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前 고수의 사랑법'' -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박석무박석무
박석무는 연꽃으로 유명한 무안사람이다.

감옥에 들락거리던 그는 감옥에서 한학을 접하고 출소 후에 광주시내에 한문을 번역하는 자그마한 사무실을 낸다. 그 사무실 덕분에 호남 각지방의 족보를 줄줄줄 꿰게 되는데 그 때 다산 정약용을 만나게 된다.

두 차례의 국회의원을 지낸 후 다산연구소를 차려 다산에 대한 넘쳐흐르는 사랑을 표현하는 그 앞에 바로 지난주 영원히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다산의 ''하피첩(霞奸帖)''이 등장한다. 하피첩은 다산이 강진에서 귀양중 아내가 보내온 아내의 치마폭을 잘라 쓴 글을 모은 책이다.

정약용과 박석무의 이야기를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들어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셨죠?

네. 무안은 지리적으로 목포 가까이 있는데요. 연꽃이 많이 피어서 무안회산방죽이라고 연꽃축제가 벌어지는데 아주 장관이에요. 또 초의선사가 무안 출신이에요. 초의의 생가도 복원해서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죠.

- 학창시절에 광주로 유학을 가셨다구요?

무안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요. 막내 삼촌이 광주에서 대학을 다니고 계셨기 때문에 우리 형제들은 다 중고등학교를 광주에서 다녔어요.

- 1964년 대학시절에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처음 구속되셨죠?

네. 그리고나서 65년에 월남파병 반대로 구속됐어요. 우리는 대학 때 월남파병에 대해서는 적극 반대했어요. 그래서 전남대학에서 시위를 일으켰는데, 그 구호가 과격했어요. 제가 플래카드에 "우리는 월남 사지에 양키들의 방패가 될 수 없다!"고 썼어요. 그게 대반향을 일으켰고, 당국에서는 빨갱이들이 하는 이야기로 했죠.

우리는 월남파병이야말로 정부의 잘못된 결정이라고 생각해서 과격하게 시위했는데, 집회법과 반공법에 위반된다면서 조사를 받았죠. 그런데 법원에서 영장을 기각한 거에요. 그 때가 65년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재판부가 그렇게 나약하지 않았어요. 69년 삼선개헌 지나고부터 정보부가 검찰과 법원을 장악하면서 시키는대로 들었지만, 65년만해도 젊은 판사들이 해당되지 않는 법률에 대해서는 기각하곤 했어요.

그래서 신청, 기각이 서너 차례 법원과 검찰 사이에서 핑퐁처럼 왔다갔다하다가 결국 영장이 기각됐어요. 그러니까 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대한 영장을 발부해서 두 번째로 구속됐죠. 구속되서 한달 가량 지냈는데요. 그 당시에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강제징집 영장을 발부됐어요. 학생들이 계속 동료 석방하라고 데모를 하니까 이들을 무마하는 방법으로 군대를 보내버리면 대학가도 조용하고 데모도 안 할 것이라는 그들의 요법이었어요.

당시엔 학생들을 잘 구속하지 않던 때였어요. 근데 워낙 우리가 괘씸하다고 해서 잡혀들어갔는데, 사실 별볼일이 없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구속 적부심을 신청했어요. 변호사들이 학생들 시험도 닥치고 어쩌고 해서 우선 시험을 보고 불구속으로 재판을 받으라고 적부심에서 풀어줬어요. 그래서 나왔는데 집에 와보니까 군대갈 영장이 나왔더라구요. 우리는 구속됐었기 때문에 이미 학교는 퇴학 당한 상태였고, 영장이 나와서 군대를 갔죠. 그후 68년에 제대해서 재입학을 했죠.

- 그 다음엔 언제 구속됐죠?

김남주 시인이 저질렀던 함성지 사건. 당시 저는 대학 졸업하고 교사로 있을 때인데. 이 친구들이 고문을 하니까 결국 내가 시켰다고 해서 저는 국가보안법 수괴로, 소위 광주고법 산하에서 제일 큰 사건이 벌어졌죠. 국가보안법으로 재판 받아서 74년 12월 31일에 1심에서 다 유죄를 받았는데 항소심에서 저만 무죄를 받았어요.

- 그러고보면 의외로 운이 좋으신 것 같아요.

