보니 사람들이 나름대로 스토리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여지가 있어요.

- <인생은 의외로 멋지다>라는 책도 쓰셨죠?

각 집안마다 아픔이 많잖아요. 고부 갈등이나 남편과의 갈등, 이혼, 별거 등. 저는 사람들에게 약간은 거리감을 두고 보라는 얘기를 많이 해요. 자기 이야기조차 거리감을 두고 보면 또다른 면이 보이거든요. 어려움도 하나의 현상으로 분석할 수 있으면 다르게 볼 수 있어요. 그럴 때마다 의외로 멋진 걸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 같아요. 가령 저는 시어머니와의 관계도 좀 달라요. 시어머니는 아들보다 저를 더 믿으세요. 남편과의 관계도 그렇고요. 저는 관계라는 말을 좋아하는데요. 도시에서 스토리가 중요하다고 했는데, 또 중요한 것이 관계거든요. 집을 한 채 지을 때도 길과의 관계, 건물과의 관계, 그 안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해요. 이처럼 관계에서 생기는 상처도 있지만 그것을 잘 풀어나갈 때 멋진 순간도 있어요. 그런 걸 파악하는 능력이 인생을 살아가는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는 언제였나요?

유학 갔다가 돌아와서 3년 동안 주택공사에서 일했는데, 이건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갈 데가 없는 거에요. 물론 먹고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있었지만요. 개인과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라는 위기였어요. 학교도 아니고, 연구소도 아니고, 대기업도 아니고. 편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가치가 조직 안의 논리에 파묻히는 게 싫었어요. 그리고 이쪽 분야가 연줄이나 부정부패와 관련된 게 많거든요. 그런 것에 제 자신이 파묻히지 않으면서 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가치를 지켜나가는 게 힘들더라고요. 그때 제가 창업을 했는데 정말 힘들었어요.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랬기 때문에 제가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는 생각도 하고요. 그 전까지만 해도 조직에 들어가서 일한다는 생각만 했는데, 그때 비로소 홀로 설 수 있는 테스트를 해볼 수 있었던 거죠.

- 그때 어떤 생각으로 버티셨나요?

글 쓰는 게 엄청나게 스트레스지만, 또 유일하게 자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맘대로 할 수 있잖아요. 지금도 제가 끊임없이 글을 쓰는 건 제 자신을 단련하는 의미도 있지만 그거라도 안하면 스트레스가 너무 쌓일 것 같아서에요.(웃음)

-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어떤 집인가요?

지금은 용산에 있는 80년 정도 된 집에서 살아요. 일제시대 때 지은 집인데요. 오래된 집에서 산다는 게 굉장히 흥미롭고 의외로 멋지더라고요. 그리고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산다는 게 재밌어요. 장독을 묻고, 호박을 기르면 이웃에서 서리해가기도 하고. 힘든 점도 있지만 재밌는 점이 많아요.

- "남편은 나의 천적이며, 우리는 너무 달라서 잘 맞는 타입"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저희는 굉장히 달라요. 전 뜨거운 편이고, 남편은 냉철한 편이에요. 전 일 벌리는 것 좋아하고, 남편은 일 벌리는 것 싫어하고. 전 요리파고, 남편은 청소파고. 굉장히 다른데 어쩌다 잘 만난 겁니다.(웃음) 남편은 천생 선비에요. 반면 전 황진이를 좋아하죠. 만약 조선시대였다면 저는 생애 모험을 하는 풍류인간이었을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서로 고마워해라'', ''누가 누굴 만나서 더 고마워해야 하는가''를 두고 많이 싸웁니다. (웃음)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는 것도 궁합이 잘 맞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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