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통이 쓰레기통(?) 과자봉지는 애교"

우체통 편지 줄어든 틈을 비집고 들어와

문제. 다음 중 우체통 안에 들어있지 않은 것은?

1> 초코파이 2> 담배꽁초 3>닭꼬지 4> 초등학교 시험 답안지

박정치^ 이장근^ 김규태. 이들은 우편 수집외에 쓰레기도 수거한다(?)
정답은, 아쉽지만 없다. 보기 문항 모두 우체통에 다 들어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보다는 ''누가 이럴까''가 제대로 된 질문 순서다. 잠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나는 자랑스런 우체통에 앞에 조국과 민족의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받쳐 쓰레기를 넣은 적이 없는지를.''

전자우편이 나오면서 편지가 사라졌다는 보도는 이제 익숙한 얘기다. 편지가 사라진 틈을 각종 신용카드 청구서, 공과금, 과태료, 행사안내문, 독촉장, 회원가입카드, 법원통지서가 메우고 있다. 편지가 줄어도 우체통이 ''기어이'' 남아 있어야 하는 ''존재 이유''다. 길이 145㎝, 너비 70㎝의 제비가 박힌 불그스레한 우체통의 평화를 틈입하는 자가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용서받지 못할 쓰레기들''이다.

"쓰레기요?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합니다. 오죽했으면 저럴까도 싶어요." 6개월째 우편물을 수집하고 있다는 동부산우체국 집배실의 박정치(38)씨가 덤덤하게 말했다.

"보통 월요일과 연휴 다음달에 쓰레기가 많습니다. 주말이 끼이다 보니, 쓰레기가 쌓인 것이겠지요." 나름의 분석도 덧붙인다.


우체통 쓰레기, 이제는 그러려니 합니다.

가로 21cm^ 세로 4.5cm 우편 투입구 속으로 가당찮은 쓰레기가 들어온다
매일 오후 1시부터 2시가 조금 넘은 시간까지 우체통 수집 작업이 이뤄진다. 주말엔 쉰다. 현재 동부산우체국이 관할하는 우체통은 1번부터 106번까지 모두 106개. 박정치씨와 이장근(41), 김규태(54)씨 세사람이 얼추 3등분해서 우편물을 수집한다.

동선은 다르지만 우편낭에 담아오는 쓰레기의 모습은 비슷하다. 담배꽁초, 과자봉지, 광고 전단지는 수집할 때 빠지지 않는 품목이다. 최근엔 5.31 지방선거에 맞춰 출마자들의 명함이 새로 추가됐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쓰레기 우범(?) 우체통 지역으로 부산역과 부산진역을 꼽았다. 오고 가는 사람이 많다보니 쓰레기 종류도 화려하다. 정류장과 택시 승강장, 지하철 출입구 주변 우체통도 어김없이 손을 탄다. 이런 곳의 우체통에선 기본 쓰레기는 물론이고 가끔은 가당찮은 쓰레기도 나온다. 가로 21㎝, 세로 4.5㎝의 우편투입구를 통과했다고 생각하기 힘든 빈 캔과 벽돌조각, 가방 등이 우체통을 당혹하게 하는 주범들이다.

"그래도 그런 쓰레기들은 괜찮습니다. 문제는 담배꽁초인데요"

아니, 담배꽁초가 왜? 이유는 이렇다. 지난해 4월. 구 KBS방송국 앞 횡단보도 옆 우체통은 수모를 겪었다. ''불''과는 전혀 상관 없을 법한 우체통에 불이 난 것. 관할 소방서에 신고가 들어오고 경찰이 출동했다. 누군가 우체통이 춥다(?)고 불씨가 남은 담배꽁초를 우체통에 집어 넣은 것이다. 우체통은 불연성 FRP 재질이라 무사했다. 대신 안에 있던 편지 스물 다섯 통이 재만 남기고 다 타버렸다. 그나마 청첩장만 목숨을 부지했다. 동부산우체국은 청첩장 주인에게 거듭 미안하다며 사과해야 했다. 스물 다섯 통의 우편물 주인은 지금도 영문을 모르고 살 것이다.

월요일은 지갑이 많다. 오늘 수집된 지갑만 해도 14개다. 아마, 금요일과 토요일 밤을 술로 지새운 행인들의 지갑일 거라고 집배원들은 추측한다. 슬쩍하고 버린 지갑들이다. 그중 잃어버린 지갑도 있다. 수집된 지갑엔 언제나 지폐와 교통카드가 빠져있다. 그래도 고마운 건 신분증이 남아있다는 점이다. 이런 지갑들은 인적이 드문 우체통에서 나온다. 서리꾼들의 센스라고나 할까! 옆에 있던 박성용(42) 집배원은 "모든 지갑이 다 와도 제 지갑은 안 옵디다"라며 수집한 지갑들을 앞에 두고 탄식한다.