운이 좋죠. 그 후로 80년대 5.18 때 구속됐어요. 사실 5.18 당시엔 처음에 잡혔다면 제가 어떻게 됐을지 몰라요. 근데 5월 27일에 저는 주변 권유로 광주를 떠난 겁니다. 은신을 했죠. 당시 전 수배중이었는데, 그 때 잡혔다면 요지경을 당했을 거에요. 저는 고등군재(고등군사재판) 끝나고 검거됐어요. 그러니까 다 끝나버렸는데 제가 잡힌 거에요. 그러나 저는 현상금과 1계급 특진으로 수배를 했기 때문에 그냥 내줄 순 없었죠. 그래도 다 조상의 덕으로 그런 고비를 넘겼던 것 같아요. 만약 73년에 유죄로 국가보안법에 걸렸다면 결혼도 못 했을 거에요.

80년에 8개월 동안 은신하는 동안 창비에서 나온 저의 첫 번째 책이 ''다산 산문선''입니다. 이 번역서는 제가 도망다니며 숨어지내는 동안 그 외로움과 쓸쓸함,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번역한 거에요. 그래서 82년에 출소하고 난 후 수정을 해서 84년에 간행됐어요. 책 발문에 "다산이 마치 유배지에서 그 많은 저서를 남겼듯 저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숨어지내면서 외롭고 쓸쓸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이 작업을 끝냈다"고 썼어요. 여러 가지로 감회가 깊은 책이에요.


- 한학은 어릴 때부터 배우셨어요?

묵향이 짙은 집안이었어요. 할아버지와 증조부께서 한학자셨어요. 3대가 문집이 있는 집안이에요. 어릴 때부터 집에 오면 그런 소개서라든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글 놓고 토론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죠. 중고등학교 다닐 땐 한문을 잘 하는 편이었어요.

감옥에서는 시국사범에게 들어오는 도서가 검열이 굉장히 심해요. 그래서 그런 검열을 피하기 위해 아예 한문, 그러니까 한문책이 들어오면 그들이 잘 모르기도 하고 한문이라고 하면 보수라고 생각하니까 검열 자체를 안 하는 거에요. 하하. 그래서 감옥에서 다산전서도 다시 정독을 했어요. 73년에 1년 동안 감옥에 있었는데, 책만 읽는다면 1년이란 시간은 엄청난 시간입니다.

- 수배중에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당시엔 ''잡히면 죽는다''였어요. 늘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 있는데, 또 아무 일도 안하고 무료하게 있는 건 못 견디는 거에요. 30대 후반의 그 시절에 그런 불안을 떨구게 한 게 난해한 다산의 글을 옥편 찾아가면서 읽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내가 죽기 전에 책 하나만 남기기도 아쉬웠구요. 다산을 좀더 알려야겠는데, 이 난해한 글을 익숙하게 읽고 풀어서 해석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전 번역엔 자신있었고, 이미 번역을 한 적도 있었고. 그래서 아침부터 밤까지 자는 시간 외에는 일부러 더 거기에 매달렸어요. 5~6개월을 그렇게 보냈어요. 거기서 손을 놓으면 생각은 죽음의 그림자로 드리워지고.

세월이 지나 그해 겨울 5.18 관계자들 1심과 고등군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어요. 소문을 듣자하니 저를 찾는 게 느슨해졌다고 하더라구요. 근데 12월 말에 아버지 생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고향집을 급습하려고 충청도 온양에서 버스타고 기차타고 검문소를 피해서 야밤에 고향으로 간 거에요. 거기서 가족들과 하룻밤을 새고 어른들만 뵈었어요. 애들은 만나면 떠들어대니까. 새벽에 동트기 전에 동네사람들 안 보게 떠나서 몇 십리를 걸었어요. 함평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다시 영광, 고창, 군산으로 가서 서천에서 장항선을 타고 온양으로 올라오고... 이 하루가 도망다니던 기간 중 아주 드라마틱한 날이었죠. 아마 소설 단편감은 될 거에요. 하하.

박석무
- 맨처음엔 광주 충장로에서 4평짜리 한문 번역소를 차리셨다고요?

대학을 졸업하고 5.18까지 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는데요. 73년에 함성지 사건으로 한번 해직됐고, 80년에 또 해직됐어요. 82년 초에 출소를 하니까 복권도 안되고, 애들은 자라고, 살 길이 없었어요. 게다가 정보과 형사들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어요. 그래서 그들의 감시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생각하다보니 한문 번역이 떠오른 거죠. 한문 번역이라는 것도 보수니까, 이걸 하면 방해를 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충장로 한귀퉁이에다가 작은 사무실을 얻어서 문중별로, 향교로, 소위 말하는 보수계통 쪽으로만 한문 번역소를 차렸어요. 족보나 문집이나 묘비문 번역을 원하는 분은 일을 맡겨달라고 했는데, 의외로 수요가 있더라구요. 집안별로 족보를 번역하겠다, 선조 문집이나 묘비명을 번역하겠다면서 꽤 번역거리가 들어오더라구요. 사실 이 일도 처음엔 시골에서 한복입고 갓 쓴 분들만 찾아왔어요. 다른 사람들은 "거기 가면 정보과에 찍힌다"고 해서 안 왔죠. 그래서 한때는 매우 쓸쓸했어요.

그리고 당시 무크지가 한창 나올 때였는데, 저한테 원고를 많이 청탁했어요. 제가 그 때 집사람에게 "원고료 받아 매달 집에 30만원씩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복권되서 학교로 복직하기 전까지 3년 동안 거의 매달 30만원씩 줬어요.

85~86년 되면서 광주도 5.18 세력들이 조직을 형성해 독재정권과 싸우는 게 강렬해지면서 상대적으로 한 명의 개인을 감시하는 건 느슨해졌는데요. 그렇게 되면서 이 사무소가 번역소가 아니라 운동권 모임 사무소가 된 거에요. 87년 6.10 항쟁 때는 완전히 그 장소가 집합소가 되어서, 거기서 반정부 성명서 초안을 만들고, 송기숙 교수나 김준태 시인 같은 친구들이 들락거렸죠

- 그런데 왜 하필 다산이었나요?

제가 감옥에서만 다산을 공부한 건 아니에요. 대학 다닐 때 교수들이 제가 한문에 밝다는 걸 다 알았어요. 그중 한 교수가 저에게 "한국법학에서 문제는 한국 법사가 없다는 것, 소위 말하는 리갈 히스토리, 법의 역사에 관한 연구가 부족하다"고 하면서 "법사를 연구하려면 한문을 해야 한다, 그런데 서양이나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한문을 몰라서 법사를 할 수 없는데, 다행히 자네는 한문에 능하니 법사를 연구하게"라고 권했어요. 그래서 저는 법사를 공부하려고 대학원에 들어갔어요. 법의 역사를 보려고 제일 먼저 손 댄 게 경세유표에요. 그리고 다산은 어떤 사람이냐를 알아보려고 전서를 읽다보니까. 이분이 법사만이 아니라 시나 편지, 자연과학에도 밝은 거에요. 결국 대학원에 들어가서 법사만이 아니라 다산 전반에 대해 공부할 기회가 시작된 거에요.

그러다가 감옥에서 다산 책을 받아서 또박또박 정독하게 됐죠. 80년 5.18 때 도망다니는 8개월 동안, 그리고 감옥 안에 있던 15개월 동안, 이렇게 2년 동안 잠자는 시간 외에는 다산의 책과 씨름을 한 거에요. 2년이란 시간이 책 쓰고 글 읽고 번역하는 시간으로는 엄청난 시간이에요.

시만 봐도 미치게 좋고, 문학을 읽어봐도 미치게 좋고, 계속 빠질 수밖에 없는 거에요. 목민심서 같은 거 읽어보면 어떻게 그 시절에 그런 지혜를 얻었으며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거에요. 읽을 수록 더 좋고,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제가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라는 책을 냈는데요. 고은 선생은 그 책 보고 울었다고 하더라구요.

- 아내의 치마폭을 잘라 쓴 글 ''하피첩''이 최근 화제가 됐는데요?

요새 하피첩이 나왔다면서 신문에서 떠드는데, 내용으로 볼 때 진품인 것 같아요. 다산이 쓴 기록을 보면 ''유배살이 수 년째에 몸도 안 좋은 아내가 인편에 시집올 때 입고 온 치마를 보내 왔길래 치마 네 폭으로는 두 아들에게 준 경계의 말을 적었고, 나머지는 조그만 가리개를 만들어서 딸아이에게 준다''는 내용이 있어요. 딸에게 준 것은 박물관에 ''매조도''라고 해서 소개됐고, ''하피첩''은 86년 서울신문에 다산의 부부애라고 해서 제가 소개한 바가 있어요.

상상을 해보세요. 결혼 10년째에 10년 동안 못 만난 유배 사는 남편에게 왜 부인의 치마를 보냈을까? 또 그 치마를 받은 남편은 그걸 어떻게 활용할까? 재밌잖아요. 행여 이 남자가 나를 잊고 딴 마음을 먹을까봐 나를 상기시키기 위해서라도 빨간 다홍치마를 보내서 날 잊지 말라고. 옛날 사랑은 은근하기 때문에 점잖은 부인이 치마를 보내준 거에요. 그렇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은근하게. 그걸 받아든 다산의 태도도 재밌고요. 우리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에게 길이 남도록 경계의 말을 써준 거죠. 참 재미있는 200년 전의 사랑, 고수들의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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