수집 시작 10분^ 우편물 사이로 '용서받지 못할 쓰레기'들이 보인다
학교 주변은 아이들의 장난끼가 그대로 반영된 쓰레기가 출몰한다. 과자봉지는 예사다. 침 가득한 사탕은 잊을 만하면 등장한다. 시험철이 되면 붉은 색연필이 군데군데 보이는 답안지도 심심찮게 나온다. 물론 동그라미보다 가위표가 많은 시험지다. 쓰레기통에 버리기에도 차마 부끄러운 성적이었을까. 그 쓰레기를 우체통에 버리고야만 그 아이의 심사가 애처롭다. 시험지만 버리면 외롭다고 생각했는지 가끔 교과서도 나온다.

"과자봉지는 애교지요. 여름철엔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그대로 우체통에 넣은 경우도 있습니다. 차라리 다 먹고 그러면 좋을 텐데, 어중간하게 남은 아이스크림이 녹아 같이 있던 편지를 물들게 합니다. 이럴 땐 굉장히 난처합니다. 일일이 걸레질해서 닦아내도 그 상흔은 남는 법이지요."

오늘 수집한 불량 우편물은 취재하는 걸 알았는지 평소보다 다양하다는 설명이다.

담배꽁초, 지갑, 시험지까지 다양

닭꼬지가 보이고, 연극표도 보인다. 은행대출 광고지도 서너장. 배터리가 나간 휴대폰, 나이트클럽 광고. 쓰레기이긴 하지만 충분히 이해가 된다. 쓰레기 더미에서 뜯지도 않은 초코파이 두개가 발견됐다. 옆엔 비닐봉지로 싼 부활절 계란도 두개 있다. 아마, 이를 버린 사람은 우체통을 음식물 보관소라고 생각했거나, 굉장히 배가 부른 사람일 게다.

''아니, 벽돌조각이?'' 기자가 놀래자 이장근씨가 초연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요새 바람 세게 분다고, 우체통 날라가지 마라고 넣은 거 겠죠." 납득되지 않은 추측 앞에 잠시 침묵이 흐른다.

그래도 아직은 ''습득물은 우체통으로''라는 인식이 많은지 신분증과 의료보험증이 꽤 된다. 이런 물품들은 우체국에서 목록을 만들어 관할 경찰서로 보낸다.

106개의 우체통에 노획한 쓰레기들. 계란은 아직도 싱싱하다.
예전엔 입에 담기 힘든, ''하물며 우체통은 오죽할까'' 싶은 콘돔, 생리대, 입다 버린 속옷도 자주 나왔는데 요새는 거의 없다고 한다. 그 사이 시민의식이 성숙해졌다는 증거일까?

가끔 애교섞인 우편물도 등장한다. 우표값이 220원으로 바뀌면서 미처 190원짜리 우표를 처분하지 못한 분들이 편지에 30원을 붙여 우체통에 넣기도 한단다. 이럴 땐 우체국 직원들이 돈을 우표로 바꿔 보낸다. 일전엔 수재의연금도 우체통에 들어 있었다. 성금을 어디로 낼지 몰라 당황했을 법한 수재의연금 주인의 얼굴이 상상이 된다.

"쓰레기는 그나마 낫습니다. 가끔 우체통에 화풀이를 하거나, 술을 먹고 뒷풀이(구토물)를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엄연히 공공기물이기 때문에 훼손하시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최세환 집배실장의 설명이다. 참고로 우체통 한대 설치비용은 27만 3천 490원이다. 우체통을 물리적으로 모욕한 사람은 이 금액을 물어내야한다.

우체통 앞면엔 우체국의 상징인 제비가 날고 있다. ''빠르고 신속하게 좋은 소식을 전한다''는 뜻이다. 제비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우체통은 오늘도 우편물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사람들아! 닭꼬지 아이스크림 먹고 제발 쓰레기통에 버려라. 아이들아! 시험 못 쳤다고 우체통에 화풀이 하지 말아라. 흡연자들이여! 행여 백분양보해서 꽁초를 우체통에 버릴 긴급한 상황이더라도 불은 꺼서 버려라. 당신들의 긴급함 때문에 우체통이 위급해져서야 될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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